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유언에 인생이 농축되어
있듯이 화가의 마지막 작품에는 인생의 찬란함과 어둠이 짙게 고여 있다. 빛나는 명화의 이면에 숨겨진 화가들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시대에
얽매여 비루한 삶을 살아내야 했던 화가들이 생의 끝자락에 남기고 싶었던 '인생의 풍경'은 무엇이었을까? 위대한 화가들이 남긴 최고의 작품과
최후의 그림을 중심으로 화가의 삶과 예술을 함께 녹여낸다.
위대한 화가들이 남긴 최후의 그림
일본 최고의 명화 이야기꾼
나카노 교코 교수는 보티첼리부터 고흐까지 유럽 미술의 황금기(15~19세기)를 이끈 15인의 화가가 어떤 노력
끝에 시대를 초월한 명작을 탄생시켰는지, 생의 마지막 그림으로 무엇을 남겼는지를 들려줌으로써 명화를 넘어 화가의 인생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시도는 인문학적 관점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명화 읽기를 제시하며, 나아가 ‘당신은 생의 마지막에 어떤 그림을 남길 것인가’라는 삶을 뒤흔드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그녀는 작가, 독일문학자. 서양
역사와 예술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토대로, 미술 에세이나 역사서 등을 열정적으로 집필·강연하고 있다.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는 <무서운 그림> 시리즈 세 권을 비롯해 <무서운
그림으로 인간을 읽다>, <잔혹한 왕과 가련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 <명화의
거짓말>, <나는 꽃과 나비를 그린다>, <미술관 옆 카페에서 읽는 인상주의> 등이
있다.
서양회화사는 대부분 중세를 시작으로
르네상스, 마니에리스모, 바로크를 이야기한 뒤 인상파를 거쳐 현대의 혼란한 상황으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림을 분류했다. 바로 '화가가 무엇을 그려왓는지,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무엇을 그렸는지'로 나누었다. 이는 '화가가
왜 그것을 그릴 수밖에 없었나'라는 질문과 통한다.
이 책은 총 3부, 신(기독교,
그리스 로마 신화)에 몰두한 화가들, 왕과 고용관계를 맺은 궁정화가들, 새로운 세계를 이끄는 시민계급에 바짝 다가간 화가들로 나누었다. 다시
말해 '화가와 신', '화가와 왕', '화가와 민중'이다. 15세기에서 19세기를 살아간 그들이 각각 어떤 문제에 부딪혔고 어떤 노력 끝에
걸작을 탄생시켰는지, 나아가 생의 마지막 작품으로 무엇을 남겼는지까지 살펴본다.
아펠레스의
중상모략
보티첼리가 그린 중상모략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본인에 대한 동성애 의혹, 두 번째는 사보나롤라에게 심취하여 메디치가를 배신했다는 중상모략, 세 번째는
사보나롤라에 대한 비방이다. 이 중 어는 것이 정설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여성의 누드가 갑자기 변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사보나롤라를 알기 전의 보티첼리라면
이 정도로 시시한 여체는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모습은 조개껍데기를 타고 서풍에 날려 키프로스 섬으로 떠내려 온 비너스와 비슷하나 그
매력의 차이는 1,000만 광년쯤은 떨어져 있어 안쓰러울 지경이다. 어떻게 하면 보는 사람의 관능을 일깨울 수 있는지 아는 자는 어떻게 하면
관능을 지울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확신범이다.
보티첼리의 인기는 빠르게 식었다.
풍성한 이야기가 무미건조한 교과서로 변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보나롤라를 추종하고 그의 부활을 믿었다고 하니 본인은 불행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보나롤라가 처형되고 12년 후에 보티첼리는 가난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과는 달리 부드러운 느낌이 없어 딱딱해 보이는
팔과 곡선이 결여된 나체가 그려져있다.
그리스도의
변용
르네상스의 3대 거장으로 불리는
천재들은 바로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다. 이들은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까지 함께 살았던 사람이다. 다빈치는 <모나리자>,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 라파엘로는 <의자에 앉은 성모> 등으로 유명하다. 이탈리아에서 후원자를 잃은 다빈치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1세의 초청을 받아 <모나리자>를 들고 영원히 조국을 떠난 후 로마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양강체제가
되었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다빈치가 예순일곱 살, 미켈란젤로가 여든아홉 살까지 살았던 것에 비해 서른여섯 살로 생을 마감했다.
