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 히틀러
김종천 지음 / 사유와공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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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일에 살면서 이 사회가 참으로 민주적이고, 사람들이 이성적이라는 것을 자주 느꼈다. 그럴 때마다 이곳이 정말 히틀러와 나치 정권이 출현했던 나라가 맞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 때의 의아함이 히틀러와 나치 정권에 관한 내 관심의 출발점이었다. - ‘서문’ 중에서


(사진, 책표지)


책의 저자 김종천은 문명평론가로 독일 괴팅겐대학에서 경제학학사와 석사 과정을, 뒤스부르크-에센대학교에서 경제학박사 과정을 수료했으며 <민주주의 흥망의 역사를 걷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탐방> 등 다수의 책을 출간했다.


그는 독일에서 살 적에 당시 대중매체나 역사적 사료 및 서적 등을 통해 나치 정권 출현의 사회적 배경과 나치 통치 시대의 실상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는데, 자신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솔직히 인정하고 반성하는 독일인의 태도에 감명받았다고 밝힌다. 귀국 후 주변 사람들을 만날 때 자주 받았던 질문이 히틀러와 나치 정권에 관한 것이어서 이에 소설이란 장르로 이를 전하고 있다.


뮌헨 거사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지휘하는 검은 셔츠단이 로마로 진군하여 파시스트당이 정권을 잡았다.


이는 1922년 10월 29일자 <뮌헨인 신문>의 1면 헤드라인이다. 민족사회민주당 중앙당 당사에서 콧수염을 한 한 사내의 손에 들린 신문이었다. 이 사내는 당원으로부터 ‘지도자’로 추앙받으며 현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을 전복시키려는 꿈을 꾸는 히틀러였다.


패전국 독일이 승전국 프랑스에 전쟁배상금을 지급하지 않음에 따라 프랑스군은 독일의 북서부에 위치한 공업 중심지인 루르지방을 침입하자 독일 정부는 점령군의 명령에 따르지 말라는 정도의 지침을 내렸다. 이같은 소극적 태도에 뿔이 난 독일인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프랑스군은 즉각 퇴각하라’는 시위를 펼쳤다.


이 시위가 전국으로 번져가던 3월 말 프랑스군이 에센에서 발포하는 일이 발생, 13명의 사망자와 30여 명의 부상자가 생김에 따라 독일인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이에 히틀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당원들을 동원해 집회를 열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바이에른 경찰청장의 집회 금지 선포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히틀러는 ‘원하면 발포하라’는 식으로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는 중도파와 대학생들의 지지는 물론이고 나치의 정치적 존재감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이여 깨어나라’는 히틀러의 연설 주제는 청중들을 흥분으로 몰고가며 큰 함성을 불러일으켰다. 시종일관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와 프랑스에 대한 증오로 청중들을 이끌었다. 청중들은 마법에 걸린 듯 열광했다. 덩달아 민족사회주의당과 히틀러의 명성은 하늘로 치솟았다.


1923년 9월 공화국 정부는 프랑스에 굴복해 전쟁배상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군이 루르 지방을 점령한지 8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다시 거리로 뛰쳐나았다. 출범 4년 만에 바이마르 공화국은 최대 위기를 맞은 셈이다.


뮌헨 시가지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시위를 지켜보던 히틀러의 눈이 반짝였다. 그날 밤 피냄새를 맡은 상어처럼 히틀러는 공화국 사냥에 나섰다. “무능하고 나약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사라져야 합니다”란 그의 말에 청중들은 적극 환호했다. 이후 연속되는 대중 집회를 통해 히틀러는 군중의 선동과 함께 국가권력을 손에 넣을 구상을 했다. 하지만 쿠데타에 함께 나서기로 했던 카르와 로소브 장군의 배신으로 군에 체포되어 특별법정에 서게 되었다.


1924년 2월 뮌헨 블루텐부르크 거리 옛 사관학교 건물에 서 행해진 재판에서 히틀러는 최후진술을 했다. 그는 조국과 민족, 역사의 이름으로 쿠데타를 미화하고 정당화했다. 방청석의 뜨거운 박수갈채는 법관에게도 전해진 듯, 그는 내란죄 최저 형량인 5년의 금고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순교자이자 영웅이 되었다.


히틀러의 가족과 성장사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는 빈 북서쪽에 있는 체코에 가까운 농촌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미혼모였던 그의 어머니가 훗날 가구장이와 결혼하는 바람에 히틀러라는 성이 붙게 되었다. 알로이스는 13살에 고향을 떠나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에 도착, 17살에 직공 시험에 합격한 후 독학으로 공무원 시험을 통과해 세무 관리가 되어 훗날 세무서장으로 승진했다. 학력이라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지만 대단한 신분 상승을 일군 셈이다.


히틀러의 어머니 클라라는 알로이스의 세 번째 부인이었다. 하녀로 둘째 부인의 병 간호를 하다가 알로이스의 아이를 임신했고 둘째 부인이 병사病死하면서 혼인신고를 통해 정식 부인이 되었다. 그런데, 클라라는 알로이스 의붓아버지 동생의 손녀였기에 남편임에도 ‘알로이스 아저씨’라고 불렀다고 한다.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클라라의 네 번째 아이로 태어났지만, 앞서 태어난 세 명의 자식이 모두 어릴 적에 죽는 바람에 클라라의 첫 아이가 되었던 것이다. 이때 아버지는 52살, 어머니는 28살이었으며, 이후 여동생 파울라가 탄생했다. 세무 관리였던 아버지의 잦은 전근으로 히틀러는 여러 곳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지만 아버지 직업 탓에 부유하게 살았다.


