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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역사가 바뀌다 - 세계사에 새겨진 인류의 결정적 변곡점
주경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2015년에 건명원建明苑에서
강의한 내용을 토대로 썼다. 현대사회는 과학기술과 산업의 발전이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우리 삶을 훨씬 더 풍요롭게 해줄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부익부 빈익빈의 모순을 심화시킬 우려도 크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엄청난 부를 쌓았지만 부국과 빈국 사이의 격차는
더 벌어졌다. 이런 가운데 중국이 눈부신 경제적 성취를 이루며 강대국으로 올라서면서 한반도의 정치, 경제적 상황은 앞날을 점치기 힘든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다. - '서문' 중에서
세계사의 커다란 변곡점을 살펴보다
책의 저자
주경철은 역사학 박사로 현재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대학교 역사연구소 소장,
중세르네상스연구소 소장, 도시사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주로 근대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관심을 두고 저작 활동과 번역 작업에 힘쓰고 있다.
주요 저서로 <대항해 시대>, <문명과 바다>, <문화로 읽는 세계사>, <네덜란드>,
<콜롬버스>, <마녀>
등이 있다.
저자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날로 커져가는 이 때에 장차 우리 사회와 국제 사회에서
주역으로 성장할 인재가 되려면 이와 같은 큰 문제들을 직시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고민해보아야 마땅하다고 판단하여
건명원에서 4가지의 역사적 주제를 놓고 강연회를 가졌었다.
첫째, 근대 유럽의 심성 세계를 탐사해보는 작업
둘째, '동양'과 '서양'은 어떤 이유에서 시작되었는지 이해하는
작업
셋째, 문명과 자연 간에 벌어지는 심각한 문제를 파악, 해결책을 찾는
작업
넷째, 현대와 미래 사회에 평화가 정착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작업
책은 총 5강으로 구성되었는데, 제1강(1492, 에덴동산 입구에 도달하다)에서는 최초로
대서양을 항해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콜럼버스의 정신세계를 해부해본다. 제2강(1820, 동양과 서양의 운명이
갈리다)에서는 대략 1820년 즈음 유럽과 미국 경제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경제를 따돌리고 독주하는 '대분기'
현상이 생겼음을 보여준다.
이어서 제3강(1914,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다)에서는 대항해
시대 이후 인간에 의한 자연 생태계의 훼손이 무자비하게 진행됨을 고발하고 있으며, 제4강(1945, 세계는 평화를 향해 가고
있는가)에서는 제국주의와 군사혁명을 살펴보고 20세기에 겪었던 세계대전이 무엇을 남겼는지 성찰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제5강(오늘, 역사의 물음에
답하다)에서는 기계화, 문명과 야만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세계사의 커다란 변곡점을
살펴보다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왜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항해했을까?
그는 정말로 향신료, 비단 등의 교역 항로를 개척하여 큰 부를 얻고자 목숨을 건 도박을 감행했을까? 이렇게 알려진 사실은 어찌 보면 역사의
왜곡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지구는 매우 작고 바다의 면적 또한 매우 작다는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인어와 괴물, 식인종과 여인국 등을
그대로 믿었으며 성경 속의 에덴동산을 찾고자 항해를 결심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소 뒷걸음질에 쥐잡은'
격으로 아시아를 찾아 항해를 떠났다가 잘못된 항해로 아메리카에 도착하는 행운을 잡은
셈이었다.
이처럼
'지상낙원'을 찾겠다는 황당한 세계관은 비단 콜럼버스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당시 유럽인들에게 만연되어 있었다고
봐야 한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이라는 소득과 함께 해상 지배를 통한 부의 축적을 이룰 수 있었지만 말이다. 이처럼 우리들이
알고 있는 위대한 인물 콜럼버스는 결코 선구적이거나 과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미 웬만한 선원들은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과 함께 아무리 대륙에서 멀리 배를 타고 항해를 나가더라도 결코 낭떠러지로 추락할 일이 없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콜럼버스가 지구는 평평하지 않고 둥글다고 믿었던 선구자적인 자세를 견지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다. 이는 그야말로 특정인물의
'신화만들기'인 셈이다.
심지어 그의 아들
페르디난드는 아버지에 대한 전기 <콜럼버스 전기>를 기술하면서 문턱에도
가지 못했던 그를 당대 최고의 명문인 파비아대학을 졸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학자가 콜럼버스의 어린 시절을 탐구하다가 밝혀낸 사실은
당시 제노바에는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초급학교가 있었는데, 이 거리의 이름이 '파비아 거리'였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선원 생활을 했던
콜럼버스가 어떻게 대학에서 정규과정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1492년, 이는 세계사에서 매우 의미있는 해이다. 요즈음
말로 벤처 비즈니스인 콜럼버스의 기획안이 스페인에서 어렵게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스페인 입장에서 보면 스페인의 그라나다에서 무슬림을
마지막으로 몰아내고 자국 내에 거주하던 유대인들 마저 축출함으로써 종교적으로 가톨릭 국가를 완성했던 해이다.
