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위대한 이들은 어떻게 배를 타고 유람하는가
멜라니 사들레르 지음, 백선희 옮김 / 무소의뿔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역사란 이야기다. 한 편의, 끝나지 않은, 긴 이야기다. 얘기되지 못한 사건들과 여담들, 실현되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들이 여러 갈래로 끝없이 뻗어나가는 미로 같은 이야기다. 역사의 빈틈과 불가사의, 비밀과 아쉬움은 우리의 상상을 근질여 무수한 이야기들을 낳는다. 여기, 역사의 미로 속에서 도무지 만날 일이 없어 보이는 두 제국을 잇는 샛길을 찾아낸 이야기가 있다. - '역사를 발칵 뒤집은 발칙한 상상' 중에서

 

 

흥미진진한 역사 여행 이야기

 

저자 멜라니 사들레르는 스물일곱 살에 이 소설로 프랑스 문단에 눈부시게 등장했다. 그녀는 아르헨티나 역사를 전공하며 박사과정울 밟던 중 논문으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자 터키로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톱카피 궁을 방문하려고 대기하다가 문득 아즈텍의 멸망 시기와 오스만의 전성기가 겹친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3주 만에 이 소설을 완성했다.

 

몰락해버린 신대륙의 아즈텍 제국, 대서양을 건너 사막을 지나서 다시 지중해를 건너야 닿을 수 있는 구대륙의 오스만 제국을 연경하는 이야기이기에 저자의 기상천외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하겠다. 황금의 제국 아즈텍은 유럽의 정복자들에게 수탈당했다. 반면 오스만은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에 빠뜨렸던 제국이다. 각기 다른 문명을 꽃피우고 전혀 다른 운명을 산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과 오스만의 수도 이스탄불의 만남은 우리들의 상상 그 이상임에 틀림없다. 

 

한편 21세기를 사는 두 인물, 보르헤스 교수와 하칸 교수가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탐색을 이어가고, 다른 한편에선 16세기 이스탄불의 하렘에서 록셀라나가 술탄 술레이만의 마음을 정복하기 위해 미묘한 심리 싸움을 펼친다. 그리고 정복자 코르테스와 그의 애인 말린체, 아즈텍의 황제 목테수마와 쿠아우테모크가 등장하면서 점차 16세기 신대륙의 테노치티틀란에서 벌어진 일이 밝혀진다. 그 밖에도 콜럼버스, 카를 5세, 프랑수아 1세, 하이르 알 딘 바르바로사 등 다양한 역사 속 인물들도 불려 나와 이야기를 풍성하게 채운다. 이렇듯 비밀스럽고 해박하고 익살스럽고 시끌벅적한 이 이야기는 소설가 보르헤스를, 움베르토 에코를, 프랑수아 라블레를 연상시킨다.

미로의 출구를 찾게 될지 알지 못한 채 이야기를 좇다 보면 수수께끼가 풀리고, 놀라운 결말이 독자를 기다린다. 기발한 상상과 역사적 사실을 교묘하게 엮어낸 독창적인 플롯이 돋보이며, 가벼우면서도 밀도 높고 유쾌하면서 신랄한 문체도 단연 빛난다. 공식적인 역사를 발칵 뒤집는 발칙한 상상은 신대륙을 무참하게 유린한 오만과 탐욕의 역사에 대한 일종의 복수처럼 읽힌다. 또한 노예처럼 팔려 다니다 정복자 코르테스의 통역이자 애인이 되어 아즈텍 제국의 배신자로 간주되는 말린체와, 술탄의 하렘에 끌려와 명민하게 자유와 권력을 쟁취해내는 록셀라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의 중심에 배치한 것은 짓밟히고 유린당한 모든 약자들의 통쾌한 설욕으로도 읽힌다. 아니면 그저 배를 타고 16세기 테노치티틀란으로, 이스탄불로 떠나는 흥미진진한 여행처럼 읽어도 좋을 유쾌한 이야기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사람들의 기억력은 갈수록 감퇴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의 명예교수인 하비레르 레오나르도 보르헤스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그의 좌우명은 '많이 읽고, 중요한 것은 잊는다'일 정도로 기억력에 자주 문제가 생기곤 하기 때문이다. 그는 40년간 아즈텍에 관해서 연구해왔다.