엄했던 아버지는 히틀러에게 열심히 공부하길 원했고 초등학교 졸업 후 실업학교에 진학시켰다. 그러나 히틀러는 공부보다 미술에 더 관심이 많아서 두 번이나 낙제를 했고 폐결핵에 걸려 자퇴까지 했다.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죽고 이후 어머니는 47세의 나이에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장례를 치른 이복 남매 넷은 함께 모여 엄마의 재산을 정리해 유산을 똑같이 나누었다.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어 히틀러는 미술 아카데미 입학을 시도했지만 입학에 번번히 실패했다. 아카데미 원장은 히틀러와의 면담을 통해 다른 길을 선택하라고 권유했다. 히틀러가 미술을 좋아했지만 그림 그리는 실력은 매우 부족했던 모양이다.


이후 히틀러는 계속 빈에서 빈둥거리며 지냈다. 점심 무렵 잠자리에서 일어나 공원을 산책하고 저녁엔 오페라 극장이나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유산 중 상당 부분이 바그너 오페라 관람비용으로 지출되었다.


당시 빈에는 유대인의 수가 급증하면서 그들의 영향력이 점점 커갔다. 특히, 언론과 금융산업의 장악에 열심이었다. 독일계 주민의 시각으론 마치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격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위기와 질투감에서 출발한 반유대주의는 이념의 모습이 되었고, 이에 휘말린 히틀러의 내면에도 그 싹이 트고 있었다.


그림엽서를 그려 팔아 겨우 생계를 꾸려가던 그에게 병무청에서 징집통지서가 날아들자, 비록 오스트리아가 자신이 태어나 성장한 곳일이지라도 그의 마음 속 조국은 독일이었기에 반유대주의자로 거듭 난 그는 오스트리아를 위해 싸울 순 없었다. 1913년 5월, 24살의 나이로 독일 뮌헨에 도착했던 것이다.


집권과 독재


다시 란츠베르크 감옥 때로 돌아가보자. 당시 교도소장과 교도관들은 히틀러와 그의 부하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사실상 히틀러는 호사스런 감방 생활을 했다. 지지자들은 그에게 거의 매일 편지와 함께 치즈, 과일 등 다양한 식품들을 보내왔던 것이다.


(사진, 란츠베르크 감옥)


이에 한껏 고무된 히틀러는 자신의 사상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책을 출간할 계획을 구상했다. 1924년 7월, <나의 투쟁>은 이렇게 집필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구술하고 그의 심복 헤스는 타자기를 두드렸다. 오스트리아 병역기피를 이렇게 미화했다.


“나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위해서는 싸우고 싶지 않았으나 내 민족과 독일 제국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사실 히틀러는 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독일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 계속될 때 그는 뮌헨의 공산군에 가입했었다. 그의 삶에 군대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생업에 투신하거나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일은 그의 체질상 맞지 않았기에. 독일 공화국 정부가 대대적인 공산군 소탕에 돌입했을 때 진압군 측 조사위원회에서 일하며 공산군의 신상 정보를 제공했던 천부적인 기회주의자였다.


군복무 시절, 유대인 얘기만 나오면 게거품을 물면서 핏대를 올리던 히틀러에게 붙여진 별명이 ‘몽상가’였다. 훗날 자신의 시대가 도래할 거라고 떠들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는 2급 철십자 훈장과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음으로써 자신감만은 넘쳐 흘렀다.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사색을 통해 비정규군을 동원한 폭력적 방법으로 국가기관을 장악하는 게 쉽지 않음을 깨닫고,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기로 결심했다. 모범수로서의 수감생활로 인해 1924년 12월 크리스마스를 곧 앞둔 어느 날, 그는 가석방되었다.


출소 후 지자들과 함께 공식적인 정치 활동을 재개한 그는 민족사회주의당과 함께 ‘새로운 독일의 건설’이란 기치를 내걸고 투쟁을 시작했다. 1925년 7월, <나의 투쟁> 제1권이 뮌헨에서 출간되어 큰 인기를 끌며 점점 히틀러는 주목받게 된다. 이후 괴벨스가 히틀러 진영에 합류, 선동·선전 정치가 그 막을 올렸다. 사회주의를 불신하던 기업가들에겐 마르크스주의와 끝까지 투쟁하겠다면 안심시키고 1928년 제국의회 총선거에서 12개의 의석을 차지했다.


1929년 10월, 미국 주식사장의 붕괴와 함께 세계는 대공황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독일 경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문을 닫는 기업들이 점점 증가하고 실업자들이 대거 발생했다. 1932년 독일은 결국 전쟁배상금 지급을 중지했다. 마침내 히틀러의 선동 정치에 빛이 찾아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괴벨스의 ‘선전 전략’이 동원되고, 결국 히틀러의 민족사회주의당은 제2 정당으로 올라섰다.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힌덴부르크와 히틀러 양자 간 대결을 펼쳐 비록 패했지만 그의 이름을 유권자들에게 각인시켰다. 이후 같은 해 7월 31일에 행해진 총선에서 마침내 민족사회주의당은 37.4%의 득표율로 최대 정당으로 우뚝 섰다. 1930년 1월 30일, 히틀러는 독일 수상으로 취임했다. 당시 베를린 주재 영국 대사가 본국에 타전한 전문은 이러했다.


‘오늘 깡패들이 독일에서 정권을 잡았다.’


국가권력 전체를 장악하기 위한 나치의 행보는 착착 진행되었다. 우선 나치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정부 기관에서 몰아내고 그 자리를 히틀러 추종자로 채웠다. 경찰지휘부는 나치 돌격대 지휘자들로 대체, 베를린 경찰청장엔 게슈타포로 불리는 비밀경찰 부서가 신설되었다. 언론 및 집회와 결사의 지유가 제한되면서 좌파 정당들은 선거 유세는 물론이고 당 기관지와 집회가 전면 금지되었다. 이 모습은 현재 대한민국 야당에서 의회를 독재하면서 말을 듣지 않는 주요 인사들을 탄핵시키고 언론과 주요 기관장을 자기편들로 채우는 행위와 흡사 닮아 있다.


1935년 12월엔 ‘히틀러 청소년단 법’이 제정되어 10세에서 18세 사이의 모든 남녀 청소년은 의무적으로 청소년단에 가입해야 했다. 나치 정권은 청소년에게 나치 이념을 주입시켜 유사시엔 이들을 총알받이로 사용하고 미래엔 나치의 핵심지지세력으로 키울 계획이었다.


