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의 철학자들
레이먼드 D. 보이스버트 & 리사 헬트 지음, 마도경 옮김 / 21세기북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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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어떻게 먹어야 하나?"라는 문제에 대한 탐구가 진지한 철학적 관심을 쏟을 가치가 있는 프로젝트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우선 서문에서는 이른바 '철학'의 의미와 '음식'의 의미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이 프로젝트의 틀을 제시하고자 한다. - '서문' 중에서

 

 

어떻게 먹어야 하나?  

 

이 책의 저자 레이먼드 D. 보이스버트리사 헬트는 각각 뉴욕에 위치한 시에나 컬리지와 미네소타에 위한 구스타브 아돌프스 컬리지의 철학 교수이다. 이들은 지금의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소통할 때 철학가들의 사상과 가치가 어떻게 훌륭하게 작용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철학가들의 업적을 파헤치고 비교한다.

 

즉 신화, 문학 작품, 역사, 그리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많은 예를 통해 음식의 철학을 알아본다. 영화 <바베트의 만찬>(1987년) 속에서 음식은 품성의 덕으로써 환대로 나타나고, 예술로서의 음식의 본질을 생각하기 위해 스페인 분자요리학과 아프리카에서의 패스트푸드를 비교할 수 있다. 책은 우리가 아직 충분히 음미하지 못했던, 단순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먹는 행위에 대한 신선한 시각을 제시하며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음식과 경험 이상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영화 <바베트의 만찬> 중에서

 

책은 총 4개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제1파트(환대는 윤리의 문제다)에선 제각각의 취향을 가진 손님들이 가득찬 저녁 식탁에 주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라는 화두를 던지고, 제2파트(예술로서의 음식, 예술과 음식)에선 식탁에서 얻는 즐거움이 맛의 성질에 대한 깊은 논의를 통해 삶의 중심으로 등극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제3파트(맛보기, 검사하기, 알기)에선 철학의 2분법인 팩트(사실)과 가치의 타당성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무엇을 먹을지에 대한 우리의 결정이 합리적인가를 집중 탐구한다. 이에 대해 '호모 사피엔스'가 맛을 볼 줄 아는 종種이란 의미이므로 경험적으로 맛을 봄으로써 이를 알고 있다고 답한다. 제4파트(배고픔과 배고픈 인간)에선 철학 분야 중에서 가장 추상적이고 난해한 형이상학을 다룬다. "어떻게 먹을 것인가?"란 질문에 "마치 우리의 존재가 그것에 달려 잇는 것처럼 먹어야 한다"고 답한다. 마지막으로 제5파트(결론)에선 식탁에 앉아 있는 철학자들은 세상과 동떨어져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반대로 그들은 적극적으로 상황에 개입하는 참가자들이라고 결론내린다.

 

 

 

 

 

환대歡待란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다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기원전 43년~기원후 18년)가 <변신이야기>에서 환대의 가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오비디우스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전개된다. 주피터는 헤르메스를 대동하고 변장한 채 지상에 내려온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전능하신 신에게 잘 보이려고 아첨할 테니까 말이다.

 

거지로 변장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이 신들을 문전박대한다. 그런데 한 노부부만 예외였다. 바우키스와 그녀의 남편 필레몬은 꾀죄죄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두 손님을 극진히 대접한다. 즉 바우키스와 필레몬 부부는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 환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노부부는 손님들에게 푸짐한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집에 한 마리밖에 없는 거위를 잡을 생각까지 한다. 그 마음에 감동한 두 신은 결국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낸다. 이에 마을의 다른 주민들에겐 벌을 내리고 착한 노부부에겐 상을 내린다. 그 상이란 소원을 들어주는 것인데, 한날 한시에 죽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노부부 정말 금슬도 좋다.

 

그렇다면 주인이 손님에 맞춰야 할까, 손님이 주인에 맞춰야 할까? 이방인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환대해야 하나, 경계해야 하나? 이런 질문에 사실상 정답이 있을 수 없다. 그때 그때마다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음식과 환대는 공식을 만드는데 절대로 관여하지 않는다.

