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마천 사기56 - 본기, 세가, 열전, 서의 명편들 ㅣ 현대지성 클래식 9
사마천 지음, 소준섭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7월
평점 :
<사기>는 사마천이라는
작가의 이른바 '복안複眼'에 의하여 기술된 작품이다. 사마천은 결코 어떠한 인물이나 사건을 일면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항상 다면적으로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해석하였다. 그리하여 역경에 처해 좌절하고 실의에 빠져 있는 사람은 <사기>를 통하여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얻을 수 있고, 영광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사기>를 통하여 그 영광을 지키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치세의 도리道理를 터득할 수 있고, 경제를 하는 사람은 경제의 원리를 장악할 수 있다. 또한 불우한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 <사기>는
재기할 수 있는 용기를 줄 것이며, 인생의 처세를 알고자 하는 이에게는 험난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유 방식에 대해 귀띔해 줄 것이다. -
'역자 서문' 중에서
<사기>의 핵심 56편을
만난다
편역자
소준섭은 현재 국회도서관 중국 담당 조사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중국 전문가로, <십팔사략>의 편역을 통해
고전 번역의 정확성과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사기> 전체 130편을 다 읽기에는 지나치게 방대하고 또 현대에 이르러 효용성이 없는
부분도 적지 않은 점에 비추어 이 책은 사기의 정수를 계승하되 뜻이 깊고 문장 구성이 탁월한 56편을 직접 엄선하여 한 권에
담았다.
사마천의 <사기>는 '본기本紀'와 '세가世家', '표表', '서書', 그리고 '열전列傳' 등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기本紀'는 연대순으로 제왕의 언행과 업적을 기술하고 있고, '세가世家'는 제후국의 흥망성쇠와 영웅들의 업적을 기술하였으며,
'표表'는 연대별로 각 시기의 중대 사건을 기록하였고, '서書'는 각종 제도의 연혁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열전列傳'은 다양한 대표적 인물들의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사마천은 창조적으로 이 다섯 가지 부분을 종합하여 하나의 완전한 통일 체계를
완성시켰다.
<사기>에는 다양한 유형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사마천은 기존의 역사기재 방식에 구속되지 않고 역사에 대한 관점과 인식태도로써 사실적으로 기록하여 인물의 전모를 객관적으로
반영했다. 한 인물의 삶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때 그 '사람됨'을 중시하였으며, 동시애 그 사람됨의 복잡성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인물을 묘사할
때 자신의 관점을 드러냈으며, 동시에 그 인물에 대한 자신의 애증을 표현하였다. 특히, 그는 몸소 체험하거나 교류를 통해 알아낸 사실과 현지
조사를 통해 내용의 진실성을 높였다.
"사마천의 <사기>는 사가지절창史家之絶唱이다"
- 노신
이 책은 <사기> 전체
130편 중 문장이 탁월한 56편을 추린 것이다. 즉 본기에서 진시황 본기, 항우 본기, 여태후 본기 등 5편을, 세가에서 와신상담, 강태공,
초나라 장왕, 공자 세가 등 14편을, 열전에서 백이, 안영, 손자, 소진, 맹상군, 평원군, 춘신군, 범저, 염파, 인상여, 회음후, 유협,
화식 등 37편을 소개하고 있다.
결국 죽음을 피하지
못한 진시황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강력한
추진력으로 역사상 가장 거대한 통일 국가를 이룩하였으니 실로 대단한 업적임에 틀림없다. 진시황의 의욕은 하루에 약 30kg에 달하는 서류를
결재하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을 정도였고, 전국 시찰만 해도 통일 후 다섯 차례나 강행군했던 인물이다.
시황제의 마지막 시찰에는 승상 이사,
환관 조고가 수행했는데, 조고가 옥새를 관라하는 일을 겸하고 있었다. 20여 명의 아들 중 장남 부소는 멀리 북쪽 변경 지방의 군대를 감독하고
있었다. 시황제는 작은 아들 호해를 귀여워해 이번 시찰에도 아들 중 유일하게 동행시키고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자 황제는 조고를
시켜 장남 부소에게 편지를 써보내도록 했다.
"군대는 몽염에게 맡기고 함양으로 돌아와 함양에 나를 안장하라!"
편지는 봉해져 있었지만 사자를
보내기도 전에 황제는 죽고 말았다. 황제의 죽음은 비밀에 부쳐지고 오직 이사, 호해, 조고만이 아는 사실이 되고 말았다. 시신은 온량거에 안치된
채 시찰이 계속되었다. 평상시처럼 정사가 진행되었고, 황제의 수라상도 올려졌다. 이 모든 조작과 은폐는 환관 조고의 기획이었다. 조고는 몰래
호해에게 형옥법률을 가르치며 친목을 두텁게 만들었기에 호해를 새로운 황제로 만들려는 음모를 꾸며 장남 부소를 죽이고 마침내 2대 황제로 호해를
등극시킨다. 이후 눈에 가시 같았던 이사마저 제거하고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성어를 탄생시킬 정도로 실질적인
권력을 손에 쥔 조고는 아방궁 건설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다가 반란에 직면, 패망의 길로 접어든다.