학생들은 교사들로부터 끊임없이 전쟁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 결과 나치가 주장했던 ‘베르사유 치욕을 씻기 위한 전쟁’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학교 교육은 군국주의 세뇌의 장이었다. 또 교사들의 나치 당원 가입이 봇물이 되어 1934년에는 전체 교사의 30%가 나치 당원이 되었다.


(사진, 목차)


평화와 인류에 대한 범죄


5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구덩이에 넣고 총살을 자행한 나치 독재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1945년 11월 20일부터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나치 정권의 지도급 인사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다. 침공을 기획, 준비, 지휘 및 수행한 독일의 정치가, 군인, 민족사회주의당 지도부 인사들은 ‘평화에 대한 범죄’로, 민간인과 전쟁포로에 대한 범죄 및 수용소에서의 대량 학살에 관련된 인사들에겐 ‘인류에 대한 범죄’로 처벌을 내렸다. 히틀러는 영웅을 연기한 광대였을 뿐이다. 독이 있는 나무엔 독이 있는 과일이 달리는 셈이다.


#소설 #역사소설 #독재자 #히틀러 #김종진 #사유와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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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냥팔이 소녀는 누가 죽였을까? - 세상에서 가장 기묘한 22가지 재판 이야기
도진기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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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행동은 무슨 죄가 된다는 식으로 결론만을 알려 주는 법률 정보는 많습니다. 하지만 완성된 레고를 선물 받는 거나 마찬가지로 이런 지식은 거의 값어치가 없습니다. 법의 세계에서는 벽돌 하나만 빠져도 집의 모양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법이 움직이는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논리를 구사할 수 있고 신문 기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 ‘들어가며’ 중에서



책의 저자 도진기는 1994년 사법시험 합격을 통해 법관이 되었고, 2010년 한국추리작가협회의 미스터리 신인상을 수상해 작가로 데뷔, 2014년엔 한국 추리문학 대상을 수상했다. 주중엔 판사로, 주말엔 소설가로 지내며 꾸준히 장편소설을 펴낸 인물이다. 2017년 공직을 떠나 변호사로서 강연, 기고, 방송 활동 등을 통해 법과 대중 사이에 놓인 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 책 <성냥팔이 소녀는 누가 죽였을까?>는 재판의 기본이 될 만한 법 상식을 우화로 재미있게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청소년도 읽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법학 이야기’로 소개되며,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법률가가 추리소설가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쓴 기묘한 22가지 재판 이야기를 통해 가장 쉽고 재미있는 법 상식을 배울 수 있다.


성냥팔이 소녀는 누가 죽였을까?(법과 도덕)


추운 겨울날 밤, 굶주린 성냥팔이 소녀가 맨발로 거리에서 성냥을 팔고 있었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갈 길이 바쁠 뿐, 아무도 소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에 지친 소녀는 성냥을 하나둘 켜기 시작했다. 성냥 개비 불꽃 속에서 환상을 보았다. 환상 속에서 할머니는 소녀를 안고 하늘로 데려갔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다 탄 성냥개비와 함께 미소를 띤 채 죽어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이 사건을 검사가 소개하자 염라 판사는 훌쩍였다. 피고는 행인行人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변호사였다.


검사는 소녀를 구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던 행인의 나쁜 행동을 고발하고 있다. 이에 소크라테스 변호사는 변론을 좀 더 쉽게 하기 위해 ‘착한 사마리아인 사건’을 함께 진행할 수 있도록 동의를 구하자 염라 판사는 이에 동의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 변호사가 사마리아인 사건을 설명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던 길에서 강도를 만나 큰 상처를 입고 길에 버려졌다. 길을 가던 제사장이 발견했음에도 도와주지 않고 그냥 지나쳤고 두 명의 레위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로부터 가장 천대받던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상처 입은 사람을 구해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어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사건의 피고인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었다.


착한 사라미아인 법에 의하면 남을 구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이 법에 반대하는 입장도 있는데 구하지 않은 행동은 나쁘지만 처벌까지 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한다. 이 법은 모든 나라에 있는게 아니다. 한국에도 이 법은 없다. 이는 바로 도덕과 법의 구별이라는 어려운 문제인 셈이다.


(소크라테스) 법은 무엇보다 강한 규칙입니다. 이런 법을 함부로 사용하면 곤란하겠죠? 불편한 일이 있다고 해서 무작정 법을 만들어대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법은 중요한 일에만 관여하고, 일상생활에서의 도덕은 사람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염라) 맞아. 법이 너무 많아도 살기 힘들 거야.


(소크라테스) 법은 도덕에 일일이 간섭하지 않습니다. 도덕 중에서 중요한 일에만 관여합니다. 예를 들어서 때리거나, 훔치거나, 사기를 치거나 하는 못된 행동은 법이 나서서 못하게 막는 것이죠. 많은 도덕 중에서 ‘최소한 이것만은 어기면 안 된다’는 것들입니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란 말은 이런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염라) 흠. 그런 기준이면 이제 해결되겠군….

(소크라테스) 그게 또 그렇지도 못합니다.

(염라) 왜!


(소크라테스)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어던 경우에 법이 기어들고, 어떤 경우에 법이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지 사람마다 의견이 갈리는 거죠. 사람들의 생각이 다르고, 정답이 없는 문제입니다. 결국 그 나라의 문화와 국민 다수의 생각대로 정해지게 되겠죠. 그래서 나라마다 다르게 되어 있는 겁니다.


결국 염라 판사는 한국 법에 따라 판결했다. 성냥팔이 소녀를 그냥 지나쳤던 행인, 사마리아인 사건의 제사장과 두 명의 레위 사람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소크라테스 변호사는 명판결에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반면 사마리아인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왜 처벌하지 않나며 바보 같은 재판이라고 언성을 높인다.


