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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도덕을 말하다 - 좋은 삶을 향한 공공철학 논쟁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 옮김, 김선욱 해제 / 와이즈베리 / 2016년 4월
평점 :
품절
지난 20년 동안 첨예한 대립 양상을
보이는 도덕적, 정치적 현안들에 관한 논쟁들의 중심에는 몇 가지 반복되는 의문점이 자리 잡고 있다. 개인의 권리와 선택의 자유는 우리의
도덕적·정치적 삶에서 가장 대표적인 규범이지만, 과연 그것들이 민주사회를 위하여 충분하고도 적절한 기반으로서의 의미까지 지니는가? 우리는 좋은
삶에 관한 논쟁적인 개념들을 다루지 않고서도 공공생활에서 발생하는 도덕적 과제들을 논리적으로 풀어 나갈 수 있는가? 만약 우리의 정치적 논의들을
다루는 데 있어 좋은 삶에 관한 질문들을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면, 현대 사회에 이 질문들에 대한 의견 불일치가 만연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현대의 공공생활과 도덕을 재조명하다
2010년 이후, 한국 사회에
'정의'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마이클 샌델 교수는 그동안 공공생활을 움직이는 도덕적
딜레마와 정치적 딜레마를 탐구한 평론 31편을 따로 모아 신간을 출간했다. 이는 법률 전문지, 학술 전문지, <애틀랜틱먼슬리>,
<뉴리퍼블릭>, <뉴욕타임스>, <뉴욕리뷰오브북스>등의 일반 간행물에 실렸던
글들이다.
그는 학자와 전문가, 그리고 일반인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 평론들을 집필한 것인데, 이는 현대의 정치와 도덕을 조명하는 데 주안점을 둠으로써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시민으로서의 교양은 과연 무엇인지를 되새기도록 만든다. 즉 정치 논평과 정치철학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었는데,
1부(미국의 시민생활)는 미국 정치의 전통을 전반적으로 짚어본다. 토머스 제퍼슨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국 정치사의 주요 논쟁을 살펴보면서 우리
시대에 다시 자치라는 프로젝트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공동체의 삶 속에 담겨 있던 도덕적 가치를 정치에서 다시금 논의해야 함을
주장한다.
이어서 2부(논쟁들)에서는 지난
20년 동안 치열한 논쟁거리였던 공공 영역의 시장화, 낙태와 동성애에 관한 사생활 보호권 등
도덕적, 정치적 현안들을 다루면서 정치와 공동체가 이런 논쟁들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꼬집는다. 마지막으로 3부(공동체와
좋은 삶)에서는 2부에서 논의한 도덕적, 정치적 논쟁들에서 한걸음 물러나 다양한 자유주의 정치 이론들을 검토, 각각의 장단점을 평가하고
다원주의적, 시민적 공공철학이 갖는 의미에 관해 설명한다.
책은 도덕적 문제가 정치적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는 미국의 현실 문제 인식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중요한 정치 이슈인 낙태 문제에
관해 정치, 정책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 선택의 문제로 접근하는 시각이 있는데 낙태에 대한 찬반과 무관하게 이런 식의 접근은 잘못됐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만약 낙태가 도덕적으로 나쁜
것이라면 개인적 선택의 문제로 방치해선 안 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고 마이클 샌델 교수는 주장한다. 그의 문제 인식은 공동체 내에서의 도덕적 문제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정치에서도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이제 그의 평론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자유주의자들이
두려워하는 영역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을 자유라고 한다면, 시민들에게 자치라는 습관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지에 대한 오랜 논쟁을 끝낼 수 있다. 또한 좋은 삶의
본질에 대한 케케묵은 논쟁도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시민 개념엔 철학적 문제가 놓여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폭넓은
범위의 도덕 및 정치적 의무를 설명할 수 없다.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우리가 그런
의무에 묶여 있음을 시인하지만, 이는 사적 생활에만 해당될 뿐 정치에는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다른 어려운 문제들을
야기한다. 왜 우리가 시민의 정체성을 그보다 더욱 폭넓게 인정되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에서 분리해야 한단 말인가? 왜 정치적인 숙고 과정에서
우리가 인간의 가장 높은 목표로 여기는 것을 반영하지 않는가? 우리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정의와 권리에 대한 논의들은 좋은 삶에 대한 특정한
관념들에 의지하지 않던가?
국가의 복권사업, 공공
영역의 타락을 보여준다
복권사업이 가져다주는 수익에 중독되어
있는 한, 주정부는 주민들에게, 특히 가장 취약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민주주의적 삶을 지탱하는 노동과 희생, 도덕적 책임의 윤리와 상충되는
메시지를 계속 퍼부을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공공 영역의 타락은 복권이 야기하는 가장 중대한 해악이다. 복권은
공공 영역의 질을 떨어뜨린다. 정부가 비뚤어진 시민 교육을 제공하는 주체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원활한 공공자금의 흐름과 정부 재정을
유지하기 위해 이제 미국의 주정부들은 자신의 권위와 영향력을 이용해 시민의 미덕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헛된 희망을 퍼뜨려야만 하는 형편이다.
운만 조금 따라주면, 불행한 운명에 이끌려 발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었던 노동의 세계에서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다고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사생활 보호권에 대한
관점의 변천사
1961년, 연방대법원은 처음으로
사생활 보호권 문제를 다루었다. 당시 포 대對 울먼 사건에서 코네티컷 주의 한 제약업자가 피임용품 사용을 금지하는
주법에 이의를 제기했다. 대법관들 다수가 법 해석의 문제로 여기고 이 소송을 기각했지만. 더글러스 대법관과 할런 대법관은 반대의견을 제시하면서
해당 법이 사생활 보호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옹호한 권리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사생활 보호권이었다.