콜럼버스는 총 4회에 걸친 항해를
했는데, GPS가 없던 그 시절엔 그저 바람과 조류에 의존하던 방법 뿐이었다. 잘못 판단하면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다 죽기 십상일 정도로 위험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당시엔 이를 위험한 모험 사업으로 분류했다. 비록 대학을 다니진 못했지만 독학으로 지구의
조류와 풍향 등 전체적인 지식 체계를 만들었기에 그의 기획안이 통과될 수 있었다. 당시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등장하여 책을 통해 지식이 보급되고 있었기에 독학이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다.
콜럼버스가 생각한 우주관, 지구관에서
이 세상은 그저 물질적인 성격의 땅이 아니라 의미가 충만한 땅이다. 그가 아시아로 향한다는 것은 단순히 먼 이국異國으로 가는 정도가 아니라
신학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미 알고 있는 곳, 구약에서 이미 예약되어 있는 곳을 향해 인류의 꿈을 실현하려 가는 것이라고 콜럼버스는 스스로
의미부여를 했다.
1820년, 유럽이
중국 경제를 뛰어넘다
500년 전 유럽은 왕조 국가들이나
또는 이보다 작은 단위의 정치체들로 분열되어 있었다. 중세 말 유럽이 겪은 가장 큰 시련 중 하나가 바로 백년전쟁이었다. 장장 1백년 동안
영국괴 프랑스가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기근과 치명적인 전염병인 페스트까지 번지고 말았다.
세계의 문명이 교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수송 수단 때문이었다. 이는 크게 수레, 배, 카라반(데상隊商)으로 구별될 수 있다. 바퀴는 기원전
3~4천년 경에 발명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바퀴의 등장은 바로 수레로 연결되어 전쟁터에선 효율성 높은 수단이 되었다. 즉 말이 끄는 마차에
2인이 승차해 한 사람은 기수로, 다른 사람은 활을 쏘는 형태의 전차戰車였던 것이다.
결국 바퀴는 평화적 목적으로도
이용되었는데, 메소포타미아, 코카서스, 북유럽 등지에서 유라시아 여러 지역으로 널리 보급되어 교통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아프리카는
체체파리로 인해 가축을 사용하지 못하므로 바퀴를 사용하는 수레가 없다. 또 아시아의 타이가 지역은 진흙땅이라 도로를 만들기가 쉽지 않으므로 역시
수레를 사용할 수 없었다.
문명 간 교류에 있어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수단은 카라반, 즉 대상대상이다. 한국사엔 거의 등장하지 않는 낙타가 바로 그 주인공인데 사막지역은 단봉낙타가, 아시아의 서늘한
초원지대는 쌍봉낙타가 짐을 날랐던 것이다. 낙타라는 동물의 원산지는 아프리카가 아니라 미국이나 캐나다였지만 빙하기 말에 '베링기아'를 통해
아시아로 넘어온 것으로 추정한다.
낙타는 자기가 먹을 것을 스스로
해결하는 동물이라 운송 수단으로 낙타를 이용하면 유지비용이 매우 저렴하다는 장점이 생긴다. 최악의 경우 물 없이도 4~9일 정도를 버틸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능력 때문에 사하라 사막이나 아라비아 사막을 넘을 수 있었다. 이 덕분에 문명 간 전파 또한 가능했다. 이슬람 종교,
문화, 농경 등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사막 너머의 먼 지역으로 전파되는 데 낙타는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오늘날의 세계화 현상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준비된
것이다. 제지술, 화약의 전파를 비롯한 문명 간 교류가 모두 세계화 현상의 전조前兆이다. 한 가지 예로 먹을거리 전파 역시 인류 전체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토마토, 고구마, 감자, 옥수수, 고추 등의 아메리카 작물들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중국은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되었지만 유럽은 여럿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다. 유럽은 여러
개의 중심권이 생겨나고, 그 때문에 다수의 국가들이 형성되었는데, 이 국가들이 경쟁하며 강력한 해양력을 키움으로써 세계의 바다로 나아갔다는 것,
이는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볼 가설이라 할 수 있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 앨프리드 머핸, 미국 해군 제독
이 말은 미국이 계속 팽창하려면
과감하게 바다로 나아가야 함을 주장한다. 장기적인 전략을 갖고 유럽과 미국이 점차 바다로 나아가려 할 때 정작 세계 최강의 해양력을 보유했던
중국은 세계사의 큰 흐름을 오히려 거스르면서 스스로 발을 빼는 선택을 한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중국의
정화 선단은 더 이상 해상을 지배하지 않았다.
세계 경제사의 흐름이 재구조화되는 1820년대 '대분기'를
기점으로 중국은 지금까지 차지해온 헤게모니를 놓치고, 유럽과 미국이 확고하게 앞서나가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풍요로운 삶이라는 것은 19~20세기 이후에 일어난 경제 성장의
결과이다. 그것을 촉발시킨 산업혁명이 실로 얼마나 엄청난 현상인지 알 수
있다.