사망 원인도 불확실한데, 아마도 오랫동안의 작업활동에 따른 과로와 화려한 여성 편력으로 인한 쇠약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성병으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지만, 앓아누운 지 2주쯤에 사망했으므로 이는 직접 원인이 아님에 분명해 보인다.
죽기 직전인 서른일곱 살에 그는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의 주문으로 대작 <그리스도의 변용>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엔 큰 그림일수록
제자들에게 부분적으로 대작代作을 맡겼지만, 이 작품만은 손수 그렸고 한 시도 붓을 놓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마지막 완성작은 공방에서
완성되었다. 따라서 그가 어디까지 그렸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라파엘로라는 인물을 평하기를 하늘이
주신 재능 덕분에 성공을 향한 계단을 쉽고 가볍게 뛰어올랐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그는 노력과는 상관 없는 인물로 여겨지기 쉽지만 마지막 작품인
이 그림을 보면 그가 새로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잘 보여 준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날카로운 명암
대비와 대담한 구도는 차 세대의 바로크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날카로운 명암 대비와 인물의 격렬한 움직임은 바로크를 향해 앞서 나가고
있다.
엘 그레코의 <라오콘>
엘 그레코는 일흔세 살까지 살았지만 만년에는 인기가 급속히
식어갔다. 강렬하고 황홀한 그림이 차츰 시대의 트렌드와 어긋났고 또한 지나친 개성이 오히려 질리게 만든 것이 그 원인이었을 수 있다. 이를
느끼고 새로운 시도를 했다. 그리스인이 자신이 그리스 신화를 한 점도 그리지 않았음을 문득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그림은 처음이자 마지막 신화화神話畵인
<라오콘>이다. 트로이전쟁의 유명한 일화 '트로이 목마'가
주제다. 그리스의 속셈을 알아차린 트로이의 신관 라오콘이 성안으로 목마를 입장시키지 말라고 경고하지 이에 화가 난 여신 아테나(미네르바)가
물뱀을 풀어 라오콘과 두 아들을 죽이는 장면이다. 그는 그림의 배경을 톨레도 시가지로 바꾸었다.주제를 신화로 바꾸어도 그의 개성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엘 그레코는 세상을 떠난 뒤 서서히 잊혔다. 두 세기가 지나 1819년에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이 개관했을 때 그의 작품은 단 한 점도 걸리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를 재발견한 사람은 놀랍게도 20세기의 표현주의 화가들이었다.
피카소도 자신의 '청색시대' 인물 묘사는 엘 그레코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했다.
'그 그리스인'의 감성이 참으로 새로웠다는, 아니 지나치게 새로웠다는 증거다. 이제, 그의 그림을
감상해보자.
고야의 <나는
아직 배우고 있다>
프란시스코 고야는 1746년 에스파냐의 외딴 시골 마을에서
가난한 장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럽 전체가 근대사회로 전환되어 가는 중에 에스파냐는 여전히 종교재판소가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로 인해
중세적 봉건제도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음에 따라 궁정과 서민 간의 격차는 다른 나라보다 더 컸다.
이 모든 세계를 알고 있었던 고야는 유화 500점, 판화 300점, 소묘류 900점 등
엄청난 작품을 묘사했다. 즉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농민부터 최고 권력자인 국왕에 이르기까지, 짐승처럼 서로를 죽이는 인간들로부터 우아하고
아름다운 연애 장면까지 화폭 위에 그려냈던 것이다. 작푼도 감상적인 로코코풍, 내면을 들여다보는 벨라스케스풍, 거친 바로크풍, 뚜렷한 리얼리즘과
기이한 폭력성의 합체, 악몽 같은 환상 등 참으로 다양했다.
평범한 사람의 10배, 20배 농축된
인생을 살았던 이 천재는 여든을 넘긴 말년에 검정 콩테로 일종의 자화상을 남겼다.
텁수룩한 머리카락과 긴 수염이 모두 하얗게 센 노인이 등을 구부린 채 양손에 지팡이 두 개를 짚고 간신히 서 있다. 배경은 어둡고 깜깜하지만 두
눈은 아직 번뜩이고 있다. 바로 <나는 아직 배우고 있다>이다.
