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로마 읽기 - 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리더십과 자기계발의 지혜
양병무 지음, 정기문 감수 / 21세기북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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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 아닌 까닭에 부족한 점이 많다. 하지만 로마 역사를 리더십 전문가의 입장에서 정리하고, 창업과 승계의 관점에서 분석했다. 동시에 오늘날의 인사 관리, 조직 관리, 자기계발 등과 연계하여 조직의 경영과 관리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구성했다. - '프롤로그' 중에서

 

 

로마에서 배우는 리더십과 자기계발의 지혜

 

저자 양병무는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와이 주립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KDI(한국개발연구원) 주임연구원, 노동경제연구원 부원장, 한국리더십학회 부회장, 대통령 자문 일자리위원회 위원, 숙명여대 초빙교수, 한국인간개발연구원 원장, 서울사이버대학교 부총장, 재능교육 대표이사 등을 역임했다.

 

'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리더십과 자기계발의 지혜'라는 과정을 개발하여 10여 년 동안 강의를

 

로마 역사의 내용은 그 양量이 방대해서 독파하기가 쉽지 않다. 이에 저자는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로마사를 정리하여 미처 독파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한 권으로 읽을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정치 체제의 발전 과정을 중심으로 로마사를 개관, 각각의 정치 체계에서 배울 수 있는 경영의 원리와 자기계발의 지혜를 담았기에 경영학도나 기업체 임직원 및 경영자에게 유익한 도움을 준다. 

국가나 기업이 성장하는 원리는 동일하다. 하지만 로마 제국처럼 강하면서 장기간 존속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저자가 로마를 바라보는 시각은 독특하다. 즉 벤처기업으로 시작해 점차 규모를 키워 '주식회사 로마'가 되어 반도를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하면서 인류 최초의 다국적 기업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1200년간 로마가 존속할 수 있었던 원리를 찾는다면 기업이든 국가든 성장 전략을 세우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로마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내용은 참으로 많다. 공화정에서는 로마의 성장 동력이 된 개방성과 시스템 구축, 인프라 정비, 매뉴얼 작성, 로마법,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배울 수 있고, 매년 집정관 선거를 통해 유능한 인재를 지속적으로 배출한 사례를 통해서는 인적자원관리 시스템을 벤치마킹할 수 있다. 창업과 승계 측면에서 가장 성공한 모델인 카이사르와 그 후계자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통해서는 개혁과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또 21년간의 재위 기간 중 14년간 속주屬州를 순행하면서 현장에서 정책을 펼친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통해서는 현장제일주의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다. 아울러 기독교의 탄생과 탄압, 기독교의 공인과 국교 인정 그리고 기독교가 유럽 사회에 미친 영향을 살피는 것도 흥미롭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강점은 배우고 약점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로마 역사의 개관槪觀

 

로마를 흔히 천년제국이라고 부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따지면 약 1,200년 정도의 역사를 지녔다. 로마제국이 기원전 753년에 건국되었고, 서로마제국이 476년까지 지속되었으니 정확하게 계산하면 1,229년간 존속했다. <로마인의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도 서로마제국에 국한시키지만 동로마제국은 1453년에 멸망했으니 이를 포함한다면 무려 2,200년의 역사가 된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오랫동안 대국으로 존속하고 유지된 국가는 없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 칭기스칸의 몽골, 페르시아왕국, 청나라 등 인류사에 큰 족적을 남긴 나라는 많았지만 대체로 200년을 넘기지 못했다. 이에 반해 로마는 오랫동안 강성함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인류 문명에 강하게 남아 있다. 우리가 로마에 관심을 갖는 것도 그래서다.('천년제국 로마의 역사 개관' 중에서)

 

 

벤처기업으로서 출발한 로마 

스탠리 빙<로마처럼 경영하라>에서 로마의 출발을 벤처기업의 창업에 비유했다. 또 사비니족과 통합한 것을 최초의 인수합병으로, 로물루스가 동생 레무스를 살해하는 것을 경영권 다툼으로 각각 해석했다. 벤처기업의 성공 이유는 대개 비전의 공유 때문으로 파악한다.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참여와 협력을 바탕으로 삼기에 결과적으로 창대할 수 있는 것이다.  

