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속임수
샤를로테 링크 지음, 강명순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4월
평점 :
품절
침입자가 바로 옆에 있었다. 식당 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온 게 분명했다. 누군가
주방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왔을 거라 단정한 것도 실수였다. 허술한 주방문이 늘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지만 식당에도 정원으로 통하는 유리문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침입자는 식당 유리문을 깨고 집안으로 들어온 게 분명했다. 현역 시절 신입 경찰들을 교육할 때 첫 번째로 강조하는 수칙이 바로 '섣불리 단정하지
말아야 한다'였다. 섣부른 오판이 경찰 본인은 물론 시민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는 만큼 침착하고 면밀하게 따져보고 나서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리처드 린빌은 평소 자신이 늘 강조했던 수칙을 어기는 바람에 끔찍한 순간을 맞게 되었다. 다시 한 번 침입자의 무쇠 같은 주먹이
어깨를 가격하는 순간 그의 무릎이 저절로 꺾어졌다. 뒤이어 관자놀이를 향해 주먹이 날아들었다. - '2014년 2월 22일, 토요일'
중에서
은퇴한 노형사의 죽음에 얽힌 비밀
소설가 샤를로테 링크는 작가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10대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크롬웰의 꿈, 또는 아름다운 헬레나>를 1985년 발표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그녀의 소설은 현재까지
독일 내에서만 2,400만 부가 넘게 판매되었고, 전 세계 30여 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독일에서는 국민작가로 불릴 만큼
높은 인기와 명성을 누리고 있으며, 다수의 소설이 드라마로 제작되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녀의 소설은 인간에 대한 예리하고 깊이 있는 통찰로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감정변화와 움직임들을 섬세하게 포착해내고 있는 게 특징이다. 저마다 개성이 뚜렷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사회와 인간의 이면에 감추어진 허위와 모순을
날카롭고 파헤치고 있으며,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는 절묘한 플롯과 반전으로 전 세계 심리스릴러 마니아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속임수>는 2001년 9월에 벌어진 자전거를 탄 한 아이의 교통사고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이어서 은퇴한 강력계 형사 출신인 리처드 린빌의 살인사건과 그의 딸 케이트 린빌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여러 건의 강력 사건을
해결하면서도 정직하고 청렴한 공직생활로 모범을 보인 리처드 린빌의 충격적인 과거가 들춰지고 아버지의 살인 사건을 조사하면서 딸 게이트가 느끼는
감정들로 인해 우리들은 이야기 속으로 점점 빨려 들어가게
된다.
단 한번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발생한 연쇄살인,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인간의 얼굴, 속임수로 지워버리려 했던 과거들이 하나둘 나타나면서 인간의 이기심, 숨기고 싶은 욕망, 타인에 대한 무관심 등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증오심이 낳을 수 있는 비극이 얼마나 큰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소설은 우리들에게 진리는 속임수가 아닌 진실과 정의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셈이다.
뛰어난 자연 경관이 돋보이는 영국의 북부지방 요크셔를 배경으로
채택함으로써 우리들은 그곳을 여행하는 듯한 착각에 빠질 것이며, 또한 등장인물들이 겪게 되는 혼돈과 좌절, 그리고 인간적인 고뇌 등을 통해
우리들은 밑바닥에 깔린 인간의 심리를 파헤칠 수 있는 보너스를 얻는다.
유력한 용의자로 과거 리처드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된 데니스 쇼브가
떠오른다. 수감 당시 그는 복수를 다짐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출소한 이 용의자는 오리무중이다. 살인사건의 단서가 딱히 보이지 않는
가운데 리처드의 딸 케이트 형사가 이를 해결코자 전격적으로 투입된다.
사건을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과거 리처드와 연인 관계였던 멜리사 쿠퍼가
등장하면서 수사는 급박하게 진행된다. 한편, 멜리사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약속 장소로 향하는 케이트는 도움이 될 제보를 은근히 기대하지만
결국 현장에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사무실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다. 이로써 두 번째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아버지와 멜리사의 결별이 당시 암 투병 중인 아내와 딸 케이트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급하게 두 사람의 관계가 정리된 것을 수상히 여긴 케이트는 아버지의 옛 동료이자 파트너였던 은퇴 경찰관 노먼을 찾아
그 속사정을 들어보려고 한다. 아뿔사, 노먼도 변사체로 발견된다. 세 번째 살인 사건이다.
이쯤 되면 눈치 빠른 독자는 이미 데니스 쇼브가 진범이 아님을 확신할
것이다. 왜냐하면 연쇄 살인범은 매우 치밀한 계획하에 한발 빠른 동선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옥살이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뭔가
원한이 사무친 사건에 대한 관련자들의 응징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경찰은 세상에서 정의를 지켜내는
직업이잖아. 정의를 부정하고, 사리사욕을 위해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들을 짓밟는
자들은 단호하게 응징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해"
이제사 작가 샤를로테 링크가 소설의 첫 도입부를 굳이 자전거 교통사고
장면으로 시작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리처드의 연인 관계였던 멜리사가 교통사고의 진범이었지만 리처드는 동료였던 노먼과 함께
이를 숨겼던 것이다. 결국 사고를 은폐한 이 속임수로 인해 연쇄살인이 벌어진 것이다. 또한 평소 당당하고 정의로웠던 아버지라고 생각했던 딸
케이트 형사에게는 두 얼굴을 가진 아버지의 충격적인 속임수였던 셈이다.
진실과 정의를 일깨우는 명품 스릴러
은퇴 경찰관 리처드 린빌의 모범적인
삶의 이면에 부도덕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듯이 내성적인 딸 케이트의 이면에도 사려 깊고 치밀한 면모가 숨겨져 있었다. 책임감이 투철했던 케일럽
헤일 반장이 알코올중독자라는 사실과 장래가 촉망되던 제인 스캐핀 여형사가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경찰 신분을 이용했던 점들은 결국
인간을 단편적으로 이해해선 안된다는 교훈을 준다. 즉 사람의 얼굴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