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재판소 - 30년 경력 판사, 일본 사법계에 칼을 겨누다!
세기 히로시 지음, 박현석 옮김 / 사과나무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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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심리가 진행된 단계에서 재판관은 당신에게 피고와의 ‘화해’를 강하게 권할 것이다. 화해에 응하지 않으면 불리한 판결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둥, 재판에서 이겨도 상대방으로부터 금전을 받기 어려우니 승소 판결을 받아도 의미 없다는 둥의 설명과 설득을 상대방도 없는 밀실에서 장황하게 듣게 될 것이다. 또한 재판관이 상대방에게 어떤 설명을 하고 있는지, 상대방이 재판관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어쩌면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을 헐뜯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것들을 당신은 알 길이 없다. 당신은 불안해진다. 그리고 '나는 재판소에 시비를 가려달라고 온 건데 왜 이렇게 '화해'하라는 설득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들어야만 하는 걸까? 마치 판결을 요구하는 것이 나쁜 일인 양 말하다니, 전혀 뜻밖이야…'라는 작은 의문이 당신의 마음속에서 솟아오른다. - '머리말' 중에서

 

 

일본 사법부의 실상을 폭로하다

 

2014년 일본에서 출간되자마자 사법계를 발칵 뒤집어놓고, 국민들을 열광케 했던 이 책의 저자 세기 히로시는 도쿄대학 법학부에 재학중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최고재판소 조사관, 사무총국(한국의 법원행정처) 등을 거친 엘리트 판사 출신이다. 스스로 좌파도 우익도 아니며, 자유주의자일 뿐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 그는 2012년 메이지대학 교수가 되기 전까지 33년 동안 자신이 몸담았던 재판소를 떠나 지금껏 드러나지 않았던 일본 사법부의 치부를 이 책을 통해 낱낱이 밝히고 있다.

 

1950년에 나고야에서 출생한 그는 대학교 재학 중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79년부터 법관으로 도쿄지방재판소와 최고재판소에서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연구와 병행하면서 책을 집필하고 학회에 보고서를 발표해왔으며, 2012년부터는 메이지대학 법과대학원 전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절망의 재판소>, <일본의 재판> 외 여러 권이 있으며, 세키네 마키히코라는 필명으로 <대화로서의 독서> 등을 출간했다. 자연과학, 인문사회과학, 문학, 음악, 영화 등에 대해 넓고 깊은 지식을 갖추고 있는 그는 이 책에서 '리버럴아츠'를 배우는 법

 

저자가 밝히는 충격적인 사실 하나는 대다수의 재판관에게 있어서 일반 시민인 소송 당사자는 소송 기록이나 소송을 위한 메모의 한쪽 구석에 적힌 하나의 '기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당사자의 기쁨이나 슬픔은 물론, 그들에게 있어서는 절실한 문제인 '운명'조차도 재판관들에게는 어찌되든 상관없는 일이다. 오직 재판관의 관심은 '사건처리'에만 집중되어 있다. 어쨌든 빨리, 요령껏 사건을 처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재판관이 거듭 화해를 강요하는 이유도 오직 사건을 '처리'해 버리고 싶기 때문이다. 화해를 강요하는 또 다른 이유는 판결문을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려운 판단을 회피하려는 경우는 그나마 낫고, 판결문을 쓰는 것 자체가 귀찮고 소송기록을 꼼꼼히 읽기 싫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판결문의 기본조차 쓰지 못하는 재판관이 부지기수라고 개탄한다.

 

 

 

 

 

 

 

 

 

 

 

 

 

지난 8월 8일 해임이 확정된 진경준 검사장의 불투명한 재산축적 과정이 한동안 직장인들의 화제거리였다. 넥슨 회장으로부터 주식 등 9억여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된 그는 검찰 역사상 최초로 비리에 연루되어 불명예 해임된 케이스다. 가족의 해외여행 경비, 법인 차량 제공 등을 넥슨측으로부터 부당하게 받았으며, 한진그룹에 대한 내사종결의 대가로 처남 명의의 청소용역회사에 한진그룹 측에서 134억 원의 일감을 주도록 종용했음이 밝혀졌다. 그동안 약자들을 대상으로 엄청난 갑질을 행사했으므로 아마도 비리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책의 저자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최고재판소 판사의 성격 유형별 분석이그것이다. 네 가지 유형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A유형~ 인간미가 풍부하고 단점까지도 포함한 개성 넘치는 인물

B유형~ 이반 일리치 타입(톨스토이의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C유형~ 속물, 순전한 출세주의자

D유형~ 분류 불가능, 혹은 괴물

 

그런데, 저자의 판단에 의하면, A유형은 5%이하, B유형은 45%, C유형은 40%, D유형은 10% 정도라는 것이다. 즉 제대로 된 판사는 극히 소수이고, 퇴폐 내지는 타락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드랑하는 주인공으로 제정 러시아 시대의 관료재판관이다. 그는 성공을 했고 두뇌도 명석하지만, 자신만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없는 사람이다. 대체로 공무원들이 이런 범주에 속하는 편이다.

