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에서 이달의 페이퍼나 리뷰로 당선되어 적립금을 받는 일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물론 세 번뿐이라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특히 처음 당선되었을 때의 신선한 느낌은 상상하지 못한 보너스와도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선정 기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도대체 무엇이 이 글들을 선택하게 만들었을까?
세 차례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다른 글보다 더 신경을 쓴 글보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써 내려간 글들이 당선되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름 신경을 썼던 '똥'에 대한 글보다, 아무런 기대 없이 썼던 '고요한 읽기'에 대한 글이다.
좋은 글이란 무엇일까? 신경을 쓴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고, 계획 없이 흘러나온 글이 뜻밖의 반응을 얻기도 한다. 이는 내 경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작가들이 글쓰기 과정에서 고민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앤 라모트(Anne Lamott)는 『쓰기의 감각』에서 커트 보니것의 말을 인용하며, 글쓰기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즉흥적인 과정인지를 강조했다.
'나는 글을 쓸 때, 입에 크레용 하나를 물었을 뿐 팔도 다리도 없는 사람처럼 느낀다.' (p. 80)
이 말은 글쓰기가 때로는 서툴고 어설프게 느껴질 수 있지만, 동시에 어린아이처럼 솔직하고 즉흥적인 감각에서 시작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완벽한 계획 없이 쓰여진 글이 더 강한 울림을 가질 수 있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탈리 골드버그(Natalie Goldberg)는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https://image.aladin.co.kr/product/17300/11/coveroff/8956993408_2.jpg)
좌선을 할 때 당신은 사라져야만 한다. 좌선이 좌선을 하도록 만들어라. 이것은 글쓰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글이 글을 쓰도록 하라. 당신은 사라진다. (p. 92)
그녀는 머리로 문장을 완벽하게 다듬으려 하면 글이 경직될 수 있음을 경고하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글쓰기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글쓰기란 단순히 흘러가는 대로 쓰는 것일까? 즉흥성과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좋은 글이 나오는 걸까? 애트우드는 글쓰기의 또 다른 측면을 이야기한다. 그녀는 글쓰기가 단순한 표현의 행위가 아니라, 내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는 『Negotiating with the Dead: A Writer on Writing』(한국어 제목으로 『죽은 자들과 마주하는 글쓰기』정도가 좋을 것 같다.) 에서 글쓰기가 단순한 표현의 행위가 아니라, 내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Possibly, then, writing has to do with darkness, and a desire or perhaps a compulsion to enter it, and, with luck, to illuminate it, and to bring something back out to the light."
(아마도 글쓰기는 어둠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욕망, 어쩌면 강박과도 연관이 있다. 운이 좋다면, 우리는 그 어둠을 밝혀내고, 다시 빛 속으로 무언가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즉, 글쓰기는 단순히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적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 그곳에서 무언가를 끌어내는 과정일 수도 있다.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최근 들었던 『The Source of Self-Regard』(『자존의 근원』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검색해보니 제목은 책의 목차 중 하나인 Invisible Ink(‘보이지 않는 잉크’)에서 따온 것이었다.)에서 글쓰기가 단순한 내면 탐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통해 지식을 확장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What I needed was imagination to shore up the facts, the data, and not be overwhelmed by them. Imagination that personalized information made it intimate, but didn’t offer itself as a substitute. If imagination could be depended on for that, then there was the possibility of knowledge.
(내가 필요로 했던 것은 사실과 데이터를 보강해 줄 상상력이었고, 그에 압도되지 않는 것이었다. 정보를 개인화하고 친밀하게 만드는 상상력, 그러나 그것이 대체물로 제공되지는 않는. 만약 상상력이 그것에 의존할 수 있다면, 지식의 가능성이 있었다.)
이 말은 글쓰기가 단순한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독자의 감정을 움직이고, 그들과 교감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글은 즉흥적으로 흘러나올 수도 있고, 내면의 어둠 속에서 길어 올려질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독자와의 연결 속에서 의미를 형성하는 것이야말로 글쓰기의 핵심 아닐까?
여담이지만, 생각나는 대로 인용하고 보니 흥미롭게도 언급한 작가들이 모두 여성이다. 단순한 우연일까? 어쩌면 글쓰기의 본질에 대한 섬세한 탐구가 여성 작가들에게서 더욱 자주 발견되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그렇다면 독자와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모리슨은 글쓰기에서 자기 신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작가가 자신의 글을 신뢰할 때, 비로소 글이 독자에게도 진정성 있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나치게 애쓰며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에 맡길 때 진정한 창작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다른 작가들의 견해와도 일맥상통한다.
결국,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글, 애써 꾸미지 않은 문장이 때로는 더 깊이 있는 울림을 남긴다. 독자와 교감하는 글이란 단순한 기교가 아니라, 그런 신뢰 속에서 탄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알라딘에서 당첨된 내 글들도 그러했다. ‘잘 써야지’라는 의식 없이, 어떤 순간에 밀려오는 감각을 따라 쓴 글들이었다. 계획하고 쓴 글이 아니라, 어느 날의 생각과 감정이 저절로 흘러나온 글. 그렇다면 좋은 글이란 단순히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내적 필연성 속에서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글을 쓴다는 건 결국 자신과의 대화이자, 독자와의 조용한 교감인지도 모른다. 문장을 다듬고, 단어를 고르며, 가끔은 망설이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그저 글이 스스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 그렇게 나온 글이 누군가에게 닿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글이 아닐까.
글을 쓰는 동안, 한 번도 직접 만나본 적 없는 작가들과 대화를 나눈 기분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도 아닌 내가 쓴 글을 일부러 찾아와 읽어주는 몇 안 되는 알라딘 친구들에게. 그렇게 글은 흘러가고, 문장은 이어진다.
하지만 글쓰기는 어렵다. 결국, 글쓰기가 어렵다는 게 결론이다. 생각을 글로 옮기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머릿속의 그것이 아니다.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는 사이, 말하고 싶었던 본래의 감각은 희미해지거나 전혀 다른 모습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쓴다. 어쩌면, 완벽한 문장은 없을지라도, 누군가의 문장을 따라 읽고, 또 누군가의 문장에 답하듯이, 그렇게 읽고 쓰는 일이 연결되고, 또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읽는다.
그리고 적립금으로 책을 샀다. 김금희의 『나의 폴라 일지』, 『대국』, 그리고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반유행열반인 님, blueyonder 님, 서곡 님께 각각 ‘Thanks to’를 했다. 알라딘에서 몇 안 되는 친구분들께 작은 감사를 전할 기회가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