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열풍의 진앙지 일본 가와치 河內 일본에 남은 문화강국 백제의 발자취 1
양기석.노중국 외 지음 / 주류성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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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나라와 일본의 주목할 만한 고고학적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고대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허브 역할을 했던 백제의 실체가 새롭게 드러나고 있다. 백제는 중국 남북조의 선진문화를 되새김해 신라와 가야는 물론 고대 일본의 아스카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백제는 한반도 항쟁의 역사에서 막강한 고구려에 필적할 수 있는 중심 세력이었고, 국제교류를 활발히 하여 동아시아에서 해상 강국, 문화 강국을 지향하던 큰 나라였던 것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일본 속의 백제 문화를 찾아 떠나다

 

이 책은 양기석, 노중국, 정재윤 교수 등 국내 백제학의 최고 권위자들이 일본 현지를 방문해서 직접 보고 느낀 사실들을 역사적 자료, 유적, 유물 등과 함께 소개하는 백제학의 새로운 이정표이자, 지금까지 일본 도처에 남아있는 백제의 실체를 규명하는 역사서술 방식의 새로운 시도이며 결과물이다.

 

공저자들은 백제의 개방성과 국제성을 강조하면서 백제는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그들의 문화 수준을 높임과 동시에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로까지 발전시켰다고 말한다. 나아가 이런 문화를 움켜쥐고 있는 폐쇄성에서 벗어나 주변의 여러 나라에 이를 전파해 주는 '문화외교'를 펼쳤음에 주목한다.

 

일본 땅에는 백제 문화의 흔적들이 많이 남겨져 잇다. 특히, 오사카 지역은 일본의 고대 시절 '가와치河內'라고 불리던 곳으로 백제와 깊은 연관을 가진 유적이나 설화 등이 많이 남아 있다. 가와치 지역은 서쪽으로 오사카만에 접해 있어서 해상 교통의 관문인 셈이었다. 또 이 지역에는 나라분지에 못지 않는 대규모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조성되어 있다.

 

따라서, 가와치 지역에 대한 이해는 일본 고대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자 토대이며, 이 지역에서 확인되는 고고학적 유적과 유물은 고대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서 이루어진 문화 교류의 모습을 짐작케하는 중요한 자료이며, 동시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왜인渡倭人들의 활동상과 삶의 모습도 살펴볼 수 있는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공주, 부여, 익산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세계유산으로 등재 결정되었다. 이렇게 백제의 역사유적지구가 세계유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백제거 고대 동아시아에서 인류 보편적 가치 교류의 핵심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이런 교류의 모습은 바로 가와치 지역 곳곳에 그 숨결이 아직도 살아있다.

 

백제는 역사적으로 왜국과 깊은 우호관계를 가졌다. 고구려, 백제, 신라 3국간의 항쟁 과정에서 백제는 정치적으로 고구려나 신라를 견제하는데 왜국을 우군으로 활용하였고, 반면 왜국은 백제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고대국가의 제대로 된 모습를 만드는데 적극 활용해 나갔다.

 

지금도 일본의 오사카 지역에 가면 '백제천百濟川', '백제촌百濟村', '백제역百濟驛' 등 백제 사람들이 남긴 역사적 흔적과 숨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고대 일본은 백제와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고대국가 수립과 고대 문화를 형성하는데 큰 토대가 되었다. 백제가 일본열도에 마한계 토기류를 비롯하여 백제계 기와와 전돌, 부뚜막시설, 대벽건물, 장식대도,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등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위세품이나 장례용 의례품에서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물을 전해 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문물 이외에도 토목, 건축, 불교, 도교, 율령, 정치제도, 문자생활과 유교적 교양 및 예술 등 각종 선진기술과 고급의 정신문화를 일본열도에 전해주었다. 고대 일본에 있어서 백제에서 건너온 여러 가지의 새로운 기술과 문화의 수용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고, 일본 내의 사회적, 문화적 측면에서 가히 혁명적이라 불릴 만큼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오사카 지역에 백제 도왜인들이 정착하다

 

긴키近畿 지역은 일본열도 4개 섬 중의 하나인 혼슈의 중심지로서 오늘날 오사카, 교토, 나라, 와카야마, 이세, 나고야, 고베 지역을 통칭하여 부르는 곳이다. 이곳은 서쪽으로 태평양과 접해 있으며, 세토 내해를 통해서 고대 중국과 한반도의 문화가 북큐슈 지역을 경유하여 전파된 일본 고대문화의 중심지이다. 이곳에는 야마토(大和), 셋츠(攝津), 야마시로(山城), 가와치(河內), 이즈미(和泉) 등의 고대 지역 정치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지역 정치체들 중에는 나라분지에 위치한 야마토 정권이 가장 세력이 강해 후에 일본열도를 통합해 간 중심세력이었다.

 

 오른 쪽에 고대 긴키 지역을 나타내는 그림이 보인다

 

그 가운데 백제 도왜인들이 개척하여 5세기의 기술혁명을 만개한 곳은 오사카 남부 연안의 가와치 지역이다. 이곳은 세토 내해를 통해 오사카에 진입하는 해로 교통상의 요지이자 기나이畿內 세력의 중심지였던 야마토 조정의 관문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이곳은 그 북부에서 흘러드는 하천인 요도가와淀川와 야마토가와大和川 등이 오사카만에 유입되면서 그 주변 하구에 가와치 호수가 형성되어 있었고, 그 주위에 광대한 충적 저습지가 펼쳐져 있었다.