 

로마의 역사는 구멍가게에서 시작하여 세계적인 대규모 기업 집단으로 발전한 글로벌 대기업에 비유할 수 있다. 국가나 기업이 성장하고 생존하는 원리는 동일하다. 하지만 어느 기업이나 국가도 로마처럼 강대하면서도 장기간 존속한 경우는 역사적으로 그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토록 장기간 동안 지속된 원리를 찾는다면 기업이든 국가든 유익한 성장 전략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팽창의 기틀을 만들다

 

초대 왕 로물루스는 세습제의 유혹을 물리치고 2대 왕은 사비니족인 누마를 세워 법의 체계를 충실히 다졌다. 3대 왕은 누마의 뒤를 이어 라틴계인 툴루스 호스틸리우스가 선출되었다. 호전적인 툴루스는 유순해진 로마인을 전투적 시민으로 만들기 위해 전투 경험을 쌓게 했다. 그 첫 번째 공격 대상은 선조의 땅 알바롱가였다. 로마의 역사는 겨우 80년이었지만 알바롱가는 40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로마는 전쟁에 패한 민족에게는 두 가지 정책을 취했다. 첫째, 동화 정책을 계승하고 둘째, 약속을 어기거나 배신하는 해위엔 철저하게 응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알바롱가인에게는 시민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로마의 시민은 더욱 많아졌다. 인구의 증가는 바로 군사력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로마 왕정의 세 왕은 각각 다른 방향에서 로마의 기틀을 다지는 역할을 감당했다. 초대 왕 로물루스는 정치체제를 구축했다. 2대 왕 누마는 종교와 법의 체계를 세웠으며, 3대 왕 툴루스는 로마가 외부로 확산되어나가는 기틀을 마련했다. 마키아벨리<로마사 논고>에서 세 왕이 각자 다른 방향에서 로마 초기의 국가 체계를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에는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로마 공화정

 

"로마는 해마다 선거를 통해 뽑히는 자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개인보다는 법이 지배하는 국가가 되었다"

 

이는 리비우스가 로마 공화정의 특성을 설명한 내용이다.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이 시작되면서 왕의 역할은 매년 민회에서 선출되는 2명의 집정관이 맡게 되었다. 초대 집정관에는 브루투스와 콜라티누스가 당선됐다. 브루투스는 시민들에게 "로마는 앞으로 어떤 인물도 왕위에 오르도록 허용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인물도 로마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함으로써 왕정 폐지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밝혔다. 이렇게 해서 브루투스는 공화정의 창시자가 되었다.

 

 

평민에게 모든 공직을 개방하다

 

귀족과 평민 간의 대립과 갈등은 켈트족의 침입을 초래하고 말았다. 결국 로마군은 켈트족에 패배하여 7개월 동안 로마 시가지를 야만족의 손에 넘겨주고 말았다. 한마디로 무법천지로 변해 폭행, 살인, 약탈 등이 자행되었다. 이후 견디다 못한 로마인은 켈트족에게 300kg의 금괴를 지급하고 물러나게 했다. 이 일을 계기로 귀족과 평민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정치 개혁의 필요성을 느껴 법을 제정했다. 바로 '리키니우스 법'이다. 평민이 집정관에 입후보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

 

로마는 야만족의 침입으로 무너진 자존심을 정치 제도의 개혁을 통해 보란 듯이 일으켜 세웠다. 이것이 바로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로마인의 저력이다. 이제 귀족과 평민은 국정의 동반자로서 손을 잡고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 주변의 국가들을 하나하나 굴복시키며 로마제국을 건설해나가는 일만 남았다. 단합된 로마의 힘 앞에 대적할 적이 없기 때문이다.