 

한편 대학교의 총장은 역사학과의 참담한 중간고사 결과에 놀라 전문가에게 아즈텍 제국의 몰락에 대한 수업을 요청하기 이르렀다. 이에 보르헤스는 총장의 요청을 받고 미어터지는 대강의실에 들어서면서 짧은 순간 검투사가 된 기분이었다. 그 짧은 순간 그는 정신을 차리고 더없이 맹렬한 욕망을 다스렸다. 그 난국에서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고 싶은 욕망이었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청중들에게 아즈텍 문명의 종말에 관해 더없이 간략한 강연을 시작했다. 

보르헤스는 코르테스의 동료였던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의 연대기를 달달 외울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말린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도냐 마리나는 파이날라 추장의 딸, 즉 공주의 신분이었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아버지가 죽자 재혼한 어머니에 의해 내침을 당햇고, 여러 사람의 손에 노예로 매매되다가 정복자 코르테스에게 인도되었다. 그녀는 노예이면서 두 번이나 왕녀였다.

 

말린체는 코르테스를 미련한 허영심에 빠지도록 내버려두고 있었지만 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즈텍 제국의 마지막 황제 쿠아우테모크는 죽지 않았고, 코르테스가 고문한 용감한 남자는 쿠아우테모크가 아니었던 것이다. 보르헤스의 이 직감은 시시각각 커져갔다. 필사본 하나하나가, 단어 하나하나가 그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이후 그는 친구이자 동료인 하칸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가설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16세기의 터키 역사가들이 신세계에 관심을 가졌었는지도 알고 싶어했다. 살짝 정신 나간 탐험가들이 그 옛날 인도 길을 편력한 뒤 다시 비단길로 떠나 이스탄불에 들렀다가 정체를 숨긴 어떤 인물들에 관한 소식을 가져온 건 없었는지 알고 싶어했다. 마르코 폴로처럼 어떤 잊힌 인물이 아즈텍 황제들의 온갖 비밀과 계략을 털어놓은 <서인도 견문록>을 쓴 적은 없는지 알고 싶어했다.

 

하칸은 루사르 첼릭의 조카인 메흐메트로부터 에스파냐어로 적힌 누런 종이 몇 장을 건네받았다. 사마리아 구역에서 생선장수를 하는 메흐메트는 루사르 첼릭이 후손 없이 죽자 남은 재산을 모두 상속받았던 것이다. 하칸은 자신이 루사르 첼릭 교수의 학문적 아들이자 후계자로 지목되었음을 밝혔기에 메흐메트는 그 유품을 좋은 데 사용하라고 당부했다.

 

하칸은 연금술사처럼 문장의 재료를 해체했고, 구성 성분들을 시험관에 분리해놓고 다르게 조합했다. 그리고 작동 방식을, 문장들을, 말들을, 글자들을 뒤집었다. 어원들을, 의미들을 탐구했다. 터키어로, 그리고 에스파냐어로. 그렇게 그는 말의 배치표와 대조표를 만들고 과감히 생략하기도 했다. 만화경의 마법도 사용했다.

 

뜻밖에도 코르테스의 편지들 중 코르테스의 애인인 말린체가 쓴 내용에는 쿠아우테모크를 언급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편지 종이는 너무도 체계적으로 훼손되어 있었다. 하칸은 의도적인 훼손을 의심했다. 서명 뒤에 두 줄의 추신이 있었다. 두 번째 줄의 글씨는 서툴럿다. 다른 손에 의한 것이 분명했다. 루사르 첼릭 교수가 남긴 게 분명했다.

 

나는 이 편지에서 성스런 우리 국가에 해가 될 수 있는 부분을 지우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을 역사에서 지울 수는 없었다. 더구나 내게는 결코 그럴 권리가 없다. 내 뒤로 이 자료를 발견하게 될 사람은 새로운 판관이 되어 자기 행위의 주인이 될 것이다.(중략) 간단하게 암호화한 몇 마디를 이 편지 뭉치에 열쇠로 남겨둔다.

 

역사가 언제나 반복된다는 건 누구나 안다. 그 영원한 회귀를 정확히 해석해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낯선 무리가 테노치티틀란의 문 앞까지 와 있다는 소문이 떠돌자 목테수마는 아즈텍 달력이 예고한 케찰코아틀 신이 돌아온 것이라 믿었다. 쿠아우테모크의 옷을 걸치고 죽을 때가지 싸우게 될 마니카텍스는 야만인들의 침략 주기가 반복된다는 것을 알았다. 콜럼버스가 돌아온 것이다.

 

 

 

 

저는 대양을 건넜습니다.
어마어마한 대양을 건넜습니다.
보아하니 동쪽에 위치한
다른 땅에서 온 사람들이 건너왔다는 대양입니다.
저는 그 길을 거꾸로 거슬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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