피리 부는 사나이는 유괴범인가?(인과관계)


13세기 독일의 작은 마을 하멜른에 갑자기 쥐가 들끓기 시작했다. 도무지 퇴치할 방안이 없어 곤란을 격고 있을 때 한 사나이가 피리를 들고 나타나 돈을 주면 쥐를 박멸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사람들은 쥐를 잡아 주면 많은 상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사나이가 부는 피리 소리에 쥐 떼들이 뒤를 따르자 그는 쥐 떼를 강물오 유인해 빠뜨려 죽게 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변심해서 돈을 주지 않았다. 마을을 떠났던 사나이가 얼마 후 다시 마을에 나타나 피리를 불자 마을의 아이들이 그 뒤를 따라가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피리부는 사나이의 처벌을 원한다.


이 사건을 맡은 염라 판사가 피리부는 사나이에게 처벌을 내리는 판결을 하려 하자 소크라테스 변호사가 인과관계를 지적하며 결과와 관계없는 행동을 처벌할 수 없다고 피리부는 사나이를 변호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백설 공주 이야기 사례로 설명을 이어 나간다. 백설 공주가 쓰러진 것은(결과) 왕비가 몰래 독이 든 사과를 먹인 데(원인) 있으므로 인과관계가 성립하지만 법에선 상당인과관계가 있어야 히는데, 왕비를 낳은 왕비의 어머니(노파)를 처벌할 수 있을까?란 문제를 제기한다.


(소크라테스) 독을 먹인다는 원인과 쓰러진다는 결과 사이에는 상당인과관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딸을 낳으면 ‘보통은’ 그 딸이 나중에 커서 다른 사람에게 독 사과를 먹이게 된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왕비의 엄마가 왕비를 낳은 일과 백설 공주가 독 사과를 먹고 쓰러진 일에는 ‘상당인과관계’가 없습니다. 따라서 법으로 처벌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나이의 피리엔 아이들을 꾀어내는 신기한 능력이 있을지 모르나 이를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상당인과관계를 증명하는 일 또한 불가능하므로 피리부는 사나이는 처벌할 수 없다고 소크라테스는 변론을 마친다.


이밖에 책은 긴급피난의 경우 타이타닉호의 침몰 때 디카프리오가 케이트를 밀치고 혼자 살았을 지라도 처벌할 수 없으며(‘카르네아데스의 판자’), “열 명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죄인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무죄추정의 원칙 등이 잇달아 소개되면서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모르면 평생 답답할 법의 핵심 원리


대학시절 고시를 준비할 때 유독 민법, 상법 등 법관련 서적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뺨엔 침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재미가 별로라 철학 책만큼이나 나에겐 수면제와 같았다. 하지만 책의 저자는 법률가이면서 작가인 까닭에 22가지 재판 이야기를 통해 딱딱한 법의 핵심 원리를 부드러운 카스테라 맛으로 바꾸어 놓았다. 법의 실체가 궁금한 모든 분들에게 책의 일독을 권한다.


#법 #재판이야기 #성냥팔이소녀는누가죽였을까? #도진기 #추수밭 #청림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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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이라면 군주론
김경준 지음 / 믹스커피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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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탁견은 인간 심성과 군중심리의 본질을 이해하는 통찰력에서 출발한다. 그의 관점은 백면서생의 책상머리 공부가 아니라 변화무쌍한 국제정세 속에서 조국의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분투하는 현장 외교관의 치열한 경험에서 배테되었기 때문에 냉정한 현실 인식에 기인하고 있다. - ‘들어가며’ 중에서



이 책의 저자 김경준은 딜로이트 컨설팅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그는 인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어 이론과 경험을 겸비한 융합형 전문가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일보, 한국경제신문, 이코노미스트 등에 칼럼을 연재했으며, 방송 미디어에 고정 패널로 출연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오십에 읽는 오륜서>, <로마인에게 배우는 경영의 지혜> 등 다수가 있다.


총 6부로 구성된 책은 마키아벨리가 전하는 삶의 본질, 내 삶의 리더가 되는 비법, 사람이 보이기 시작할 때 필요한 것들, 위기에 대처하는 역사의 패턴, 흔들려도 나아가는 힘, 군주론에서 배울 것 등에 대해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으로 ‘정치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한 최초의 근대적 인간’으로 평가받았고, ‘근대 정치학의 아버지이자 최초의 사회학자’로 인정받았다. 통상적 오해와 달리 도덕에 있어 마키아벨리가 추구하는 바는 ‘배덕주의’가 아니라 ‘초도덕주의‘였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근대독일철학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마키아벨리는 이미 ‘존재’와 ‘당위’의 기본 개념을 언급하고 있다. 피렌체의 외교관으로 외교 최일선에서 활약했던 그는 경험을 통해 ‘현실에서 존재하는 것’과 ‘당연히 되어야만 하는 것’의 간격間隔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엄연한 현실’을 무시하고 ‘윤리적 공상’에만 매몰된 리더와 조직의 몰락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하면서, 현실을 도외시하고 당위성에만 매몰된 군주의 위험성을 절감했다. 마키아벨리는 ‘희망적인 미래’는 ‘냉혹한 현실’의 기반 위에서 만들어 가는 거라고 봤다.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건 이기심利己心에 대한 공리공론空理空論이 아니라, 이기심의 실체를 분명히 인식하고 합리적으로 갈무리해 개인과 조직의 현재에 대처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에너지로 이끄는 것이다. 신선의 경지에나 있는 이들은 상상 속의 인물일 뿐이기에 세속世俗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고려할 대상도 아니다.


(사진, 군주론 15장)


숭고한 목적과 효과적 수단이 결합할 때


배신하고 신의 없이 무자비하게 종교심을 저버린 일을 덕德이라고 부를 순 없다. 그런 수단으로는 지배권을 잡을 순 있어도 영광을 차지할 순 없다. - ‘군주론 8장’에서


숭고한 목적과 효과적 수단이 결합할 때 리더는 진정한 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마키아벨리는 이해했다. 이는 근대 정치학에서 권력은 정딩성과 효율성이라는 두 축軸으로 유지된다는 관점과 동일하다. 목적과 수단은 별개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다.


