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에 커다란 애완견 센터가 세개나 있다. 태어난 지 얼마 안되는 개들이 어찌나 귀여운지, 거길 지나갈 때마다 넋을 잃고 개들을 보게 된다. 다리가 짧은 것들이 아장아장 걸어가거나 자기들끼리 장난치는 모습, 서로를 베고 자는 장면, 모두가 다 사진으로 남기고픈 광경이다. 그들 스스로는 자신이 귀엽다는 걸 아는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오늘 아침에 보니까 관리하는 사람이 개 숙소를 청소해주고 있다. 심심하던 차였는지 새끼 개들은 그 팔에 달려들지만, 무정한 손은 자기 할일만 하고는 이내 물러가버린다. 갑자기 그 개들이 안되었단 생각이 든다. 입양되기를 바라는 아이들처럼, 그 개들 역시 누군가의 손에 간택되기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겠지. 원래는 야생의 종족이었던 개들이 이토록 인간의 애정을 갈구하게 된 것도 인간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으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보통 개와 다르게 애완견이란 일종의 유전적 변형이다. 미니어쳐 핀의 약자인 미니핀이란 종족도 사실은 사납기 그지없는 개를 작고 온순하게 만든 산물이고, 장난꾸러기 슈나우저 역시 태초에 존재하던 개는 아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개들은 인간의 도움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존재들, 스스로는 먹이를 찾는 능력도, 추위를 이기는 재주도 갖고 있지 못하다.
독립성의 상실, 그들이 불쌍한 진짜 이유는 거기에 있다. 혼자 힘으로 자립할 수 없기 때문에 개는 인간에게 의존적이 된다. 볼 때마다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고, 갖은 애교를 다 부린다. 개만큼 충성심이 강한 동물은 없다고들 한다. 확실히 개는 인간이라면 도저히 주지 못할 사랑을 주인에게 선사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다 버림받지 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은 아닐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개들을 버린다 (다른 집에 주는 것도 포함해서). 엊그제 만난 친구 하나도 애가 태어났다는 이유로 1년 반동안 키우던 개를 다른 집에 줬다. 그 개는 또다시 버려질까 두려워 더더욱 애교를 부리지 않을까.
서로간의 관계가 점점 단절되어가는 현대 사회에서 애완견이 인기를 얻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개의 사랑이 필요에 따른 것이듯, 사람이 개에게 베푸는 것도 변함없는 애정은 결코 아니다. 때문에 개를 기르는 것은 일시적으로 만족감을 던져 줄지언정, 더 깊은 외로움 속으로 인간을 몰아넣는다. 소외를 극복하는 방법을 사람 속에서 찾아야 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내가 개를 기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