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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란 무엇인가
안경환 지음 / 홍익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세상이 크게 달라졌다. 우리 사회를
묶어두었던 각종 고정관념과 편견의 벽이 차례로 무너졌다. 남녀의 구분도, 차별도 한결 엷어졌다. '남자답게'나 '여자답게'라는 말의 무게도 한껏
가벼워졌다. 전보다 엄청 잘 살게 되었다지만 더 행복해진 것 같지 않다. 여자든 남자든 힘들기는 마친가지다. 세상의 변화에 적응이 더딘 남자가
더 힘든 것 같다. - '프롤로그' 중에서
남자다움이란 무엇인가?
저자
안경환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미국과 영국에서 공부했다. 1987년부터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법과 문학'을
강의했다. 그동안 런던 정경대와 미국 남일리노이대학 및 산타클라라대학 방문교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한국헌법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2006년 11월부터 2009년 7월까지 제4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사회의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을 강화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선천적으로 변화의 인지와
그에 따른 적응 능력이 부족한 남자는 시대 흐름을 읽기는커녕 자기성찰도 벅차다. 이런 남자들을 위해 저자는 인문학과 사회학을 넘나들며 21세기
남자가 갖추어야 할 '남성다움'을 제시한다. 위트와 시니컬함을 함축한 단어는 간결하고 명쾌한 문장으로 남성과 대한민국 사회를 꿰뚫어보게
한다.
남자들은 영웅적인 삶을
추구하고, 권력욕이 대단하지만, 공감과 소통능력이 부족한 존재이자 성욕에 집착하고, 성행위에서 자신의 만족과 위안을 찾는 존재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이러한 남성에게 21세기 사회는 여러 모로 불리하다. 여성이 뛰어난 사회적 지능, 공감과 소통 능력 등 이른바 '소프트파워'를 갖추고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반면, 남성은 남성중심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에 저자는 남성도 적극적으로 변화할
것을 주문한다. 이를 위해 그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포착하려고 돋보기를 들이댄다. 매스미디어와 인터넷기기의 발달이 몰고 온 사회문화적 현상,
군복무가산점 제도의 논란에서 비롯된 사회적 쟁점들, 지정학적으로 한국이 겪는 문제 등 굵직한 시대적 흐름을 읽어주고, 새로운 가치관을 세울 수
있도록
조언한다.
남자와 여자의 뇌는
다르다
인간의 뇌는 좌우에 각각 두 개를 가졌다. 좌뇌와
우뇌이다. 그런데 각가의 기능이 다르다. 즉 우뇌는 직감과 감성을, 좌뇌는 언어와 사고를 가각 담당한다. 두 뇌의 사이에는 정보를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뇌량腦梁'이 있다. 연구에 따르면 여자가 남자보다 좌뇌와 우뇌의 연결이 매끄럽고 균형을 갖고 사용한다고
한다.
남자 뇌는 동시에 여러 소리를 듣기 힘들다. 카페에
들어가면 남자는 애인의 목소리만 들린다. 그러나 여자는 반경 10미터 내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대부분 듣는다. 여자는 읽기와 듣기를 동시에
집중할 수 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을 때, 옆 사람이 솔깃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여자는 책을 읽으면서도 들을 수 있다. 이처럼 성격이 다른
복수의 정보를 동시에 처리하는 소위 멀티태스킹은 여자 뇌만 가능한 일이다. 휴일에 남편은 소파에 앉아서 TV만 시청할 뿐, 그 옆에 마른 빨래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보면서도 할 수 있는 일 같아도 싱글태스킹인 남자에겐 불가능하다.
남자의 영웅적
삶
"남자들에게서 대의大義를 빼앗아버리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이는 오래된 독일 속담이다. 예로부터
남자는 영웅의 삶을 갈구한다. 영웅은 결코 침대에서 죽지 않는다. 대의를 찾아 집밖을 나서 온갖 고난과 모험을 극복하고 돌아와 승리의 영광을
공동체와 나눈다. 어느 민족이나 어느 나라에서나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영웅담은 거의 다 이런 식이다.
남성성의 생물학적 핵심은 추진력과 한
인간과 남자로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의지로, 한마디로 말해서 '남자다움'이다. 그 남자다움의 행태로 가장
바람직한 것은 자기희생이다. 가족과 주변사람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강력한 남자의 모습이다. 그리고 최악의 행태는 잔인하고 주변사람에게 수치심을
주며, 파괴적이고 위험한 남자가 되는 것이다. 남자들은 개인적 가치와 힘을 추구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남자들이 직장 업무를 끝내기 전에
가족을 직접 돌보는 경우는 드물다.