 

5세기 중반 이후 백제 도왜인들이 이곳 가와치 지역에 정착하면서 요도가와 평야와 그 주변의 저습지 일대를 대대적으로 개발하고 나섰다. 하천의 제방을 쌓아 물의 흐름을 조절하고 배후지를 논으로 개발하였다. 이 개척사업에는 백제에서 가지고 온 새로운 토목, 관개기술과 도구 및 많은 노동력을 투하하여 새로운 경제 기반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로서 가와치 지역의 농업생산력은 급속히 향상되었으며, 주민들의 정착성도 또한 높아지게 되었다. 이처럼 백제 도왜인들이 가져온 새로운 생산기술과 문화는 고대 일본 사회에 일대 혁신을 가져올 정도로 획기적인 충격이었다.

 

 

백제 도왜인들이 남긴 역사의 흔적들

 

현재 일본열도 곳곳에 가면 백제인들이 남긴 역사의 흔적들을 쉽게 찾을수 있다. 큐슈 지역을 비롯하여 동북 지역에 이르기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지만 특히 오사카 지역을 포함한 긴키 지역은 큐슈 지역과 함께 백제유적과 유물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다.

 

오사카와 그 주변 지역에는 백제 도왜인들이 널리 분포하고 있었던 사실을 입증해 주는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가와치와 그 주변의 이즈미和泉, 야마토大和 등지에는 수에무라陶邑 유적, 모즈후루이치百舌鳥 고분군, 오가타大縣 유적, 와키다脇田 유적, 시토미야기타 유적, 이치스카一須賀 유적, 난고南鄕 유적 등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 가운데 오사카 남동부의 하비키노시(羽曳野市)에 곤지를 모신 아스카베 신사(飛鳥戶神社)가 있으며, 그 주변의 구릉에는 아스카베센즈카(飛鳥千塚)라는 백 여기의 고분군이 존재한다. 곤지는 백제의 개로왕과 문주왕의 동생으로 가와치 지역에 16년 동안 머무르면서 백제 도왜인들을 조직화하여 왜 정권이 친백제 노선을 유지하도록 돕는 역할을 수행한 왕족이었다.

 

그리고 하비키노시의 외곽을 흐르는 개천을 건너면 다카이다야마高井田山 횡혈식고분이 있다. 이 고분은 기나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횡혈식고분으로 알려져 있다. 새로운 횡혈식석실분의 채용은 백제 도왜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곧 일본 전통의 장송 관념을 뒤바꾸는 왜 사회 자체에 일대 변혁을 일으키게 하였다.

 

여기서 출토된 청동다리미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비교하면 그 크기나 형태 등에서 놀랄 만큼 유사하여 묻힌 사람을 인근 오가타유적에 거주한 백제계 기술자 도왜인들을 통솔한 백제 왕족급 인물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의 경질토기인 스에키須惠器는 5세기 중반 경부터 기나이 지방에서 생산을 시작하였는데, 오사카의 수에무라 유적에서 그 생산이 개시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의 발달된 금속공예 기술도 이 지역에 전해졌다. 기나이지역에서 발견되는 5~6세기 금속공예품으로는 귀걸이, 허리띠, 금동제 관모, 금동제 신발, 장식대도 등이 있다. 그밖에 기와 제작술과 생활유적인 대벽건물 등의 물질문화도 백제 도왜인들의 기나이 지역 정착과 함께 등장하고 있어 의식주를 포함한 왜의 생활문화 향상에 큰 변혁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대 일본 왕국은 백제의 또 다른 왕국(?)

 

소설가 최인호는 이미 일본을 잃어버린 왕국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백제의 후손들이 고대 일본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720년에 만들어진 <일본서기日本書記>에는 한국과 관련한 많은 내용들이 나타난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기록되지 않은 내용, 특히 백제와 관련된 기사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수많은 사학자들이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처럼, 일본의 고대 천황체제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고대 한일 관계를 왜곡하고 윤색한 케이스가 많다. 말하자면 역사의 진실을 조작한 것이다. 국내에는 한 달에 두번 모이는 "일본서기 윤독회"가 있다. 여기에는 문헌을 중심으로 백제사를 연구하는 교수들, 고고학 자료를 중심으로 백제사를 연구하는 연구자, 대학원 석박사 과정생, 대학생 등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의 활동이 양국의 역사 갈등을 상당 부분 해소할 것으로 기대해 본다.  

 

 

 

 

일본학계에서는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왔다는 의미로 '도래인'이라는 표현을 하지만 한국 사학계에선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의미에서 '도왜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일본으로 건너갔을까? 건너간 사유는 다양하다. 정치적 이유, 경제적 이유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중에서 우리의 역사서에도 그 이름이 있으면서 일본 현지에도 관련 유적이 있는 인물로 의자왕의 아들 선광의 후손인 백제왕 경복과 그가 세운 백제사百濟寺, 개로왕의 동생으로 왜에 사신으로 갔다가 문주왕 시대에 귀국해 활동하다 죽은 곤지와 그를 모신 아스카베 신사, 그리고 왜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준 왕인과 그의 묘 유적 등을 대표적으로 손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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