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사
앙드레 모루아 지음, 신용석 옮김 / 김영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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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가 당연시하는 자유와 평등, 민족주의, 자유주의, 공화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의 가치관들이 모두 프랑스 혁명을 통해 유럽과 전 세계에 그 씨앗을 뿌렸던 것이다. 이렇듯 절대 권력의 왕정국가에서 자유와 평등의 국민국가로 발돋움하며 세계사의 흐름을 주도해온 프랑스. 유럽대륙 한복판에 자리한 채 수많은 주변국들의 부침을 받으면서도 최강대국의 지위를 놓치지 않은 프랑스의 저력은 과연 무엇이며, 그 힘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러한 프랑스의 실체를 한 권으로 정리한 책이 바로 앙드레 모루아<프랑스사>다. 

 

 

프랑스 역사저술의 완결판

 

1793년 1월 16일, "국민이여, 짐은 죄 없이 죽는다"라는 외침과 함께 루이 16세의 목이 단두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지 4년 만에 벌어진 이 참극을 지켜본 사람들은 사형에 찬동했다는 죄책감이 드는 동시에 전력을 다해 혁명을 유지, 발전시키지 않으면 자신들도 곧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이 사건은 19세기 유럽 정치 혁명의 시발점이 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책의 저자 앙드레 모루아는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평론가이자 전기작가이며, 역사가이다. 그의 본명은 에밀 헤르조그, 1885년 프랑스 엘뵈프에서 태어나 루앙에서 공부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현대 프랑스의 가장 독창적이고 뛰어난 철학자로 손꼽히는 알랭의 제자가 되었다.

 

그가 역사서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37년 <영국사>를 출간하면서부터다. 이후 1943년 <미국사>를 펴내며 역사가로서 입지를 다진 그는, 프랑스의 역사를 다룬 책도 집필해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프랑스인으로서 자국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고사를

 

 

 

 

 

 

 

 

 

프랑스의 기원

 

기원전 10세기경 알프스 산중에는 리구리아인, 피레네 산중에는 바스크인의 선조로 추정되는 이베리아인이 살고 있었다. 지중해를 건넌 페니키아인의 선원들도 와 있었다. 당시 셈족 상인들이 진주, 토기, 화려한 색깔의 직물 및 노예를 교역했다. 그 뒤를 이어 그리스 항해자들이 해안지대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동방 문명, 종교사상, 신비주의, 화폐, 올리브 재배법, 비교적 완전한 언어 등을 들여왔다.

 

기원전 6세기경 이오니아의 포카이아에서 건너온 항해자들이 건설한 마살리아는 그리스상인들이 브리튼(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에서 구입한 주석을 게르마니아 지방의 육로와 하천을 통해 들여와 수출하는 무역항이었다. 그리고 마르세유를 중심으로 그리스인이 건설한 식민 도시 니카에아(니스), 이가테 튜케(아그데), 앙티폴리스(앙티브) 등이 남프랑스 해안지대에 산재했다. 프로방스 지방의 풍물은 그리스인의 풍습으로 바뀌었고 이 지방에 올리브나무뿐 아니라 삼나무, 무화과, 포도, 석률 등이 들어왔다.

 

메로빙거 왕조의 역사는 갈로-로마의 주교 그레고아르를 통해, 훨씬 근대에 와서는 역사가 오귀스탱 티에리(1795~1856년)가 저술한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자유주의자인 티에리는 자신을 갈로-로마인의 훗손으로 맏고 싶어 하는 프랑스의 일반 민중을 프랑크족 후손인 이기적인 계급과 대립시키고 있지만 이는 전적으로 인위적인 것이다. 다고베르트 1세왕(629~639년)의 치세는 메로빙거 문명의 절정기로 이탈리아, 스페인, 게르마니아까지 관여했으나 이후로 왕조는 멸망의 길을 걸었다.

 

"메로빙거 궁전은 창녀굴이고 프레데공드는 굉장한 요녀다"

 

프레데공드 왕비와 브룬힐데 왕비 사이의 투쟁은 30여년 동안 이어졌다. 힐페리히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미모의 시녀 프레데공드는 모략 끝에 왕비가 되어 경쟁자들을 교살하고 그 소생들까지 박해한 역사상 매우 간악한 여자 중 한 사람이었다. 스페인 서고트 왕국 출신으로 벼락출세한 프레데공드와 동서지간인 브룬힐데는 프레데공드보다 16년을 더 살았으나 결국 아들인 클로타르 2세(584~629년)을 통해 사후 승리를 거둔 셈이다. 늙은 브룬힐데는 신하의 배반으로 클로타르 2세에 붙잡혀 달리는 말에 매달려 죽는 참혹한 처형을 받았다.