마키아벨리는 시칠리아 시라쿠사 왕국에서 미천한 평민으로 태어나 왕위에 오른 아가토클레스(기원전 361~기원전 289년)를 불명예의 대상으로 지목했는데, 그는 권력을 쟁취하고자 효과적인 수단을 사용했으나 목적이 천박했다. 젊은 시절 방탕하게 생활하던 아가토클레스는 군대에 들어가 시라쿠사 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시라쿠사의 권력을 장악하기로 결심하고 시칠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카르타고 군사령관 하밀카르 바르카와 은밀히 내통한다.


(사진, 시라쿠사 지도)


그는 중대 사항이 발생한 것처럼 위장해 유력자들을 소집한 뒤 병사들을 동원해 모조리 살해했다. 이후 시라쿠사의 왕이 되었고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도 이겨 권력 기반을 견고히 다졌다. 그러나 그는 권력욕에 눈이 멀어 군주가 된 사람이었을 뿐 ‘진정한 덕성德性을 갖춘 통치자’라는 평가를 당대에도 그리고 후대에도 얻지 못했다.


현명한 엄격함이 진정한 자비慈悲다


군주들은 잔인하기보다 인자하다는 평판을 받길 원한다. 그러나 이런 온정溫情도 역시 서투르게 사용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체사레 보르자(1475~1507년)는 잔인한 인간으로 알려져 왔지만, 그의 잔인함은 로마냐의 질서를 회복하고 그 지방을 통일해 평화와 충성을 지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군주는 시민을 단결시키고 충성을 지키게 하려면 잔인하다는 악평惡評쯤은 개의치 말아야 한다. - ‘군주론 17장’ 중에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해양동물원의 조련사가 범고래를 훈련할 때 칭찬이라는 당근을 활용하는데서 비롯된다. 하지만 모든 일에서 칭찬이 능사能事가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특히, 일반인과 리더는 이 점에서 분명히 구분된다.


리더의 엄격함은 개인적 성향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리더의 역할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국가지도자는 영토를 지켜야 하고, 군대 지휘관은 규율을 유지해 적군에게 승리해야 하며, 경영자는 경쟁력을 확보해 기업을 생존시켜야 하는 임무가 있다.


엄격 함이 개인 차원의 감정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공인의식에 기반하고 있다면 리더에겐 오히려 바람직하다. 이런 점에서 마키아벨리는 평면적 자애심이 아닌 ‘현명한 엄격함’이 조직 전체를 살리는 진정한 자비가 될 수 있는 리더의 역설을 꿰뚫고 있다.


위기를 극복한 인간이 더욱 강해진다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조직과 리더의 내공이 드러난다. 위기를 맞은 조직과 조직의 리더는 자신의 힘으로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이렇게 어려움을 극복하면 위기조차 오히려 조직과 리더의 자산이 된다. 그러나 타인의 도움으로 극복한 위기는 자산이 될 수 없다.


위기대응 체제의 출발점은 핵심 인력으로 컨트롤 타워를 구축하는 것이다. 최고경영자를 포함한 주요 경영진들이 컨트롤 타워를 중심으로 상황을 장악하고 위기 극복을 위한 의사결정을 진행하며 실무진의 실행과 점검을 제어한다.


평상시의 자율경영 등의 구호는 폭풍우가 지나갈 때까지 한편에 치워두는 게 좋다. 비상시에는 그에 맞는 의식과 조직으로 무장해 대처해야 한다.


평상시 바다를 항해하던 배에선 각자 맡은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폭풍우를 만나면 선장을 포함한 핵심 선원들이 조타실에 모두 모여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해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위기를 맞은 조직은 무엇보다도 통제와 효율을 높여 생존력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군주는 절대적 위기에 처했을 때 절대적 권력을 휘두를 여유가 없다. 고난에 처했을 때 군주가 신뢰할 수 있는 건 극소수에 불과하가. - ‘군주론 9장’ 중에서


야심을 가져라


남에게 좋게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겐 권력이 필수불가결하지 않지만 뭔가를 이룩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겐 그것을 해내는 데 필요한 힘이나 권력이 필수불가결하다. 그런데, 허영심은 있지만 야심이 없는 사람은 욕심 없는 인물로 여겨진다. 또한 욕심이 없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은 인물로 간주된다. 추대되는 건 항상 이런 부류의 위험하지 않은 인물이다. - ‘로마인 이야기 4권’ 중에서


타인에게 좋게 보이고 찬사를 받으려는 욕망이 허영이다. 개인적 성격 차원에서 허영은 최소한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부류가 리더가 되면 무난하지만 성취는 없다. 모든 사람에게 욕 먹지 않으려면 언제나 어중간한 타협과 현상 유지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성취는 문제의 본질을 통찰하고 해결하는 새로운 생각과 과감한 실행의 결과물이다. 새로운 생각은 기존 질서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불편하고 거부감을 불러온다. 이런 부분을 감수하지 않으면 성취는 없다.


뭔가를 이루려는 야심에는 힘이 필요하다. 야심은 있으나 힘이 없으면 추진력이 없다. 힘은 있으나 야심이 없으면 깡패로 전락한다. 야심도 없고 힘도 없으면 화려한 언변의 훈수꾼에 불과하다.


야심을 갖고 힘을 확보하려면 권력 의지가 필요하다. 권력을 획득해야 공적 책무를 실행할 수 있다. 먼저 의지가 있어야 힘을 확보하고 뭔가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탁월한 리더는 높은 이상과 목표를 이루려는 야심을 품고 권력 의지로 힘을 확보해 스스로를 불태워 구체적 성취를 만든다.


