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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은 부산물이다 - 문명의 시원을 둘러싼 해묵은 관점을 변화시킬 경이로운 발상
정예푸 지음, 오한나 옮김 / 378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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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예푸는 결혼제도, 농경, 문자, 종이, 조판, 인쇄라는 여섯 가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자랑하는 인류의 문명은 목적적인 행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그려낸다. 문명은 결코 위대한 업적도 아니고, 구성원의 행복을 위한 과정도 아니었다. 인류는 생존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구사했고, 그 와중애 그들이 선택했던 수많은 과정이 서로의 작용으로 후대에서 말하는 '문명'이라는 결과물로 나타났다. - '추천사' 중에서
문명은 생존을 위한 결과물이다
우리들은 학교에서 세계 4대 문명과 발생지, 즉 이집트문명(나일강), 메소포타미아문명(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인더스문명(인더스강)과 중국의 황허문명(황허강)를 배워왔고 이것이 기존 문명에 대한 통설이었다. 더구나 4대 문명이 세계 각지로 전파되어 계몽되었다고 가르쳐왔다. 하지만 이젠 이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수히 많은 고대 문명이 있었고 그 유적들이 속속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후기 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터키의 괴베클리 테페에서 고대 문명의 흔적이 출토되었고, 동아시아에서도 구석기시대에 이미 토기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벌써 상식적이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는 4대 문명 기원설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거대한 기념물과 위대한 왕이 인도한대로 흘러간 게 아니다. 오직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책은 문명 진화에 대한 새로운 메커니즘으로 인류 역사의 기원과 탄생을 재정의한다. 책의 저자 정예푸鄭也夫는 1950년 북경 출생으로, 베이징사범대학교와 사회과학원 대학원을 거쳐 철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이후 미국 덴버대학교 사회학과에서 공부했다. 베이징대학교의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수십여 권의 책을 출간한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강연가로 유명세를 떨친다. 현재 중국에서 영향력높은 사회학자이자 인문학자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아직도 사람들은 과거 역사의 찬란함에 경외심을 갖고 자기 나라에 이런 문명적 요소가 많을수록 자국과 자국민의 위대성이 증명된다고 어리석게도 믿는다. 이와같이 올바른 역사관이나 문명관을 갖지 않을 경우 커다란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현재 중국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시진핑 주석이 의욕적으로 펼치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 또한 그릇된 인식이 저변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국의 위대함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면 심지어 역사의 조작까지 서슴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중국 영토에 위치하고 있는 고구려 유적지를 자기들의 역사로 만들려는 동북아공정 프로젝트가 이를 대변한다. 이는 통치권자의 잘못된 역사관이 빚어낸 심각한 오류의 결과물인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민족에게 자존심은 필요할까요? 당연히 필요합니다. 하지만 날조된 역사관 위에 자존심을 세워서는 안 됩니다. 이는 믿을만하지 못합니다. 잘못된 역사적 평가는 맹목을 불러옵니다. 제대로 된 역사를 읽어야 현명해지고, 현명해져야만 미래를 제대로 개척할 수 있습니다"
왜 족외혼제를 추구했을까?
원시 인류와 침팬지나 고릴라 같은 유인원들의 조상은 일부다처제였다. 쉽게 말하자면 육체가 타고난 무기였던 힘쎈 수컷이 암컷을 차지하기 쉬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기는 왜 발명했을까? 이는 더욱 힘쎈 맹수들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무기는 양날의 검이었다. 인간 내부에도 영향을 미쳤다. 나중에는 주로 외부보다 내부에만 영향을 끼쳤다.
이런 변화의 즈음에 일부일처제가 자리잡는다. 본디 흉폭한 맹수에 대한 압박감으로 인해 발명되었던 무기가 인류 진화사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급변을 초래한 셈이다. 일단 일부일처제가 형성되자 이후에는 이를 다시 번복하기 어려웠다. 그 이치는 다른 남자가 차지한 아내를 되찾아오기가 어렵고 일부 지역의 권력자는 혼외로 둘째, 셋째 부인을 두는 것에 만족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족외혼을 얘기할 때 우리들은 근친교배가 자손을 체질적으로 퇴화시킨다는 인식을 앞세운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먼 옛날 인간이 어떻게 근친교배의 심각성을 먼저 알고서 족외혼을 도입했겠는가 말이다. 이는 설득력이 한참 뒤떨어진다. 족내혼과 족외혼의 후손들을 비교해서 그 결과를 수용할 때보다 훨씬 전에 족외혼이 이미 발생했기 때문이다.
인류가 근친통혼에 빠지지 않은 이유는, 다른 영장류 동물의 새끼들처럼 하루아침에 성숙해서 부모를 떠나는 메커니즘을 따라서도 아니고, 근친상간으로 인한 퇴화의 법칙을 인식해서도 아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구성원 상호 간의 성적 충동으로 인한 내부 질서의 파괴를 막기 위해 근친상간을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인류의 기질상 같이 자란 이성에 대한 '성적 관심'이 낯선 이성에 대한 그것보다 약하기 때문이다. 외부에 대한 '성적 취향'은 내부의 금기가 시행될 수 있게 했다. 퇴화 여부는 종의 존폐와 직결되지만, 근친상간에 대한 금기는 근친교배가 자손의 체질적 퇴화를 초래한다는 인식으로 인해 생긴 결과는 아니다. 이처럼 족외혼은 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동기와 행동으로 인한 부산물이다.