산업혁명이라는 것은 공급 측면에서 혁신이
일어나고 기술이 발전함으로써 생산력 향상이 일어난 것인데, 근면혁명은 이와는 달리 수요 측면에서 발생한 소비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장
경제가 확대되고 분업이 작동함으로써 경제 성장이 이루어진 것이다. 요약하자면 '수요혁명'이 먼저 진행되다가 산업혁명이라는 '공급혁명'으로
이어졌다.
세계 경제는 새롭게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그 꼭대기에 올라탄 서구가 세계의 경제적인 패권을 차지한다. 이때 서구는 단순히 상대적으로 앞서간 게
아니다. 영국의 산업이 몇 천 년 간 지속되어온 전통적인 인도의 직물업을 몰락시켰던 것과 같이 아시아 세계를 몰락시키고 그것을 발판 삼아 질주한
것이다.
1914년, 나그네비들기가 멸종하다
캐나다의 야생에서 우리들이 볼 수
있는 풀의 60퍼센트가 원래 유럽산이다. 나아가 미국 잡초 500종 중 258종이 유럽산이라고 한다. 북아메리카 대륙의 들판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풀들의 절반 이상이 아메리카 원산종이 아닌 유럽에서 '이민' 온 것들이라니, 상당히 놀라운
사실이다.
구구대륙, 즉 아시아나 유럽에서
호주, 뉴질랜드, 아메리카 등의 신대륙으로 갔을 경우 동식물의 번식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반대로 신대륙의 동식물이 구대륙으로 이동할 경우
이상하게도 전혀 맥을 못 추었다.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한 이론을 제시한 인물이 바로 미국 학자인 앨프리드
크로스비이다.
"모든 답은 아주 단순한 데 있다"
- 앨프리드 크로스비
규모가 큰 유라시아에서는 2억 년
이상 동안 많은 생물들이 서로 경쟁하며 지내왔다. 이에 비해 호주나 뉴질랜드 같은 작은 생태계에선 경쟁이나 갈등 요소가 약했기에 평화롭게 지냈던
것이다. 크로스비의 이론은 '생태 제국주의'라는 개념으로 귀착된다. 즉 "생명력이 강한 유럽의 생태계가 생명력이
약한 신대륙의 토착종을 몰아내면서 유럽인의 식민지 건설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오세아니아의 대표적 동물 키위와 코알라가 만약에 한반도에 살았다면
아마도 이미 멸종하지 않았을까?
인간은 자연 속에서
조화롭게 살기보다는 인위적으로 자연에 심대한 충격을 가하는 경향이 커졌다. 급기야 이제는 인류가 지구 기후와 생태계를 변화시키는 새로운 지질
시대로 접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래서 등장한 개념이 '인류세人類世'라는 것으로, 이는
인간 활동이 지구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친 시점부터를 별개의 세世로 분리한 지질 시대 개념이다.
근대 이후 근대 인간의 행위가 생태계 전체의 변화를 초래한 것이 분명하다. 이제 우리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지혜가 요구되는데,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만남을 통해 우리 자신과 세계를 잘 헤아리는 지혜를 갖춰나가야겠다.
1945년, 세계대전의
종료
일본의 지배 계급은 사무라이이고
사무라이의 존재 의의는 폭력의 독점이다. 이들 무사 집단의 논리는 자신들만이 최고의 무력을 독점해서 일반인을 보호해준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무기는 '칼'이었다. 아이로니하게도 일본은 조총으로 임진왜란을 일으켜 우리 강토를 유린했지만 이후 더 이상 총을 사용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칼이 바로 사무라이의 혼魂으로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사례에서 보듯이 무력의 발전과 쇠퇴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가지 요소 중 중요한 것이 '문화'이다. 군사력을 문화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최근 역사학의
중요한 연구 방향이다.
현대사회로 올수록 문명화되었다는
견해보다는 20세기를 증오의 세기로 묘사하면서 갈수록 더 야만화되었다고 하는 견해가 더 익숙할 지도 모른다. 문명화로 인해 시간이 지날수록
폭력성이 줄어든다는 설명이 아무래도 설득력이 낮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무자비한 살인과 폭력, 그리고 테러가 자행되고 있는 지구촌의 오늘 모습을
본다면 이는 결코 문명화가 아니다.
문명화와 야만화, 어느 편의
주장이 맞는 것일까? 당연히 그 양면을 다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굳이 하나를 골라 답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어찌 보면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도 않다. 우리에게는 섣부른 답을 내리는 것보다도 문제를 잘 파악하는 게 더 중요하다. 즉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의
'증오'와 '폭력'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오늘, 역사의 물음에 답하다
지구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마도 인간은
암 덩어리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 "인간이라는 종양을 빨리 제거해서 내가 치유되어야 할 텐데 이것이 사라지지 않고 자꾸만 증식하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광석 덩어리에 불과한 지구에 인간이 영혼을 불어넣어서 예전보다 더 아름답고 매력적인 별로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류는 확실하게 야만의 시대와는 선을
긋고 문명의 시대를 연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류의 미래를 낙관하며 우리의 밝은 내일을 만들어가기 위해 방향을 잡고 노력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것이 인류의 소망이고, 역사의 물음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