 

 

환대는 윤리의 문제다

 

"윤리학은 환대歡待다"

- 자크 데리다(1930~2004년>

 

그가 이렇게 선언한 이유는 윤리학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과 관계가 있으며, 환대는 우리의 터전인 이 세상에서 인간이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도덕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년)는 철학이 지향해야 할 올바르고 핵심적인 방향이 윤리학이라고 주장했는데, 데리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데리다의 이론, 즉 환대가 윤리학이라는 이론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환대를 미덕으로 보는 윤리학은 우리에게 안주하는 마음을 버리라고 요구한다. 이것은 사람들과의 교류, 그렇다, 얽히고설킨 인간관계를 추구해야 할 동기를 부여한다. 호메로스 시에 자주 등장하는 선물 교환 장면은 중요하지만 흔히 간과되는 또 다른 차원의 교훈을 준다. 음식을 선물로 제공하는 행위는 두 사람의 인간관계가 얽히고설키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식사는 미학적 만족이다

 

농부이자 음식 운동가인 웬델 베리는 <식사의 즐거움>(1989년)이란 수필에서 독자들에게 자신들이 먹는 음식에서 이른바 '광대한 기쁨'을 키우라고 요구했다. 이 기쁨은 요리에 담긴 음식 재료들이 재배되고 생산된 환경을 이해하고 수긍의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다. 베리는 이 음식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환희, 즉 미학적인 만족은 그 사람이 그 음식이 재배된 환경을 알고, '그것에 찬성할 때' 가장 크다고 말한다.

 


따라서 미학적 기쁨은 엘 세예르 레스토랑의 경우처럼 참신성, 창의력, 놀이 그리고 세심한 연출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혹은 베리와 미국 전역에 로컬 푸드 부흥 운동을 퍼드린 앨리스 워터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접시에 놓인 음식의 재료가 재배된 곳을 아는 데서 온다. 이는 먹는 행위가 절대로 재미없고, 단순한 생물학적 행위가 되어선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음식은 예술인가?"

 

 

감각들도 계급이 있다

 

인간들은 감각들의 위계질서를 정한 이론을 물려받았다. 이에 따르면, 인접 감각들(미각, 촉각, 그리고 약간의 논란이 있지만 후각 등이 포함된다)은 진정한 '알기'의 원천 또는 전달자로서 신뢰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진다. 신뢰할 수 있는 '알기'는 인체 중앙에서 먼쪽의 감각들, 즉 시각과 청각의 전유물이다. 그 이유는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사물을 만져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인접 감각과 먼 감각은 그 감각 경험이 우리의 마음을 대체로 그 사물 자체로 끌어들이는가, 아니면 우리 자신의 감각 쪽으로 끌어들이는가에 따라 나뉜다'고 말하며, 후자의 경우에만 객관성이 보장된다고 덧붙였다. 감각들이 우리에게 지식을 제공할 수 있는 정도에 한해서만, 우리는 특정 감각이 우리에게 진정한 지식을 제공하리라고 믿을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어떻게 먹어야 하나?

 

'철학'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지혜의 사랑'이다. 한쪽에 사람의 배腹와 농부를 연결하는 선이 있다면, 반대쪽에는 배와 식탁을 연결하는 선이 있다. 식탁은 언제나 배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공동의 공간이다. '어떻게 먹어야 하나?'라는 질문의 여러 작은 문제 중엔 '누가 우리 식탁에 나와 함께 앉을 것인가?'라는 문제도 포함된다. 즉 환대의 가치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환대가 친구들을 즐겁해 하는 일, 또는 경제계에선 손님 접대의 일임을 당연시했다. 굶주린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고 가정과 집의 수용력엔는 한계가 있는 이런 배경에서 윤리학은 우리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집을 얼마나 개방할 것인가?라고 말이다. 우리는 과연 식탁에 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후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이 책을 관통하는 메세지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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