역사는 미래학이다


19세기 말 미국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사회가 발전하면서 대기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근데 기업의 역사는 100년 남짓이지만 사실 경영의 역사는 길다. 이집트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기원전 2,500년 경에 건설되었다. 현대의 건설 장비로도 쉽지 않을 대형 건설 프로젝트임에도 석기와 인력만으로 수행한 것은 많은 관리 계급과 시스템, 그리고 유능한 경영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국가든 기업이든 사회단체든 결국 자원을 사용해 목표를 달성하는 점에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하다. 경영이란 인력과 물자를 투입해 목표를 이루는 것이고, 리더는 일련의 과정을 책임지고 이끄는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 리더는 모두 경영자다.


“현명한 사람은 역사에서 배우고, 보통 사람은 경험에서 배운다. 그러나 우둔한 사람은 경험에서조차 배우지 못한다.”


이는 격언이다. 경험으로 배우는 게 가장 효과적이지만 개인이 겪을 수 있는 경험의 폭은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타인의 경험을 배우는 간접 경험이 필요하다. 다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경험인 역사가 현재에도 필요한 이유다.


역사는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호흡을 길게 해준다. 길어야 100년을 사는 인간의 체험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역사를 접하다 보면 수천 년을 관통하는 세상살이의 본질적 측면, 시공간을 초월하는 조직의 모습, 표면적 양상과 본질적 핵심을 구분하는 통찰력을 키울 수 있다. 역사는 현실의 당면 과제를 헤쳐 나가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사진, 군주론 14장)


마키아벨리는 현실론자다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선악을 초월하는 초超도덕을 주장했고, 부정적 비관도 아니고 막연한 낙관도 아닌 긍정적 현실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현실에 기반한 낙관주의로 평가할 수 있다. 그는 냉엄한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한 후 숭고한 이상을 추구하라는 현실론을 펼친 것이다.


#인문 #인문교양 #오십이라면군주론 #김경준 #믹스커피 #원앤원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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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하는 뇌 - 인간의 뇌는 어떻게 영성, 기쁨, 경이로움을 발명하는가
앨런 라이트먼 지음, 김성훈 옮김 / 다산초당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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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가 경험하는 영적 경험이 원자와 분자에서 비롯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경험 중 일부와 그런 경험이 가지고 있는 대단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본성을 원자와 분자라는 관점에서 온전히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나는 화학, 생물학, 물리학의 법칙을 믿는다. 사실 한 명의 과학자로서 나는 그런 법칙들을 존경한다. 하지만 그런 법칙들이 야생동물과 눈이 마주치는 1인칭 시점의 경험이나 그와 비슷한 초월적 순간까지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는 0과 1로 환원할 수 없는 인간만의 경험이 있다. - ‘서문’ 중에서



책의 저자 앨런 라이트먼은 물리학자이자 인문학자이며 작가다. 하버드대학교와 메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MIT에서 인문학 교수로 활동 중이다. 그는 이 책에서 “물질적인 뇌가 어떻게 자아, 영혼 같은 비물질적이고 초월적인 경험을 가능케 하는가”에 대해 응답한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데카르트,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의식과 경험에 관한 인류 최고 지성의 사유와, 과학의 최전선에서 최신 이론을 만들어내는 동시대 고학자들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과학적 세계관과 인간의 초월적 경험 사이에 이 둘이 양립할 수 잇는 새로운 자리를 개척한다.


책은 총 5개 장으로 구성되어 1장과 2장에선 먼저 세상에 대한 비유물론적 관점을 살펴보고, 이어서 유물론적 관점에 대해 살펴본다. 비유물론적 관점은 영적 세계 전체를 아우르며 비물질적인 정신, 유령 등이 포함된다. 역사 중에서 재미있는 부분들에 저자의 해석을 보태서 나중에 뇌, 의식, 영성에 대해 논의하는 데 필요한 배결지식을 제공한다.


3장에선 뇌를 물리적 대상으로 다루면서 의식이 어떻게 물질로 이루어진 뇌와 신경계에서 생겨날 수 있느냐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탐구하며, 4장에선 현대의 사회심리학자 신시아 프란츠의 연구를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5장에선 영적 유물론에 대한 주요 개념과 오늘날의 세계에서 그것이 가지는 중요성을 살펴본다.


육체의 지휘자, 영혼


책은 모제스 멘델스존(1729~1786년)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18세기 독일 계몽주의 철학자로 그 세대에서 가장 유명한 유대인으로 신앙심이 깊었지만 유대교도에서 비유대교도로 경계를 뛰어넘은 사람이다.


(사진, 모제스 멘델스존)


그는 가난한 ‘토라’ 필경사筆耕士의 아들로 태어나 수년 동안 비단 공장에서 일했을 정도로 가난한 삶을 살았음에도 자신의 사상을 기록으로 남긴 철학자나 신학자 중 비유물론적 존재인 영혼에 대해 그만큼 이성적으로 주장을 펼친 사람은 없다.


어릴 적부터 천문학, 수학, 철학을 공부했고, 시詩도 썼으며, 피아노도 배웠다. 16살에 라틴어를 배워 키케로의 책을 라틴어로 읽을 수 있었고, 프랑스어와 영어 등도 익혀 5개 언어를 구사했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어까지 배워 호메로스와 플라톤까지 원문으로 읽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그는 박식가博識家였다.


플라톤의 <파이돈>을 새롭게 해석한 멘델스존의 걸작 <파이돈(또는 영혼의 불멸에 관하여)>(1767년)는 근대 유럽 세계를 대상으로 영혼의 필연성과 본질에 대해 이성적인 주장과 함께 설명함으로써 초판이 4개월 만에 매진되었고 네델란드·프랑스·이탈리아·덴마크·러시아·히브리어語로 번역되었다.


사실상 영혼의 존재는 신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어떤 이성적인 논증을 동원해도 증명할 수 없다. 영혼이나 신을 믿는 사람들은 그러한 믿음을 신념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 앨런 라이트먼은 멘델스존의 추론을 존경함에 따라 영혼이 어떻게 존재하고, 왜 존재하는지를 이해하고 싶었다고 자신의 심정을 밝힌다.