 

 

로마를 침략한 한니발 장군

 

로마 공화정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라고도 부른다. 역설적으로 전쟁이 없었다면 로마 역사도 세계적으로 조명 받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을 끝내려면 평화를 선언해야 한다. 이 평화는 로마가 더 이상 넓힐 영토가 없다는 확신이 있어야 가능했다. 로마 공화정은 전쟁을 통해 고도성장을 계속해나갔으니, 전쟁은 로마의 성장 엔진이었던 셈이다.

 

기원전 270년에 반도를 통일한 로마는 지중해로 발길을 돌려 당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와 운명의 일전을 치루게 된다. 본디 로마와 카르타고는 평화협정을 맺은 관계였다. 하지만 로마는 반도를 벗어나 팽창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 협정을 깨고 숙명의 라이벌전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1차 포에니전쟁은 시칠리아의 영토와 제해권制海權을 수호하고자 시칠리아 섬에서 일어났는데 카르타고가 패함으로써 시칠리아를 로마에 빼앗기고 만다. 2차전은 한니발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미 어릴 적부터 장군인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누비며 로마를 무너뜨리겠다고 포부를 세운 인물이었다. 그는 치밀하게 준비해서 로마인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유린했다. 코끼리를 이끌고 눈 덮힌 알프스 산맥을 넘어 공격해 들어왔던 것이다.

 

 

패자까지 포용하는 개방성

 

로마의 개방성은 건국 초기부터 역사와 함께 발전해왔다. 사비니족 여인의 강탈 사건을 계기로 사비니족과의 합병을 감행했고 이후 공동 통치에 나섰다. 또 전쟁에 패한 알바롱가의 모든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켜 똑같이 로마 시민으로 만들었다. 즉 무력으로 흡수했을지라도 그들에게 시민권을 인정해 동화同化의 길을 걷게 만들었다. 

 

로마인은 기원전에 2중 국적을 허용한 글로벌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는 사회, 문화적으로도 개방적이었다. 종교에도 다양성을 인정했다. 자신들의 언어인 라틴어만을 고집하지도 않았다. 점령지의 문화라도 유용하다면 수용해서 로마화했다. 개방성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았고, 여기서 유연성, 포용성, 다양성이 비롯되었다. 

 

 

학습하고 벤치마킹을 하다

 

그리스인보다 지성적으로 열등하고, 체력적으로는 켈트족이나 게르만족보다 못하고, 기술적으로는 에트루리아인에게 밀리고, 경제력은 카르타고에 딸린다고 인정할 만큼 열등감의 화신이었던 로마가 최후의 승자가 되어 지중해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에 관해 시오노 나나미는 "부족한 지성을 벤치마킹으로 배웠고, 부족한 체력은 끊임없는 훈련으로 보완했고, 기술력은 기술자를 포용하여 보완했고, 경제력은 시장 원리를 받아들여 극복했다"고 설명한다.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와 맥을 같이 하는 셈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을 세우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의미한다. 공화정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은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후임 황제와 유력자들에게도 계승되어 로마 지도자의 훌륭한 덕목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재산의 사회 환원을 국가 정책으로 만들어 솔선수범했고 유력자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사재를 내놓아 공공건물을 건설하여 희사한 리더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무엇이었을까? 건물 명칭에 가문의 이름을 새기거나 송덕비에 이름을 남기는 게 전부였다.

 

지도층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통해 솔선수범하고 시민들에게 신뢰를 주었기에 로마 시민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었다. 

