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읽기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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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작가와의 첫 만남은 『고요한 읽기』를 통해 이루어졌다. 에세이라서 가벼운 마음으로 펼쳐든 책 속에는 단순한 감상의 나열을 넘어서는 깊은 통찰과 치열한 사유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특히, 오르한 파묵이 "사무원처럼" 일한다고 비유하며 소설가의 역할을 설명한 부분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시인이 신의 계시를 받는 자라면, 소설가는 신의 의도를 스스로 해독하며 끊임없이 애쓴다는 파묵의 관점은 이승우의 글쓰기 태도와 맞닿아 있다. 그는 언어의 미로 속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며, 독자에게 피상적인 독서를 넘어 진정한 내면 탐구를 요구한다.


『고요한 읽기』는 현대인의 분주한 일상 속에서 잃어버린 내면을 되찾는 여정을 제안한다. 이 책에서 이승우가 말하는 '고요한 읽기'는 단순히 소음이 차단된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독서 행위를 넘어, 자기 자신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 내면의 흩어진 자아를 재구성하고 세상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고독한 순례와 같다. "세상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지만, 그러나 그는 ‘세상의 끝‘에 있다."라는 그의 표현은, 현대인이 피상적인 관계와 욕망에 휩싸여 자아를 외면하는 현실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이처럼 내면으로 향하는 고독한 순례로서의 '고요한 읽기'는,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곳, '감추어진 동굴'로 들어가 흩어진 자아의 조각들을 모으고 재구성하는 치열한 과정이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인용하며, 이 여정이 자아를 이해하고, 나아가 세상과 타인을 이해하는 출발점임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그는 "읽기는 흩어진 것을 모으는 작업이며, 무한을 유한 속에 담아내는 과정"이라고 강조한다. 독서는 단순히 관점을 넓히는 것을 넘어, 우리가 무지와 미지의 경계를 탐색하며 존재의 본질을 깨닫게 한다.


특히, 이 책에서 주목할 점은 성경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접근법이다. 그는 성경을 단순히 신앙적 텍스트로 읽는 대신, 인간 존재와 세계에 대한 보편적 질문을 던지는 문학적, 철학적 텍스트로 다룬다. 성경에서의 구절들은 단순한 교리적 해석을 넘어 인간이 비참함 속에서도 위대함을 추구하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거울로 기능한다. "모르는 부분이 남겨져 있어야 한다"는 그의 통찰은 성경의 해석 여지를 인정하며, 그것이 독서와 해석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설득한다. 이러한 접근은 독자에게 신앙과 삶을 동시에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오르한 파묵의 비유는 독서를 통한 창조의 본질을 새롭게 조명한다. 예술적 천재성이 영감에 의존하는 낭만적 신화로 묘사되는 대신, 치열한 노력과 성실함 속에서 피어나는 꽃과 같음을 상기시킨다. 이승우는 "영감은 작품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작가의 작업이 얼마나 고된 반복과 실패를 통해 이루어지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독서는 단순한 문장을 따라가는 행위가 아니라,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신을 재발견하는 숭고한 작업임을 깨닫게 한다.


디지털 시대의 정보 과잉 속에서 『고요한 읽기』는 독서가 단순한 지적 활동을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도구로 자리하며, 더 나아가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성찰을 일깨우는 과정임을 강력히 보여준다. 이승우는 "인간은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파스칼의 말을 인용하며, 독서가 우리 존재의 비극과 위대함을 동시에 마주하게 하는 행위임을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독서는 단순히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감추어진 동굴을 비추는 등불"처럼 내면 깊숙이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는 과정이다. 독자는 책장을 넘기며 자신과 세상을 새롭게 읽는 경험을 하고, 그 과정에서 내면의 목소리와 세상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고요한 읽기』는 단순한 문학 에세이를 넘어, 우리를 잊혀져가는 내면으로 이끄는 철학적 여정의 동반자이다. 이승우는 문학이 인간 존재의 깊이를 확장하고 삶의 지평을 넓히는 힘을 가졌음을 증명한다. 무엇보다, 그의 깊은 사색과 치열한 독서가 이러한 통찰의 토대임을 깨닫게 된다. 책의 제목은 고요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읽고 생각했기에 이처럼 해박하고도 깊이 있는 글을 쓸 수 있었다고 감히 생각한다. 『고요한 읽기』를 통해 촉발된 그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자연스럽게 그의 소설로 이어진다. 이제는 그의 소설을 읽고 싶다. 이승우가 문학을 통해 펼치는 깊은 사유와 성찰을 더 깊이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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