 

D유형은 너무나도 특이해서 앞의 유형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의 집무실은 언제나 쥐 죽은 듯 조용해서 찍소리조차 들리지 않으며, 사무총국의 과장 시절에는 부임 당시에는 건강했던 재판소 서기관이 얼마 지나지 않아 늘 미열에 시달리는 환자처럼 돼서 초췌한 몸으로 지방 재판소로 달아나버렸다는 일화를 몇 개씩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저자도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감정이라는 것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고 한다. 또 병으로 떠난 재판관을 야멸차게 얘기해서 반발심을 불러일으키거나 아랫사람을 짓누르는 듯한 태도와 말투로 명령하던 사람이 최고재판소 판사가 되자 돌연 민주파로 전향한 인물, 사법행정을 통해 재판관을 철저하게 지배하는 인물 등이 이런 타입이다.

상층부에 대한 추종 경향이 너무도 극단적인 어느 대도시 지방재판소의 소장을 예로 들어보겠다. 그는 재판관이나 직원 앞에서 "고등재판소의 의견은 잘 들었나? 우선 상급청의 의견을 들어보게", "그건 정말 사무총국의 생각과 같은 것인가? 혹시 다르지 않은가?"라는 등의 말을 매일같이 했기에, 직원들은 '충견 하치코 같은 사람'이라고 수군거렸다. 물론 개가 세상을 떠난 주인을 그리워하는 것은 미덕이지만, 재판관으로서 독립을 지켜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걸핏하면 사무총국이나 고등재판소 사무국(사무총국의 국장이나 고등재판소 사무국장은 오사카 지방재판소 소장보다 상당한 후배다)의 의견에 조건반사적으로 신경을 쓴다는 것은 결코 미덕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충견 하치코의 명예에 커다란 흠집을 내는 것이다.

 

일본의 재판소는 선(線)에 의해 둘러싸인, 영역이 매우 좁고 한정되어 있는 사회이자 그 선을 넘을 경우, 혹은 그 선을 밟은 경우 그에 대한 대가로써 따돌림, 징벌, 보복이 굉장히 혹독한 사회이다.

 
소송을 좋아하는 국민은 특히 일본인 중에는 다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비교적 많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소송이라는 수단을 쓰지는 않는다. 따라서 뒤집어 말하면, 보통의 일본인이 소송을 일으켜야겠다고 결심한 경우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재판소에서 시비를 가려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싸우겠다고 생각한 경우가 비교적 많을 것이다. 그런데 소송을 일으키고 나면 머리말에서 언급한 것처럼 어느 정도 심리가 진행된 단계에서 재판관으로부터 억지로, 그리고 끈질기게 화해하라는 설득을 받는 경우가 아주 많다.

성적性的, 권력, 도덕 등의 괴롭힘과 추행이 많다. 저자가 알고 있는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본다. 재판장이 상사로서의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이 소속된 부서의 젊은 여사무관과 성적 관계를 가진 사례, 도쿄 지방재판소의 소장대행이 연회 자리에서 여성 판사보를 끌어안은 사례, 두 소장이 미리 말을 맞춰 여성 판사보에게 예전에 사귀던 남성 판사보와 다시 교제하라고 설득한 사례 등이 떠오른다.

 

그리고 성희롱에 관해서는 1976년에 사법연수소 사무국장과 교관이 제30기 여성 수습생에 대해 "여성은 법률가, 재판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등의 차별적 발언과 성희롱 행위를 고발당해 국회에서도 문제가 되었으며, 사법연수소장으로부터 엄중한 주의 처분을 받은 예가 있다(이 사무국장은 후에 사무총장을 거쳐 결국에는 도쿄 고등재판소 장관이 되고, 조금 더 지나면 최고재판소로 들어갈 예정인 사람이었다).

 

 

일본의 사법은 오염 지대

 

"바닥을 보렴, 더러워졌어. 비질을 해야 돼"

이는 비틀즈의 멤버 조지 해리슨의 '내 기타가 우는 동안'에 나오는 노랫말이다. 일본의 사법은 피라미드형 계층적 캐리어시스템에 포획된 노예이자 중독된 재판관들에 의해서 완전히 오염되어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일본의 재판관 조직은 엘리트의 폐쇄적인 관료집단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도 마찬가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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