 

메로빙거 궁전의 생활은 터키의 할렘과 노예시장을 방불케 했다. 할렘에 득실거리던 수많은 여인은 왕비가 되려고 온갖 음모를 꾸몄다. 국왕이 사망하면 왕자들이 왕국을 분할 상속하는 관습으로 인해 왕위를 계승할 때마다 형제간에 불화가 발생했다. 아들들은 아버지에게, 형제들은 다른 형제에게 음모를 꾸몄고 패자는 처형내지는 수도원에 들어가 일생을 마쳤다. 왕들은 모두 처자를 살해했고 누구나 얼마 되지 않은 금전에 매매되었다. 다고베르트 왕처럼 명망 있는 군주도 수많은 첲첩으로 인해 심신을 소모한 나머지 서른네 살에 사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가 존속되기는 어렵다.

 

중세기 프랑스 문명의 형성 

중세기는 고대 문명과 르네상스라는 찬란한 두 시대 사이에 끼어 있었으나 그렇다고 참담한 암흑시대는 아니었다. 오히려 중세기 문명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고 인간에게 도덕적, 사회적 평등을 부여하는 한편 서유럽의 위대한 예술작품을 낳았다. 물론 아테네, 로마, 비잔틴, 알렉산드리아가 과거에 성취한 문명은 12세기의 파리에 비견할 수 없을 만한 수준이었으나 고대 문명이 계속 발전하려면 새로운 접목이 필요했다.

 

프랑스 중세기 문명의 독창성은 지중해적 요소와 야만족의 요소를 융합해 새롭게 빚어낸 데 있었다. 프랑스 문명은 주변 문명이다. 인류의 새로운 개화 현상은 여러 가지 영향을 널리 받아들일 수 있는 이런 지역에서 성장하는 법이다. 프랑스는 지중해 해안에서, 그리스 로마 비잔틴 세계와 대서양 해안에서,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과 피레네 산맥 지방에서, 이슬람교도와 라인 강 유역에서 야만족과 접촉했다. 이런 혼합을 통해 프랑스는 유럽 중앙의 영구적인 한 지방으로 머물 운명을 모면했다. 프랑스의 르네상스는 일찍이 10세기에 태동해 12세기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 사상과 예술은 전 유럽에 널리 전파될 기세였다. 

 

 문예부흥과 졸교개혁에 따른 프랑스의 변화

 

문예부흥은 하나의 정신혁명이라 할 수 있다. 이 정신혁명이 스스로 고대 철학과 스콜라 철학 간의 사상적 타협점을 찾고 있다고 믿는 동안 사실은 그 속에 국가주의, 프랑스 혁명, 근대 과학, 심지어 세계대전의 싹까지 잉태되고 있었다. 18세기 사람들은 국왕이 옥좌에 있고, 영주가 성관에 있으며 사제가 성당에 있는 것을 보고 본질적으로 변화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문예부흥에 따르는 지적혁명은 종교개혁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문예부흥의 기본적인 본질은 계시된 진리라는 관념과의 절연이었다. 사실은 신교도 계시를 전혀 부인하지 않았고 단지 계시의 한계를 성서의 권위로 제한하려 했을 뿐이다. 20세기에 인문주의혁명은 가톨릭과 같은 정도로 신교도를 위협했다. 이 관점에서 신구교 간 종교전쟁은 형제간의 전쟁이라 할 수 있다.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은 실제로는 대립하는 운동이었다. 나중에 프랑스의 신교도는 기타 소수파와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적이었고 문예부흥의 조류와 사실상 합류했다. 물론 16세기에는 위그노파의 어느 누구도 신교도의 이러하 변모를 예상하지 못했다. 칼뱅은 브리소네 주교보다 자유주의적이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

 

에베르와 당통이 죽자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의 주인이 되었다. 지나치게 힘을 얻은 그는 자기 앞에서 머리를 숙이지 않는 사람을 모두 적으로 간주했다. 그는 계속해서 혁명재판소에 보다 많은 사람의 목을 요구했다. 주교, 수도사, 무신론자, 왕당파, 공화주의자, 베르됭의 처녀들(1792년, 베르됭에 진주한 프로이센군을 환대한 처녀들), 징세 청부인 등이 단두대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로베스피에르는 전능했으나 전도가 막연했고 감각조차 상실한 상태였다. 목월 22일(1792년 6월 10일)에 발표된 법령이 개회 중에도 의원의 불가침권을 박탈해 생명을 위협하자 가장 겁이 많은 의원들도 이제 국가를 위해 행사하지 않던 용기를 발휘했다. 교활한 책사 푸셰는 공회, 특히 마레당을 움직였고 공안위원회에서는 카르노와 그의 동지들이 생쥐스트의 협박을 받고 로베스피에르의 적으로 전향했다. 처형은 더욱 극심해졌고 홀로 남게 된 과부와 고아들은 로베스피에르를 저주했다.

