나의 미니카들, 좌측 하단 미니카를 주목


티브이를 보면 또 유행이 돌고 돈다는 것을 단적으로 아주 잘 알 수 있다. 옛날에는 집에 있는 티브이를 들고 다니며 볼 수 없을까, 하는 염원이 있었다. 그 바람이 고속버스에서 티브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더 작은 티브이가 있었으면 하던 바람으로 4인치 정도의 유선 티브이가 나왔다. 라디오 겸용 티브이가 유행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 소형 티브이는 대형 티브이보다 비쌌으며 대부분 일본 제품이었다. 후에 삼성 제품이 나오기도 했지만. 카세트 플레이어 만해서 어디든 들고 가서 플러그만 꽂으면 티브이가 나왔다,라고 하기에는 전파 수신이 어려워서 지지직 거렸고 방송 3사밖에 없어서 생각하는 것처럼 티브이를 제대로 시청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작은 것을 원하게 되었고 일본의 소니 회사는 그 니즈를 파고들어, 미국에서 대형 제품을 만들어 놓으면 똑같은 제품을 반대로 소형으로 만들어서 제품을 내놓았다. 그러다 보니 티브이가 점점 작아져 현재의 휴대전화만 한 티브이들이 각광을 받았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작은 손 안의 티브이를 누구나 다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만이 그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손 안의 티브이, 카시오에서 나온 포켓용 티브이가 나오기도 했는데 걸어 다니며 티브이를 막 볼 수는 없었다. 역시 전파 수신의 문제와 옛날에는 정규방송 시간을 제외하고는 낮에는 방송 송출 자체가 없었다. 한때 사람들은 티브이의 마법에 걸렸었다. 티브이가 나오기 이전에는 전쟁 중에도 어디선가 발행한 잡지나, 문고본 소설을 읽었고 6, 70년대에는 모두가 매일 아침에 나오는 신문을 찾아서 읽었다. 신문 속에는 정치, 경제뿐 아니라 재미있는 만평이나 만화, 매일 연재되는 소설도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를 쓰고 신문을 읽었다.


신문에 매일 연재되는 소설을 한때 황석영 소설가가 썼다. 1974년 7월부터 1984년 7월까지 한국일보에 연재를 했다. 정말 대단하다. 그때 황석영이 매일 소설을 써서 연재를 하는 것이 너무 힘이 들었다. 정말 미칠 것 같았다. 그래서 하루는 어디 멀리서 소설을 써서 우편으로 보내주겠다,라고 하면서 도망을 쳤다. 현실도피를 한 것이다. 에잇 나 몰라라 하며 어떻게든 되겠지, 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가버렸다. 신문사에서는 큰일이 난 것이다. 사람들은 하루도 장길산을 읽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요즘의 우영우를 눈 빠지게 기다리는 심정보다 10배는 더 할 것이다. 그래서 황석영 담담 기자가 있었는데 손을 번쩍 들고 제가 잡아 오겠습니다!라고 한 사람이 바로 현재 대작가가 된 소설가 김훈이었다.


김훈의 소설을 몇 권 읽었는데 ‘칼의 노래’라든가, ‘공무도하’나, 에세이 ‘밥벌이의 지겨움’ 같은 책은 어느 정도 그대로 술술 읽힌다. 남한산성을 읽을 때였는데, 한 페이지에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이 나오는 것이다. 그냥 휙 하고 지나가면 그만이겠지만 뭐랄까 남한산성 같은 경우는 김훈이 마치 타임리프를 해서 그 당시, 남한산성 그 장소에 가서 마치 눈으로 본 것을 그대로 적확하게 표기하는 기분이 들어서, 그 당시에 썼던 단어들, 그러니까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들을 사전을 찾아서 일일이 각주를 달아서 읽다 보니 몇 달이 걸렸던 적이 있었다. 와 이 사람, 김훈이라는 작가는 참으로,,,, 같은 생각을 했었다. 아무튼 김훈 작가가 황석영 담당 기자였을 적에 – 휴대폰도 없을 시기에 아이구 힘들어라, 하며 내뺀 황석영을 잡으러 다녔던 말이지. 김훈의 딸은 영화제작자인데 싸이런픽쳐스 대표다. 여기서 오징어 게임을 만들었다.

남한산성은 책을 읽고 난 뒤 영화를 보는 것도 좋다. 영화 역시 책만큼 잘 만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김상헌과 누리가 헤어지는 장면이다.

어린 누리의 눈에 비친 대감 김상헌은 유일하게 할아버지와 연결된 끈이었다. 이 전쟁만 아니었다면 할아버지와 민들레가 필 때 강가에 나가 꺾지를 잡고 놀았을 누리는 헤어져야만 하는 김상헌이 미우면서 고맙기만 하다. 민들레가 필 때면 저를 다시 데리려 오시는 겁니까.라고 울먹이며 묻는 누리의 말에 그리하겠다고 말하는 김상헌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만감이 교차한다.


김상헌의 눈빛에서 누리의 할아버지를 죽어야만 했던 자신의 과오를 끝끝내 밝히지 못함을 용서해달라, 나는 그리 할 수밖에 없었음을 용서해달라, 너를 지켜주지 못함을 용서해달라, 나 보다는 날쇠의 곁에 있음이 너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을 한 나를 용서해달라.


김상헌과 최명길의 김윤석과 이병헌은 영화인지 소설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김상헌은 톨스토이와 비교가 되었고 최명길은 도스토옙스키와 비교가 되었다. 먹고살기 위해 죽어가면서 글을 쓴 도스토옙스키가 우아하고 허리를 굽히지 않는 톨스토이의 멋진 글보다 와닿는다. 하지만 소설을 읽을수록 영화가 말미로 갈수록 그렇게 단순하게 비교할 수 없었다.


