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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조선을 버렸다 - 정답이 없는 시대 홍종우와 김옥균이 꿈꾼 다른 나라
정명섭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7년 5월
평점 :
"난 꿈을 꾸고 있었네."
"그건 꿈이 아니라 욕심이었어. 조선을 좌지우지하겠다는
욕심말이야"
문 밖의 남자가
냉정하게 대꾸하고는 팔을 들어 그를 겨누었다.
"난 부강한 나라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야. 그게 욕심인가?"
"지금 자네 꼴을 보게. 지금은 상하이로 와서 그들의 힘을 빌릴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건 꿈이 아니라 악몽일세"
"난 꿈이 있었다니까!"
문 밖의 남자는 침대에 누운 몸을 일으키며 외치는 그를 향해 겨눈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 '문 안의 남자, 문 밖의 남자'
중에서
혁명을 꿈꾼 두
사나이
책의 저자
정명섭은 역사 교양서 저술가로 햇빛처럼 선명하게 기록된 역사 속에서 그 빛을 받아 밤을 비추는 달과 같은 이야기를
찾는다. 그래서 우리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중요한 사실들을 발굴하거나 익숙한 것들을 새롭게 들여다봐 낯선 모습을 발견하는 데 관심이 많다. 역사
교양서로는 <일제의 흔적을 걷다>, <스승을 죽인 제자들>, <조선백성실록>, <조선의 엔터테이너>,
<조선의 명탐정들>, <조선전쟁생중계>등을 썼다. 복잡한 현실의 사정이 작용된 역사에서 배 제되어왔던 이들의 간절한 꿈을 쓰고자 역사소설 또한 꾸준하게 내고 있다. 지은 소설로는
<별세계 사건부>, <사라진 조우관>, <조선변호사 왕실소송사건>, <적패> 등이
있다.
1895년에 살았던 조선인들은 이로부터 10년 후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또다시 5년
후에는 나라가 통째로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리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 해에 나라의 왕비가 일본인들의 손에 비참하게
난도질 당할 것이라곤 꿈에서조차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당시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서양과의 두 차례 무력 충돌 후 그들의 강력함을 깨닫고도
나라의 문만 꽁꽁 닫아 걸더니 급기야는 밀려드는 외세에 굴복, 야금야금 나라는 좀먹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라의 왕만 탓하기에 앞서 그 때는 무엇이 정답인지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손자병법에도 "지피지기 백전불태"라고 했다. 뭘 알아야 해결책이 나올텐데 남의 나라를 배울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으니 그 대가가
너무나도 컸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이미 훨씬 오래 전에 "너 자신을 알라"라고 그렇게 외쳤건만 우리 조선은 자기 자신을 너무나도
몰랐던 것이다. 과거부터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는데, 조선에는 이도 해당되지 않았다. 유능하고 탁월한 지도자가 출현하지
않았다.
조선의 정치에 일일이 간섭하던 선비라는 족속들은 자기네 밥그릇 싸움에만 몰두했기에 그
여파는 정말 지긋지긋하게도 이어져 내려왔다. 오늘날의 정치판에까지 침투해 있으니 말이다. 소위 '패거리 정치'가 바로 그것이다. 자기들만 옳고
남은 다 그르다는 그런 식의 사고방식으로 나라의 정치에 나아가 살림살이에 관여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다시 당시로 돌아가 보자.
외국에서 물 건너 온것이라면 청淸나라의 돈조차 안 된다고 왕고집을 부렸던 최익현 같은 선비들, 아예 조선은 싹수가 없다고 결론 내린 윤치호 같은
개화파 인물들이 같은 시대를 살고 있었다. 아예 정답을 모르던 이들은 투쟁을 벌어야만 했다.
두 사람은 어떤 꿈을 꾸었나?
홍종우와 김옥균, 두 사람은 암살과
죽음이라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인물이다. 단순히 암살자로 알려진 홍종우를 그렇게 단편적으로 규정 내리는 것은
몰지각의 극치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 유학파였으며 우리의 고전들을 번역해서 해외에 알린 문인文人이기
때문이다.
후세인들로부터 친일파라는 낙인을
뒤집어 쓴 채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김옥균, 그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탄탄대로의 출세길이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내팽개치고 개화개화에 자신의 목숨을 건 도박을 감행했다. 아무나 이런 용단을 내릴 수 있는가? 그가 단순히
출세를 위해서 친일을 했다는 설명은 논리가 부족해 보인다.