고통은 함께할 수
있으나 기쁨은 함께 나눌 수 없다
범려는
구천을 도와 22년 만에 마침내 와신상담의 숙적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이후 구천은
범려를 상장군上將軍이라는 최고 벼슬을 내렸다. 하지만 범려는 이 벼슬을 사양했다. 왜 그랬을까? 그는 '이미 목적을 달성한 군주 곁에 오래 있는
것은 위험하며, 구천은 고생을 함께 나눌 수는 있어도 편안함을 함께 나누지는 못할 인물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회계산에서 왕께서
치욕을 당하시는 것을 보면서도 생명을 이어온 것은 오직 오나라에 복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이뤄진 지금, 마땅히 그 죄를 받겠습니다'라는
편지를 구천에게 보냈다. 편지를 받은 구천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그대를 죽여서라도 듣게 하겠다'라며 사자를 보내 자신의 의견을 보냈다. 과연
범려는 어떤 행동을 했을까?
그는 가벼운 가재도구와 보석을 배에
싣고 떠나버렸다. 제나라로 간 범려는 대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하늘을 나는 새가 없어지면 활을 없애고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참혹하게 죽인다고
합니다. 구천은 목이 길며 입이 검습니다. 좋지 못한 관상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고생은 같이 해도 기쁨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대부께서는
왜 물러나지 않으십니까?' 이후 대부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병을 핑케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어느 날 대부가 반란을 꾀한다는 고발이
접수되고, 대부는 결국 구천이 내린 칼로 자결하고 만다.
교묘한 용병술의
냉혈한, 오기吳起
오기는 위나라 사람으로 용병용병에
능했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에게서 학문을 배운 적도 있고 그 후 노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다. 이 무렵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자 노나라를 오기를
장군으로 삼으려했다. 하지만 오기의 아내가 제나라 사람이라는 이유로 노나라는 아직 그를 신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오기는 아내를 살해하고
자신의 결백을 내보이고 결국 장군으로 임명된다. 그는 제나라와 싸워 크게 이겼다.
노나라는 유학자들이 많았기 대문에
오기에 대한 인격적인 평판이 매우 나빴다. 오기의 집안은 부자엿는데 그의 낭비벽으로 인해 집안이 망했고, 고향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자 이에
원한을 품고 삼십여 명을 죽이고 위나라를 탈출해 타국으로 도망쳣다. 이후 그는 증자의 제자가 되었는데, 어머니가 죽었음에도 끝내 고향땅으로 가지
않았다. 그러자 증자는 불효자라는 이유로 그를 파문시켰다.
노나라 왕이 오기를 해임하자 그는
위나라 왕을 알현하고 함께 일해 보고 싶다고 청원했다. 재상 이극이 "탐욕스럽고 호색가이지만 용병의 교묘함은 사마양저도 따를 수 없다"고
인물평을 하자 위나라 왕은 결국 그를 장군으로 임명했다. 오기는 항상 가장 낮은 병사와 동일한 옷을 입고 동일한 음식을 먹었다. 심지어 행군을
할때도 마차를 타지 않으면서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어느 날 병사 한 명이 종기 때문에
괴로워하자, 그는 병사의 고름을 직접 입으로 빨아내었다. 이런 얘기를 들은 병사의 어머니는 대성통곡을 했다. 이 병사의 아버지도 오기 장군이
고름을 빨아 주자 은혜에 보답한다고 끝까지 싸우다 죽었는데, 또 아들의 운명이 이러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울었던
것이다.
병법가와 장군으로서의 오기는 실로
뛰어난 인물이다. <오자>라는 책에 의하면, 오기가 위나라에 있을 때 76회의 전쟁을 했는데 이중 68회는 이기고 나머지 8회는
무승부하고 기록되어 있다. 군대 통솔력이 뛰어난 그였지만 군주를 보필하는 능력과 인간관계는 많이 부족했다. 나중에 그는 손빈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탐욕은 결국 화를 초래한다
56편의 내용 중 3편을 소개했다.
중국 최초로 통일 제국을 건설한 진시황도 강력한 통치술을 바탕으로 대내외적으로 국위를 떨쳤지만 결국 탐욕으로 인해 민심을 잃었기에 망국의 토대를
만들고 말았고, 자신의 분수를 미리 깨닫고 재빨리 구천과 이별을 택한 범려는 명예로운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반면 자신의 직위에 미련을 갖고
결단을 내리지 못했던 대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자살하고 만다. 또 뛰어난 용병술의 대가이면서도 그저 병사를 이용 도구 정도로 여기고 진정성
없는 꼼수로 대응했던 오기의 죽음도 씁쓸한 마음이 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