초점이 되는
권리는 피임용품을 사용할 권리가 아니라 해당 법의 집행이 요구하는 감시로부터 자유로울 권리였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 법을 엄격하게
집행한다면, 수색영장이 발부되고 경찰들이 침실에 들어가 거기서 벌어지는 일을 조사하는 수준에까지 이를 것이다. (…) 법이 만들어지면 집행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 아닌가? 이 법의 위반을 입증하는 데는 필연적으로 부부관계에 대한 심문이 수반된다" - 더글러스
대법관
더글러스 대법관은 피임용품 판매를
금지하는 것과 그 사용을 금지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 말했다. 판매 금지는 피임용품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지만 부부의 은밀한 생활을 공적 도사
대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판매 금지법은 경찰을 침실이 아니라 약국으로 향하게 만든다. 따라서 전통적인 의미의 사생활 보호권을 침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정의를 제일의 미덕으로
삼다
원초적 입장은 칸트의 초월적 논변이
제공하지 못한 것을 제공하고자 시도한다. 선에 우선하되 여전히 이 세계 안에 자리 잡은 권리의 토대가 바로 그것이다.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제하고 요점만 짚어보면, 원초적 입장은 다음과 같이 작용한다.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심지어는 우리의 이해관계나 목적 또는
선에 대해 갖고 있는 관점조차도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 사회를 지배할 원칙들을 선택해야 할 경우 우리가 어떤 원칙들을 선택할 것인지 상상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들, 즉 상상의 상황에서 선택할 만한 원칙들이 바로 정의의 원칙들이다. 게다가 제대로 작용할 경우, 그것들은 특정 목적을
전제로 삼지 않는 원칙들이다.
정의를 제일의 미덕으로 삼는 인간이라면 어떠해야 하는가를 전제로
삼는다.
정치적 자유주의 vs
포괄적 자유주의
포괄적 자유주의와 달리, 정치적
자유주의는 포괄적인 교의로부터 생긴 도덕적·종교적 논쟁들에서 어느 쪽 편도 들지 않는다. "모든 상황을 고려했을 때, 어떤 도덕적 판단이
옳은가는 정치적 자유주의의 문제가 아니다", "포괄적인 교의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 (정치적 자유주의는) 그 교의들이
갈라지게 된 도덕적 주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어떠한 포괄적인 관념에서도 합의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무리 질서정연한 사회라고 해도 모든 사람이 동일한 이유로 자유주의적 제도를 지지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예를 들어,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아가 목적에 우선함을 나타내려는 똑같은 동기를 갖고 자유주의적 제도를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치적 자유주의에서는 이러한 기대를 포기한다.
언론의 자유와
혐오발언
스코키라는 지역은 신나치주의자들의 진입을 막을 수
있었는데, 어째서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남부의 인종 분리주의적 주정부들은 민권 운동가들의 가두행진을 막지 못했을까? 남부의 인종
분리주의자들이 자신들이 사는 곳에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행진하길 바라지 않았던 것이나, 스코키 지역의 주민들이 신나치주의자들의 행진을
원하지 않았던 것은 다르지 않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처럼, 인종 분리주의자들도 행진 참가자들과 그들의 메시지에 의해 깊게 상처 받을 수 있는
공동의 기억으로 결합된 연고적 자아임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경우를 구분할 수 있는
원칙에 입각한 방법은 있을까? 연설의 내용과 관련하여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과 해당 공동체의 지배적인 가치에 따라 권리를
규정하려는 공동체주의자들에게 이를 질문해도 대답은 "없다"이어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언론의 자유를 지지하고,
공동체주의자들은 거부할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이 사라지고 있다
미국 대선에서 아웃사이더가 기세를 떨치고 있다.
'찻잔 속 태풍'으로 예상됐던 도널드 트럼프가 마침내 공화당 최종 주자로 올라섰다. 민주당 상원의 유일한 사회주의자라는 버니 샌더스 의원은 갈
길 바쁜 힐러리 클린턴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트럼프와 샌더스에 상당히 냉소적이다. 이들의 등장을 포퓰리즘 조장 내지
'이상한 대선판'이라는 식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정말 이상한 선거판일까? 미국 주류 사회는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일반 시민들은
그럴 수도 있다며 수긍하는 분위기다. 이를테면 트럼프와 샌더스 모두 기득권 정치 세력에 도전하고 있는 모습이다. 즉 미국 사회의 통념에 대항하고
있다. 트럼프의 포퓰리즘적 언행은 특히 근로계층 남성들에게 먹혀들고 있다. 그들은 일자리와 임금에 위협을 느끼는 계층이다. 두 사람은 이념적으로
다르지만, '불만'이라는 원천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은 존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에 따라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하고 특정한 도덕관념을 강요하지 않는 현대 민주 사회에서의 정의관이 가지는 딜레마에 대해
냉철한 분석과 비판을 하고 있다. 하지만 도덕적인 가치에 따라 논쟁이 이루어지는 사안에 대해 정치권에서 취해야 할 모범답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우리들이 능동적으로 사고하고 고민하며 자신만의 정치도덕적 견해를 가지도록 권유한다. 결국 우리들 모두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의 정의正義에 대해
적극적으로 피력하며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우리 삶에 필요한 정의관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