위조 여권을
사용하다
'제1호 프랑스 유학생'으로 불리는
홍종우는 실제로 유학생이 아니었다. 웅지를 품고 프랑스러 건너간 것은 맞지만 교육 기관에서 학문을 전공한 흔적이나 중도에 포기한 사실조차도 없기
때문이다. 1890년 12월 24일, 그는 일본의 정치가 이다카기 다이스케가 프랑스 총리에게 써 준 소개장과 여권을 지참하고 파리에
도착했다.
하지만 홍종우가 지닌 여권에는 그를
누구에게 소개해 준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홍종우가 지니고 있었다는 여권은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이나 혹은 일본에서 만들어낸 위조
증명서일 가능성이 크다. 그때까지는 프랑스에 조선 외교관이 부임하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여권을 지녀야만 프랑스에 입국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가짜 여권을 만들었을까? 아마도 프랑스 내의 유력인사를 만날 때 스스로의 신분을 증명할 목적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가 맨 처음 방문한 곳은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였다. 그는 뮈텔 신부에게 보내는 보레 신부의 추천장을 소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뮈텔 신부는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이미
출발한 직후엿다. 그래서 그는 신부들의 주선으로 성 니콜라스 학교 기숙사의 다락방에 거처를 정했다. 며칠 후 그는 대문호 빅토르위고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 펠릭스 레가메를 만났다.
펠릿스 레가메의 증언에 의하면
홍종우는 조불수호통상조약 당시 조선에 왔던 외무장관 꼬고르당과의 만남에서 조선을 위해 유럽문명을 배우고 싶고, 이를 통해 일본처럼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했으며, 러시아와 미국 등지에 흩어져 있는 소수의 동지들과 함께 조선의 완전한 독립과 조선을 외국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정책의 폐지 등을
추진할 꿈을 밝혔다고 전한다. 하지만 더 이상의 면담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의 정치적 행보는 여기서 끝이 난 듯 보인다. 이후 그는 기메
미술관에서 일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는 동양학이 대유행이어서
중국과 일본 서적들이 연이어 번역되고 있었다. 홍종우는 한문에 능통했고, 일본어도 어느 정도 가능했기에 기메 미술관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메 미술관이 조선에서 수집해온 서적들을 번역했다. 첫 번째 책이 바로 <춘향전>이다. 일하는 방식은 일본어로 구술하고
이를 다시 프랑스어로 옮겨 적는 순서로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좌절하고 조선으로
돌아가다
어렵사리 프랑스에 온 지 3년도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홍종우는 귀국을 위해 배를 타려고 마르세유 항구로 갔다. 때는 1893년 7월 22일이었다. 펠릭스 레가메의 기록에는 두
사람 간의 대화가 이렇게 적혀 있었다.
"프랑스에서 뭐가
좋았습니까?"
"말들이오. 마르세유에 도착해서
봤는데 크고 튼튼해 보였소"
"나빴던 것은
뭐였습니까?"
"이기주의였소"
펠릭스 레가메는 타국에서 신세를 지고 살았으면서도 전혀 고마워하지
않았던 이방인에 대해서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홍종우 입장에서 보자면 프랑스에서의 시간은 실패나 다름없었다. 자신을 서커스 광대나
중국인으로 취급하는 백인들 사이에서 정치적 야심을 펼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조선의 문학을 유럽에 알리는 데 공헌을 하긴 했지만, 당시로서는
호구지책일 뿐이었다.
김옥균을
살해하다
많은 학자들이 홍종우가 김옥균의 암살을 결행한 이유에 대해서 분석했다.
정치적 신념 혹은 가문의 복수를 위해 암살을 결심했다고 추론하지만 가장 단순한 이유가 정답에 가까워 보인다. 즉 고종의 밀명을 받고 도쿄에 온
자객 이일직을 만난 그는 아마도 거사가 성공되면 크게 출세할 것이라는 다짐을 받았을
것이다.
홍종우는 프랑스에서 몇 년 동안 지낸 경력만 가지고는 조선에 돌아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여기에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과 몸이 아픈 상태가 겹치면서 극도의 불안감과
초조함이 그의 행보를 결정짓는 데 일조를 했을 것이다.
김옥균은 그렇게 죽지
않았다.
3일 천하로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김옥균의 신볍은 매우 위험해졌다. 급히
일본으로 피신했지만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이에 그는 중국 상하이로 가기로 결심한다. 1894년 3월 9일 밤 9시 58분, 그는 와다
엔지로, 사진사 가이 군지 등과 함께 시나가와역을 출발했다. 이후 상하이까지의 여비를 확보하기 위해 오사카에 열흘 동안
체류했다.