영혼은 항상 비물질적이며,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보통 눈에 보이지 않고, 일반적으로 영원하며, 대체로 완벽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육체는 결함이 있고, 일시적이며, 부패할 수 있다.(36쪽)


많은 사람들이 영혼, 그리고 영혼이 사는 영적 세계를 믿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중엔 개인의 죽음을 넘어 존재를 계속 이어가고픈 욕망도 있고, 이에 대한 완벽성과 순수성에 대한 갈망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끔씩 다람쥐 챗바퀴 같은 고된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멘델스존은 척추 장애인으로 태어났으며 유대인이란 이유로 야유를 받고 괴롭힘을 당했다. 그런 그에게 영혼의 세계는 일종의 도피처를 제공해 준 듯하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진리와 완벽의 품속으로 사라질 수 있었다.


사후 세계를 믿는 사람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선 죽음이 동네 이웃처럼 익숙한 것이었다. 고대 로마인과 그리스인들은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들의 영혼이 저승 하데스에서 영원히 고문당한다고 믿었기에 죽고 난 다음에 일어날 일에 더 큰 두려움을 가졌다. 지하 세계에서 가장 어둡고 끔찍한 곳은 ‘타르타로스’란 곳이었다.


서기 2세기에 만들어진 터키 남부의 대리석 조각엔 테살리아(그리스 동부지방) 라피스의 왕이었던 익시온이 석탄구덩이로 장인을 밀어 넣어 살해한 죄로 영원한 형벌을 받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익시온은 인류 최초의 친족 살해자인 셈이다. 이 장면의 무대가 타르타로스다.


(사진, 형벌을 받는 익시온)


죽음에 대한 공포는 오늘날까지도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최근 퓨 리서치 센터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 중 절반 이상은 사람이 죽은 후 벌을 받는 장소로 여겨지는 지옥地獄을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자 유명한 저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저술한 루크레티우스(기원전 99년~기원전 55년)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가 원자 가설을 지지했던 가장 큰 동기는 사람들이 느끼는 죽음의 공포를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자연은 각각의 것들을 다시금 그 자신의 알갱이로 해체한다는 것, 그래서 사물들은 결코 무無로 돌아가지 않는다.” - 루크레티우스


루크레티우스는 사람을 구성하는 원자가 한때는 이전에 살았던 사람의 일부였다고 말했다. 그의 생각은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또다시 다른 사람의 일부가 될 것이란 개념을 주장한 것이다. 이는 우리와 나머지 인류 사이를, 과거와 미래 사이를 유의미하게 연결해 준다. 나아가 그는 우주적 생명관을 견지함으로써 우주의 다른 곳에 생명이 존재할 가능성을 처음으로 상정한 철학자인 셈이다.


유물론자와 비유물론자의 가장 큰 차이는 죽음을 향한 태도다. 소크라테스나 성聖아우구스티누스 같은 비유물론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죽음을 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착하게 살았다면) 불멸의 비물질적 영혼이 영원히 복福된 사후 세계를 누릴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독배毒盃를 마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예전이었다면 죽음을 슬퍼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죽은 자들을 위해서도 아직 무언가 남아있고, 옛 사람들이 말했듯이 선한 자에게는 훨씬 좋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에피크로스와 루크레티우스 같은 유물론자들은 죽고 나면 우리 모두 해체되어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즉 죽고 나면 우리는 어떤 형태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도 남지 않는다는 논리이다.


뇌의 활성과 뉴런


현대의 생물학과 신경과학 지식에 따라 우리는 뇌의 활성이 뉴런, 그리고 뉴런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일어난다고 믿는다. 사람의 뇌에는 1000억 개 정도의 뉴런이 있다. 사람의 뉴런 갯수는 아프리카 코끼리와 일부 고래를 제외하면 동물들 중에서 제일 많다. 그렇다고 고래와 코끼리가 인간보다 더 똑똑한가? 그렇다. 지능에서 가장 중요한 척도가 뉴런의 절대적인 갯수가 아니다.


의식이 조화롭게 작동하는 대량의 뉴런에서 생겨난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지만, 개개의 뉴런은 특화된 활성을 나타낼 수 있다. 복잡한 뇌 활성과 의식은 뉴런의 총 숫자뿐만 아니라 뉴런 간 연결 숫자와도 상관관계가 있다.


초월적 경험


저자는 영성을 자연, 우주, 타인과 연결된 느낌,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된 느낌, 아름다움에 대한 공감, 경외감의 경험 등으로 정의한다. 이는 모두 생존에 실질적인 이점을 주는 다른 특성에서 비롯된 부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창의적 초월 경험은 우리가 세상에 없던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거나 새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 순수한 바라봄의 상태에 빠져 있을 때 느껴지는 짜릿하고 벅찬 감각에 붙인 이름이다. 화가, 음악가, 무용수, 소설가, 과학자, 그리고 우리는 모두 창의적 초월을 경험한다.


초월적 경험은 수량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과학은 결코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할 수 없다. 신은 물리적 우주 바깥에 존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종교가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경험은 신비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과 진정한 과학의 요람을 나타내는 근본적인 감정이다.” -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이 말한 ‘신비’는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아는 것과 아직 모르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마법의 영역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곳은 우리를 도발하고 창의성을 자극하며, 우리에게 놀라움을 가득 안겨주는 장소다. 과학자와 예술가, 신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모두 두려움도 불안도 없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이상하고 아름다운 우주에 대한 경외심과 경이로움으로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벼랑 위에 설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만약 지금 이 순간 내 몸을 이루는 원자 하나하나에 꼬리표를 붙이고, 주민등록번호를 새겨 넣을 수 있다면 누군가는 그 원자의 과정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원자는 분명 다른 사람, 어떤 특정 인물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말 그대로 별과 연결되어 있고, 미래 세대의 사람들과도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물질적인 우주에서도 우리는 과거와 미래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과학 #초월하는뇌 #앨런라이트먼 #영혼 #의식 #다산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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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두면 쓸모 있는 독음이 같은 한자 - 경희서당
강경희 지음 / 정민미디어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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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는 우리 언어 생활과 많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또한 초, 중, 고, 대학교에서 암기해야 되는 중요 단아들은 거의 한자 용어들이 많습니다. 공부 잘하는 비법도 당연 한자를 많이 아는 것입니다. 한자 급수를 다서 승진, 입사 시험을 치기 위함으로 한자를 배우지 말고, 한자는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되어 잇으니까 이왕이면 즐겁게 배워서 삶이 윤택해지는 데 한자가 유용하게 쓰이길 원합니다. - ‘머리말’ 중에서


(사진, 책표지)


책의 구성과 활용법


한자의 독음讀音이 비슷하면서 한자 모양도 비슷한 글자들을 모았다. 대표 한자를 맨 앞에 배치한 후 독음이 같은 한자를 최우선작으로 배열했다. 한자 급수를 별도 첨부하여 한자의 난이도難易度를 구분했다.