 

 

<갈리아 전쟁기>, 지식경영의 모델

 

카이사르는 현재의 서유럽에 해당하는 갈리아에서 기원전 58년부터 51년까지 8년 동안 전쟁을 수행했다. 그는 첫해부터 <갈리아 전쟁기>를 직접 기록, 매년 본국에 보냈다. 일종의 출장보고서였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는 7권을 모아 한 번에 발간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와 정복 상황, 군사적 전략과 기술에 얽힌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적었다. 이 책은 최고의 전쟁 회고록이고, 보고문학의 백미이며, 라틴 문학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기록을 통해 암묵지를 명백지로 만든 지식경영의 모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태양력 달력을 만들다

 

기존에 사용했던 태음력은 1년이 355일로 달력상의 계절과 실제 계절 사이에 차이가 났다. 카이사르는 이런 불편을 극복하고자 정확한 달력을 만들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이집트의 천문학자와 그리스인 수학자에게 이를 맡겼다. 로마에 온 과학자들은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을 365일 6시간으로 계산해냈다.

 

이렇게 해서 365일은 1년이 되고, 1년은 열두 달로 나뉘었다. 1년마다 생기는 오차는 4년에 한 번씩 하루를 더하는 방식으로 윤년을 만들어 2월이 29일이 되도록 했다. 마침내 기원전 45년, 태양력이 탄생했다. 이 태양력은 카이사르의 이름을 따서 율리우스력曆이라고 불렸다.

 

 

철저한 목표관리

 

기원전 29년 8월, 14년 간의 권력투쟁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서 사흘 동안 웅장하고 화려한 개선식을 거행했다. 개선식이 끝나자 현실적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1. 야만족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하는 안전 보장의 문제

2. 50만 명의 군대를 적절한 수준으로 감축하는 문제

3. 정치체제와 행정개혁을 단행하는 문제

 

옥타비아누스는 산적한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갔을까? MBO(Management by objective), 즉 목표 관리였다. MBO는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말한다. 오늘날 경영에서 중시하는 MBO의 원조가 바로 옥타비아누스라고 할 수 있다.

 

 

권한위임의 달인, 아우구스투스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는 두 명의 핵심 인물이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분신이라 불리는 아그리파와 외교 및 문화 홍보를 담당한 마이케나스다. 아우구스투스는 전쟁터는 아그리파에게 맡기고, 외교는 마이케나스에게 위임했다. 오늘날 기업이 문화예술 활동에 자금이나 시설을 지원하는 활동을 '메세나 운동'이라고 하는데, 메세나는 마이케나스의 프랑스식 발음으로, 메세나 운동의 시조다. 1967년 미국에서 기업예술후원회가 발족하면서 이 용어를 처음 쓴 이후, 메세나는 기업인들의 각종 지원 및 후원 활동을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왜 로마인의 후예인가?

 

오늘날의 서유럽은 로마를 바탕으로 각자 독립국을 건설했다. 미국은 유럽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이룩한 나라로, 미국의 건국자들은 로마 공화정을 모델로 미국의 정치체제를 구상했다. 미국은 국회의사당을 로마식으로 건설했다. 국회의사당을 U.S. Capital이라고 하는데 Capital은 바로 로마의 중심지인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따온 것이다. 미국의 상원의원도 로마의 원로원을 뜻하는 Senatus에서 유래했다. 또한 달력에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이 남아서 오늘날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그래서 몽테스키외는 "아무도 로마인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강조했다.('우리는 왜 로마인의 후예인가?' 중에서)

 

 

카이사르처럼 창업하고, 아우구스투스처럼 승계하라

 

"창업과 승계의 가장 성공적인 모델", 로마제국의 창업자 카이사르와 승계자 아우구스투스의 관계를 말한다. 흔히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렵다고 말한다. 창업자가 이룩한 것을 승계자가 지키고 발전시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창업형 리더십, 아우구스투스는 승계형 리더십을 발휘하여 로마제국을 궤도 위에 올려놓았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절묘한 보완 관계에 있다. 성장과 안정, 진보와 보수, 외향성과 내향성, 창업과 승계의 조화를 통해 자신들의 약점과 한계를 극복하고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이 책을 경영인보다는 오히려 정치인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든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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