3월 21일, 이일직이 김옥균에게 일본 돈 600엔과 상하이에 위치한
천풍전장錢莊에서 현금으로 교환할 수 있는 5천원짜리 어음을 제공하면서 교환은 이일직 본인과 홍종우만 가능하다고 설명한 후 2천원을 여비로
사용하고 나머지 3천원은 홍종우를 통해 돌려달라고 했다. 물론 김옥균은 이일직과 홍종우를 의심하고 있었지만 여비 때문에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3월 24일, 고베항에서 상하이로 향하는 배에 승선했다. 재기를 노리는 김옥균, 죽일 기회를 노리는 홍종우, 두 사람의 동상이몽이
시작되었다.
3월 28일, 김옥균은 홍종우에게 천풍전장에서 어음을 교환해 오라고
부탁하고 산책에 나섰다. 한편, 홍종우는 시간을 벌기 위해 마차를 빌려 상하이 시내를 둘러보았다. 오후 1시에 돌아와선 전장 주인이 없어서 오후
6시에 다시 가야한다고 둘러댔다. 그런데, 오후 4시쯤 홍종우에게 마침내 기다리던 때가 찾아왔다. 와다가 김옥균의 심부름으로 1층으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홍종우는 총을 꺼내 들고 김옥균의 방으로 들어가 방아쇠를 당겼다.
이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김옥균의 암살 당시 정황이다. 하지만 와다
엔지로의 증언은 약간 다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김옥균이 2층 8호실 앞 복도에서 쓰러져서 죽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2층 8호실의 주인은
일본 해군 군령부 제2국장의 직책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일본 해군 군령부 국장이라는 요직을 맡은 인물이 하필 같은 여관의 같은 층을 썼고,
그의 방 앞에서 죽었으며, 암살 사건의 최초이자 유일한 목격자인 것이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일본 정부에 의해 철저히 가려졌으며, 일본 신문들
역시 김옥균이 방에서 낮잠을 자다가 암살당했다는 식으로 사실을 왜곡했다.
독립협회와 황국협회의
대립
오늘날 대부분은 독립협회와
황국협회의 대립을 진보와 보수의 충돌쯤으로 이해하지만 진실은 좀 더 복잡하고 내밀하다. 황국협회가 독립협회와
갈등을 벌인 것은 고종을 비롯한 대신들의 배후 조종 때문만은 아니었다. 독립협회는 독립이라는 이름과 조정에 외세를 배격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
것 때문에 반외세를 주장하는 단체로 오인된다. 하지만 '헌의 6조'에 나온 것처럼 이들은 외국과의 조약이나 협정
자체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대신들과 중추원의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또한 외국 군대의 주둔이나 외국 상인들의 도성 안에서의 활동 역시 조선의
힘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물론 독립협회에서는 조정 대신들에게 함부로 외국과 협정을 맺어 나라에 손해를 끼쳤다고 맹비난했다.
도약소都約所와 건의소청에서 외국 상인들을 도성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할 때에도 시대를 거스르는 짓이라며 반대하는 다소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외국 상인들의 침투는 보부상들에게 위기감을 조성시키기에 충분했다. 당연히
이들은 외국 상인들의 활동을 묵인하는 독립협회와 마찰을 빚게 되었다. 민권民權 운동 측면에서도 10월 12일 민선의원을 선출하자는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한 황국협회 측의 견해가 중추원을 확대 개편하자는 독립협회 측 의견에 비해 훨씬
더 진보적이었다.
이승만의 야릇한 인생
역전
박영효의 역모와 연관되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었고, 권총을 가지고 탈옥을
했다는 죄목을 가진 이승만이 살아날 가능성은 희박했다. 하지만 박영효와 관련이 없으며 탈옥 시에도 다른 두 사람의
권유와 협박 때문이었다는 증언이 그의 생명을 구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의 질품서를 올린 평리원 재판장은 다름아닌 홍종우였다.
독립협회라면 이를 갈던 홍종우였지만, 그는 원칙대로 판결했다. 이승만
자신도 홍종우가 재판장으로 있는 한 살아남기 어렵다고 각오한 듯 훗날의 자서전에서 이때의 일을 "야릇한 인생의
역전"이라고 표현했다.
홍종우의 삶을 바라보면 묘한 궤적과 마주친다. 외부의 시선이 섞이면서
다소 혼란스러울 때도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그는 왕권 강화론자의 길을, 법관으로선 지독한 원칙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이처럼 홍종우는 이승만을
처형해서 고종의 신임을 받을 기회를 저버렸다. 홍종우가 갑자기 7월 27일 평리원 재판장에서 법부사리국장으로 좌천된 것은 이승만의 재판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904년 8월 7일 이승만은 사면령을 받고 출옥했다. 마침내 그는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정말 아이러니한 역사적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