<비너스와
삼미신에게 무장해제되는 마르스>
다비드는 174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 때
철재상을 하던 아버지가 결투로 사망하는 바람에 작은아버지에게 맡겨졌다. 먼 친척 중 로코코의 인기화가 부셰가 있었고, 가족의 지인 중에도
예술가가 많았다. 그는 일찍부터 그림으로 성공해 이름을 알리려 결심했지만 좀처럼 프랑스 아카데미가 주최하는 미술대회의 최고상인 로마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스물아홉 살 때 겨우 로마상을 받고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다.
1784년 루이 16세가 주문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발표하여 돌풍을 일으켰다. 전해에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고 공방에는 수많은
제자가 몰려들었다. 바야흐로 다비드의 시대가 오고 있었다. 루이 16세의 권세가 지난날의 태양왕과 비슷했다면 다비드는 그의 궁정화가가 되어 왕의
신격화에 힘썼을 것이다. 그러니 시대는 혁명을 향해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만년의 대작
<비너스와 삼미신에게 무장해제되는 마르스>를 보면 보잘것없어진 그림 실력에 놀란다. 이 작품은 그의
최전성기 작품의 서투른 모사에 지나지 않는다. 신고전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아카데미 작품이 빠지기 쉬운 함정, 즉 형식에만 급급하고 영혼은 담지
않은 그림이 되어버린 것이다.
원래 다비드의 작품은 권위주의를
회화로 표현한 듯한 면이 있어서 호불호가 갈리기보다 잘 그린 그림의 교과서처럼 보였다. 그래도 나폴레옹을 그렸을 때는 나폴레옹이라는 인물 자체의
뜨거운 피가 전달되었다. 하지만 거기서 나폴레옹과 그의 지위를 빼자 그림은 빈껍데기만 남았다.
밀레가
아카데미 회화에 대해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 연극 같은 그림"이라고 퍼부었던 비판을 인정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비제 르브룅의
<부인의 초상>
대부분의 여성 화가가 그러하듯이 비제 르브룅의 아버지도 화가였다. 이 시기 여자에게는
미술학교의 문이 닫혀 있었고 나체를 보거나 그리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역사화에 필수인 골격 연구도 어려워서 작업화가가 될 수 있는 길은
'아버지가 화가여서 집이 공방'인 경우로만 거의 한정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드물게 여든일곱 살까지
장수한 비제 르브룅은 남편과 딸을 저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만년을 다소 쓸쓸하게 지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붓은 버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다운 초상화를 원했고 그 요구에 따라 그녀는 계속 그림을 그렸다. 말년에 가까운 일흔여섯 살 때의 작품이 남아 있다. 러시아풍 헤어스타일을
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성의 초상화인데, 생기 있는 터치가 화가의 나이를 짐작하지 못하게 한다. 훌륭한 작품으로 명성을 떨친 18세기 최고의
프로페셔널 여성 화가는 자신의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듯하다.
여인의 헤어스타일이 러시아풍이다
밀레의 <야간의
새사냥>
밀레는
죽기 10년쯤 전부터 때때로 심한 두통에 시달렸으며 자리에 자주 누우면서 서서히 몸이 쇠약해졌다. 그래도 붓은 놓지 않았다. 병상에서 끝까지
계속 손을 보았던 마지막 작품 <야간의 새 사냥>은 기묘한 박력이 넘쳐 그린 이가 자기 죽음을 의식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에 대해 미국인 화가 히쿡
로가 밀레와 인터뷰를 했었는데, 밀레는 어린 시절 자신이 실제로 본 광경이라는 것이다. 한밤중에 나무에 내려앉은 수많은 들비둘기 떼에게 갑자기
횃불을 비춘다. 눈이 부신 비둘기는 당황하여 날아가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며 날개를 푸드덕거린다. 이때 몽둥이로 내려쳐 비둘기의 숨통을 끊는다.
그림만으로도 날카로운 울음소리, 튀어오르는 피, 으깨지는 소리, 번쩍이는 불빛 등이 머리 속에 그려진다.
인생의 맨 마지막에 왜 밀레는 이
광경을 그린 것일까? 소년이었던 밀레를 들비둘기 사냥에 데려간 사람은 아버지였을까? 아버지도 몽둥이를 휘둘렀을까? 갖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노동의 성스러움을 줄곧 그려온 화가는 가축을 도축하는 것과는 다른 사냥의 한 측면도 그림으로 남겨두고 싶었던 것일까? 이 또한 농촌 생활의
현실이다라고.......
우리들에게 익히 알려진 밀레의
<이삭줍기>
죽음의 냄새가 전해지는 기묘한 작품으로, 기존의 밀레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