김상헌과 최명길은 방법이 달랐을 뿐 같은 길을 갈 뿐이었고 서로를 몹시도 경외하고 있었다. 이병헌의 백두산 고군분투기에서 에이 뭐야, 했지만 남산의 부장들과 남한산성에서의 이병헌은 정말 최고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상헌이 누리를 끌어안고 보이는 눈빛은 나라를 이렇게 만들어서 미안하다는, 이 모든 잘못된 것들이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 너는 반드시 살아나서 아름답게 민들레 꽃을 피우거라. 그렇게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 뼈를 갉아먹던 추위를 몰아내고 산과 들에 꽃을 피웠다.


영화 1917에서도 처참하고 또 처참한 전시상황 중에서도 꽃은 피어난다. 황폐하고 무지하고 포탄에 엉망진창이 된 곳에서도 꽃은 피어나고 생명은 태동했다. 김상헌은 누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준다.


영화는 그 어느 것 하나 오버하는 법이 없다. 소설에 신세를 지는 만큼 소설에게 욕을 들어먹지 않게 꾀부리지 않고 이전의 사극을 우려먹지 않았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왕과 나라를 생각하는 김상언과 최명길의 연기는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김훈의 날이 바짝 선 호흡을 정공법의 영상으로 옮긴 남한산성이었다.


이번에 안중근 의사의 7일 동안의 이야기가 소설이 되었다.


김훈의 아버지가 우리나라 1세대 소설가 김광주 선생이었다. 김광주 선생은 당시 중국의 남영의학대학을 다니다가 중퇴했다. 그리고 소설을 썼는데 그 당시에는 무협소설 격인 수호전으로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64년인가 김광주 선생은 후배 소설가들을 모아 놓고 아직 꼬꼬마였던 김훈에게 막걸리를 사 오라 심부름을 시켰다. 김훈이 이렇게 막걸리를 방에 넣어주며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버지와 소설가들이 하는 이야기가, 우리 우리의 밥줄이 끊겼다, 너 그 녀석 소설을 읽어봤냐? 그 녀석 소설이 한국문학의 판도를 바꿀 것이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녀석이 누구냐면 64년에 등장한 ‘무진기행’의 김승옥이었다.


뭐 아무튼 사람들은 그렇게 활자를 읽고 상상하는 것에 지치지 않았다. 티브이도 없고 뭐 그런 시대니까. 그러다가 영화의 붐이 일어났다. 아마 6, 70년대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가 아니었을까 싶다. 사람들은 극장으로 모여들어 영화를 봤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서울이나 대도시에 한해서였다. 지방의 변두리에서는 영화는 상상도 못 할 이야기다. 일단 극장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고생들은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주말에 먼길을 나가서 극장이 있는 도시까지 가서 영화를 보고 오는 것에 하루를 몽땅 소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클라크 케이블, 비비안 리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잉그리트 버그만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었다.


그러다가 티브이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한 동네에 티브이가 있는 집으면 매일 저녁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김일이 나오는 프로레슬링이 하는 날이면 동네 축제라도 열린 것 같았다. 모두가 모여 티브이를 보니 마치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김일 선수의 몸짓 하나에 모인 마을의 사람들, 어른이고 애고할 것 없이 탄성과 환호가 오고 갔다. 그런 시대를 거쳐 70년대 후반기부터 각 가정에 티브이가 전부 보급이 되기 시작했다. 어떤 집에는 거실에 티브이가 한 대 있고 부모님 방에 따로 티브이가 있기도 했다.


티브이는 점점 작아져서, 그 바람인지 휴대전화가 나오기 시작했고 스마트폰으로 티브이를 볼 수 있는 시대까지 왔다. 그렇게 티브이 화면을 작게 만들려고 하던 예전에서 이제는 폰의 화면이 자꾸 커지고 있다. 이제는 걸어 다니면서 폰으로 티브이를 보는 게 너무나 당연해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작은 화면에 만족하지 못하고 태블릿을 만들어내더니 태블릿의 화면도 점점 커지고 있다. 이제는 아이폰 4만 한 작은 폰을 들고 다니면 신기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덱스터의 마지막 시리즈를 보면 모든 건물이나 자동차 내지는 옷들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폰이 아이폰 4다. 그래서 아 벌써 그렇게 오래되었구나, 하게 된다.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너는 돈이 많으면 뭘 하겠느냐고 묻던데, 나는 돈이 많으면 돈이 많이 드는 피겨를 구입하고 싶다. 요즘 피겨는 정말 어마어마한 가격들이라 일반인들은 큰 마음먹고 지갑을 열지 않는 이상 피겨를 구입할 수 없다.


피겨도 유행이 있고 돈다. 매체가 아무리 발전을 해도, 유튜브가 모든 영상을 독식하듯이 해도 또 책이, 책 속의 이야기가 모든 유행을 선도한다. 스토리텔링도 그렇다. 현재는 이[] 세계 이야기, 좀비나 히어로 물이 유행을 타고 있지만 역사 속의 이야기가 또 유행을 타게 될지도 모른다.

두 대 빼고 이 세상에 없는 미니카들


제일 위에서 좌측 하단의 미니카가 어디에 나왔냐 하면 바로 에반게리온에서 네르프 공식 업무용 쿠페로 나온다. 이전에는 울트라맨에서 나왔다. 이 정도로 유행은 돌고 또 돌고 계속 돈다. 유행에 가장 민감한 부분이 의상일 텐데 모두가 알겠지만 지구 상에 더 이상 새로운 의상이 없다. 그냥 계속 돌고 돌고 리폼하고 또 돌고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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