그런데, 단체마다 한자 급수 선정이 달라 혼선을 빚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왜 이럴까? 서로 잘났다고 경쟁하는 모습은 어디에나 있다. 여기서도 볼 줄이야. 훨씬 앞서 나갈 수 있는 대한민국의 이런 점이 항상 걸림돌이다. 아무튼 총 5000자를 급수별로 정리했다.


한자 공부, 6가지 구성원리


상형象形~ 눈에 보이는 사물의 모양을 본떠서 만듬

지사指事~ 개념(사람의 추상적 생각)을 점, 선, 부호로 나타냄

회의會意~ 뜻과 듯을 결합, 새로운 뜻을 만듬

형성形聲~ 뜻과 음이 같은 한자를 만들어냄

전주轉注~ 전혀 다른 음과 뜻을 지니게 함

가차假借~ 뜻과 상관없이 독음만 빌림


부수部首 위치별 명칭


부수가 높이는 위치에 따라 크게 8가지로 구분해 명칭을 바르게 알아야 한자의 이해와 함께 한자 사전인 자전(옥편)을 활용할 수가 있다. 나의 국민학교 시절엔 4학년 이상 국어 교과서엔 한자 표기가 있었으며, 또 중학 시절은 옥편이 필수 교재였었다.


변邊~ 부수가 글자 왼쪽에 있음

방傍~ 부수가 글자 오른쪽에 있음

머리~ 부수가 글자 위에 있음

발~ 부수가 글자 밑에 있음

엄~ 부수가 글자 위와 왼쪽을 덮고 잇음

받침~ 부수가 글자 왼쪽과 밑을 싸고 있음

몸~ 부수가 글자를 에워싸고 있음

제부수~ 한 글자가 그대로 부수임(木,火,金,馬 등)


(사진, 부수 명칭)


※책은 부수 214자의 설명이 실려있음


독음이 같은 한자(대표 한자 색인표, 가나다 順)


책은 대표 한자 색인표를 통해 쉽게 해당 한자를 찾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이 책 한 권이면 거의 옥편玉篇 한 권을 소장하고 있는 셈이다. 독음讀音 가字의 경우 ‘더할’ 가加와 ‘옳을’ 가可를 대표 한자로 해서 음이 같은 한자들이, 끝으로 ‘기쁠’ 喜와 독음이 같은 한자들이 소개되고 있다.



(사진, 더할 가可 사례)


부록(12가지)


약자略字는 공문서나 정중한 표기엔 사용하지 않는다. 일부를 생략하여 간단하게 만든 글자인데,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는 표준 글자체로 제정하고 있다. 지금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약어는 결국 중국이나 일본에서 차용한 것이다.


약자 성립 규칙

특징적 부분만 취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생략

정자正字 구성부분을 간단한 형태로 바꿈

초서체로서 자형字形을 해서풍楷書風으로 고정시킴

정자에서 몇 개의 획을 생략해 자형을 변경

고자古字로서 정자처럼 취급



(사진, 예시)


같은 글자에 음이 다른 한자어를 동자다음어同字多音語라고 한다. 학창시절, 각종 시험에 자주 출제되는 경향이 높았던 기억이 난다. 예를 들어, 강우량降雨量의 ‘내릴 降’과 항복降伏의 ‘항복할 降’은 같은 한자임을 알 수 있다. 부록엔 66가지의 동자다음어가 실려 있다.


잘못 읽기 쉬운 한자어 94개도 소개되고 있는데, 이 또한 시험에 빈번하게 출제되는 분야이다. 졸업을 앞둔 상업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때 시골에서 상경해 서울 모처에서 초급행원 입행시험을 치룬 적이 있었다. 이때에도 이런 유형의 문제가 출제되었던 기억이 또렷하다. 예시, ‘奢侈’의 독음은?(답, ‘사치’)


필수 고사성어 100개가 수록되어 있어 공부에 무척 도움이 된다. 최근에도 ‘고사성어 이야기’란 도서를 읽었을 정도로 고사성어 속에서 촌철살인 같은 교훈을 얻곤 한다. 수록된 100개 고사성어 중 몇 개만 소개해 본다.


군계일학群鷄一鶴~ 닭 무리 속에 한 마리의 학(특출한 사람)

면종복배面從腹背~ 앞에선 복종, 속으론 배반(겉과 속이 다름)

살신성인殺身成仁~ 몸을 죽여 仁을 이룬다(옳음을 위해 희생)

양호유환養虎遺患~ 범을 길러서 근심을 남김(화근거리를 만듬)

좌정관천坐井觀天~ 우물 속에 앉아 하늘을 봄(견문이 좁음)



내 곁에 두고 싶은 한자 백과사전


국민학교를 다니던 어린 시절, 자식들 공부에 매우 엄했던 아버지 탓에 종아리에서 회초리가 떨어질 날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때 한자 공부를 하면서 많은 한자를 익힐 수 있었다. 아버지의 독특한 한자공부법엔 파자破字가 있었다.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무턱대고 암기할 게 아니라 한자의 자원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내 곁에 오래 두고 싶은 한자 백과사전이라 서재에 자리를 만들려고 한다.


#공부 #한자공부 #알아두면쓸모있는독음이같은한자 #강경희 #경희서당 #정민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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