 

로베스피에르의 독재에 종지부를 찍는 사태가 발생했다. 유력한 의원 장 랑베르 탈리앵이 혁명재판소에 출정하려하자 자신에 대한 적개심이 치열함을 알고 있던 로베스피에르는 선수를 쳤다. 즉 1794년 7월 26일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에서 연설을 통해 보안위원회와 공안위원회의 숙청을 요구했다. 다음날 생쥐스트는 국민공회에서 교묘한 연설로 전제정치와 탄압, 국민의 대표인 위원의 권한 침해 등을 금지하는 조치를 강구할 것을 제의했다. 공회는 곧 무기한 개회를 선언했다.

 

"폭군은 물러가라!"

 

의장의 명령에 따라 헌병들이 로베스피에르 형제와 생쥐스트를 체포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체포되었음을 알게 된 파리 코뮌은 교도소에 명령해 로베스피에르의 수감을 거부하고 시청으로 연행하게 했다. 다음 날 로베스피에르는 그의 일당과 함께 수많은 군중 앞에서 단두대에 올랐다. 군중은 환호와 갈채를 보냈다. "폭군들아 죽어라, 공화국 만세!"

 

체제 동요 이후의 프랑스

 

1815~1870년 프랑스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정치체제가 불안정하고 다양했다는 점이다. 프랑스는 사실상 인구적, 산업적, 군사적 우월성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권력이란 피통치자 대다수의 지지 없이는 권세를 발휘할 수 없는 법이다. 지지가 없어지는 순간 무정부 상태나 민심 동요가 일어나고 심하면 내란이 발생한다. 대혁명은 국왕에게서 존엄성을 박탈했고 그 후부터 프랑스에서는 정통성의 존재가 모호해졌다.

 

일부에서는 정통성이 부르봉 가문의 속성이라 믿었고 1870년에도 앙리 5세를 왕위에 추대하려고 완강히 고집하는 왕정주의자가 적지 않았다. 반면 국민의 기억에 남아 있는 샤를 10세의 그림자는 왕가의 존엄성을 흐려놓았다. 파리의 민중은 부르봉 가문의 국왕을 두 번이나 타도한 것을 자랑으로 여겼고 공화주의자들은 이 가문이 반동과 복수를 벼르는 당파의 수령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분가는 상속권뿐 아니라 국민의 지지마저 잃어 아무런 정통성이 없었다. 제정은 망명 중인 나폴레옹 3세가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오직 나만 시국을 수습할 수 있다"라고 말했으나 왕위 계승권과 자코뱅주의를 동시에 충족시키려는 보나파르트주의는 모순을 내포해 다시 집권할 가능성이 없었다. 대다수 귀족계급과 시민계금은 공화정체제를 공포정치와 무질서로 인식했다. 아무튼 어떤 정치체제든 프랑스 국민을 분열시킬 수밖에 없었다.

 

제5 공화국의 출범

 

10월 5일 헌법이 공포되었고 제5공화국이 출범했다. 드 골 장군을 지지하는 정당이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새 헌법은 대통령 선출을 광범위한 선거인단에 위임했다. 이제 국가원수 선출을 의회가 아니라 프랑스의 각 지방을 대표하는 선거인이 담당한 것이다. 코티 대통령은 이미 사의를 표명했으므로 가망성 있는 유일한 후계자는 국민 절대다수의 신임을 받던 드 골 장군뿐이었다.

 

드 골 대통령의 ㅈ지방 순행은 그의 인기를 그대로 반영했다. 프랑스 국민은 그들이 되찾은 자신감이 외국의 태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감지했다. 곧 자본이 프랑스로 쏟아져 들어왔고 과거의 음울하던 정세는 일변했다. 그동안 프랑스 통화는 외국의 불신을 받았으나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외화보유고가 20억 달러에 달했고 새로운 차관을 요청하는 대신 과거의 차관을 상환할 정도가 되었다.

 

경제적 지위가 강화됨에 따라 프랑스는 자주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정부는 유럽을 통합하는 구상을 지지했고 경제공동체와 프랑스가 보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을 강조하는 대서양공동체 등의 결성에도 찬성했다. 정부가 당면한 중요한 기본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알제리~ 알제리의 미래를 자유투표로 선택하는 자결 방식을 제의

프랑스 연합~ 계속 정치적 유대를 맺는 그룹, 독립해서 프랑스와 유대를 유지하는 그룹

핵무장~ 국가방위를 동맹국가의 선의에만 의존해선 안 된다

세계정세~ 독일과 원만한 관계, 이탈리아와 친선관계를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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