남자, 결혼을 관성과 체념으로
채우다
"서로 사랑하기는 쉽지만 함께 살기는 어렵다"
중국 속담이다. 우리들은 사랑이란 열정보다 테크닉이란 것을 살아보고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결혼은 적당한 수준의 거짓말을 서로가 견디고 참아내는 기술이다. 20세기를 연 위대한 철학자 니체는
'결혼제도는 열정의 본질에 어긋나는 제도'라고 단언했다. 즉 불타오른 사랑으로 결혼한 커플에게 영원한 사랑의
의무를 부여하는 제도는 열정의 본질에 어긋난다. 그래서 현대사회의 가장 슬픈 합의 중 하나가 바로 결혼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사랑의 시작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알면서도 어떻게 사랑을 지속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모하리만치 아는 게 없다. 결혼의 본질은 무엇인가? 무수한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게 말하면 결혼생활의 본질은 '관성'과 '체념'이다. 관성이란 부부 간에 축적된 편한 상태다. 둘 사이가 편해지려면 서로 양보해야
한다.
좋은 부부관계를 위해 항상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한두 가지 면에서는 때때로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인정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부부 사이의 사랑의 본질은 원래 '관성과 체념'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남성 중심의
세계
우리 헌법은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다라서 모든 종교는 타 종교의 교리와 신앙을 존중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사회는 종교 간의 갈등이 비교적 적은
편이다. 일부 맹신도들이 사찰에 방화하는 몰상식한 일을 빼고선 말이다.
가끔 의연한 자세로 죽음을 맞는
종교인의 모습은 진한 감동을 준다. 평생 신과의 거리를 유지하던 사람도 생의 마지막 순간에 종교에 귀의하는 일도 늘어난다. 막상 죽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 인간은 참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다. 삶이 각박해서일까, 아니면
허무해서일까?
전형적인 종교는 철저하게
남성 중심의 세계였다. 신은 언제나 남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사제도 물론 남자다. 유혹에 저항할 힘이 약한
여자를 순치馴致와 제도를 넘어 희생의 제물로 삼았다. 남자는 여자보다 광신도가 적다고 한다. 여자만큼 순수하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원불교와
같이 탄생 당시부터 여성의 지위와 역할이 높은 토속종교가 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인터넷에서의 남녀간
논쟁
인터넷은 이제 현대인의 삶 그 자체가 되었다. 동시에
여론의 극단화 현상을 이끄는 '네트워크의 악마'로서의 이빨로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인터넷 정보의 정확성에
대한 의심과 질문이 더 많아져야 한다. 영국왕립학회가 말한 다음 말이 바로 인터넷 마당에 놓여져야 할
좌우명이다.
"누구의 말도 곧이곧대로 믿지
말라!"
인터넷상에서 벌어지는 남녀의 치열한 논쟁은 대체로 남자의 패배로 종결되기 십상이다.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올린 여성의 메시지는 남자보다 훨씬 더 정서적인 호소력이 강하다. 일례로 여성의 메시지에는 이모티콘이나 넓게 비워둔 행간이
많다. 읽을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는 친절함이다. 여자 뇌의 특징인 '공감'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남자 뇌는 문자나 언어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여자에 비해 극심한 속어와 비어를 사용함으로써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의 신빙성을 약화시킨다.
우는 남자는 비정상이
아니다
잘 우는 남자가 실제로는 여자로부터 더욱 사랑을 받는다. 모성보호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상황에서 우는 남자라면 여자는 그 곁을 떠나고 만다. 왜 그럴까? 결정적인 위기 상황에 기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남자는 여자 앞에서 맘대로 울지도 못한다. 여성 앞에서 울음을 보인다는 것은 다정다감하다는 것 보다는 스스로 나약함을 드러내는
일이어서다.
흔히 우는 남자는 비정상으로 취급받는다. 남자가 정신과를 찾는
이유는 단 두 가지 경우뿐이라는 말이 있다. 발기불능일 때와 정신과 치료를 받지 않기 위해서, 즉 자신이 정상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만큼 남자들은 자신에게 심리적 문제가 있다고는 상상도 못한다고 한다. 남자들이 심리치료를 받지 않으려는 이유는 우선 자기 내면을 보기가
두려워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이유는 자신이 잘못되었을 리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누구나 과도기를 살아간다
사람은 누구나 연탄재처럼 뜨거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 벌겋게 달아오른
연탄 밑불이 위로 새로 놓이는 연탄에게 불꽃을 넘겨주듯이 20세기의 연탄은 21세기에도 꺼지지 않고 있다. 역사는 파괴와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연속적인 발전과정이다. 때로는 잠지 제자리에 머뭇거리거나 머뭇거리기도 하지만, 이내 추슬러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인류의
걸음이다.
태곳적부터 남자와 여자는 함께 살았지만 항상 더불어 산 것은 아니었다.
20세기까지는 대체로 남자의 시대였지만, 새로운 세기는 이제 확연히 달라지고 있다. 남성들이여, 이젠 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