어떻게 농업은 시작될 수 있었을까?
대량의 야생자원을 두고 재배를 한다면 이는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그렇다면 이 '결정적 한 걸음'은 무엇 때문에 내딛게 된 것일까? 필자는 인구의 압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적으로 나타났던 인구 압박은 농업의 기원과 아무런 연관이 없고, 특이한 상황에서의 인구 압박만이 영향을 끼친다. 즉 '수확민' 집단에서만 일부 사람들이 인구 압박으로 인해 '결정적 한 걸음'을 내딛었다.
농업은 '수확민' 집단 내 이민자들이 시작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한번 상상해볼 수 있다. 풍요로운 야생곡물 지역을 따라 정착한 수확민 집단은 하늘이 내린 자원으로 인해 놀라울 정도로 지속적인 수익을 거뒀고 이로 인해 인구가 급증했으나, 끝내 식량 공급이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단체 내에서 타협을 하게 되는데, 일부 사람들이 상당한 곡물을 가지고 주변 지역으로 이주하여 재배, 채집, '수확'을 하는 복합적 경영을 시작한다. 농사를 일단 시작한 후에는 멈추기가 어려웠다. 인류가 농사를 시작하면서 그 농사가 오히려 인간을 길들였다고 봐야 한다.
생물진화와 문화진화
다윈의 진화론은 그 핵심이 '적응'과 '자연선택'이다. 적응은 생존과 번식을 뜻한다. 치타와 영양은 생존을 위해 여러 세대의 선별을 거치면서 빠른 다리라는 특징을 갖게 되었다. 같은 종은 생존을 위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다. 장시간의 세월이 흐르면 원래 같은 종이엇던 것이 아종으로 분열하고 심지어 다른 종이 된다. 그래서 지구상의 종이 다양해진 이유다.
문화란 무엇인가? 인류는 역사의 발전 속에서 점차 다른 동물이 갖고 있지 않는 의식과 이성을 발달시켰다. 이는 인류의 생존수단이 되었다. 의식과 이성의 산물인 문화 역시 생존수단이며 나아가 나중엔 인류의 생존방식이 되었던 것이다. 문화가 장족의 발전을 거둔 덕분에 인류는 다른 종을 통제하는 자연선택이라는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
생물진화와 문화진화는 오랜 진화 과정에서 나타난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닮았다. 생물진화의 긴 과정에서 더 많은 종과 같은 종 내의 다양한 형질이 발전했다. 36억 년의 생명사와 비교하면 문화사는 고작 100만 년밖에 안 됐지만 인류가 의식주와 오락을 생산하면서 나타난 다양성은 눈부실 정도다. 생물진화에서 '상위'의 개념은 의심을 받고 있지만, 문화진화가 상위로 나아간다는 데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문화진화의 메커니즘에는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이 적용된다. 문화에서 일종의 신기술과 신제도가 나타나면 실천, 연구, 반성을 통해 그 안의 잠재력을 발굴해내야 한다. 기술과 제도의 모든 장점은 만들어지면서부터 갖춰진 것이 아니며 끊임없이 개발한 결과이다. 문화의 후천적 획득형질은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문화진보의 메커니즘이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수용'했다는 것은 곧 그 메커니즘 내에 다른 성분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생물진화에도 존재하는 새로운 인자, 즉 변이에 대한 의존이다. 변이가 발생하지 않는 인자는 생물에서든 문화에서든 진화하지 않는다.

민족주의적 역사관에서 벗어나자
이밖에도 우리는 인류가 글자를 발명함으로써 위대한 발전을 가능케했다고 해석했다. 심지어 글자를 사용하지 않는 민족은 미개하다고까지 했다. 하지만 저자는 이에 반론을 제시한다. 흉노족의 사례를 예로 든다. 즉 흉노는 문자를 몰라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착민인 중국에 대항하고자 일부러 글자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국가 체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우리는 고려의 인쇄술을 구텐베르크의 활판술과 비교하면서 우리의 인쇄술이 세계 최초하는 사실에만 주목한다. 이에 대해서도 저자는 독특한 시각으로 접근한다. 고려 때 활자가 등장한 동기는 재료의 부족, 조판을 위한 조각가의 부족, 양반 중심의 제한된 수요 등으로 인해 발생된 창조물로 한국에선 한민족의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아무튼 기원에 대한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이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알파벳이라는 서양문명의 특징이 있었기에 순식간에 유럽 전역에 파급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가히 지식 정보의 혁명이었다.
총 7장에 걸쳐 써내려간 저자는 편협한 민족주의를 초월해야 함을 강조한다. 예컨대 인장印章, 석비石碑, 청동靑銅에 필요한 제련 기술은 모두 서양에서 중국으로 전해졌는데 이때엔 실크로드도 개설되기 이전이라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중국 역시 서양의 진귀한 보물과 정교한 수공예품을 부러워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렇듯 민족주의적 역사관에서 벗어나자는 메세지를 우리에게 던지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