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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하지 않을 자유 - 행복한 비연애생활자를 위한 본격 싱글학
이진송 지음 / 21세기북스 / 2016년 4월
평점 :
품절
연애는 근대에 와서 만들어진 개념으로 젠더, 계급, 주체와 타자, 자본주의, 국가의 재생산 이데올로기 등 무수히 많은 것들이 교차하고 길항하는 정치의 영역이다. 당신은 연애를 하거나, 하지 않음으로써 이 정치에 참여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연애하지 않을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해왔지만, 어디까니나 사적인 수다에 불과했다. 이를 '공적인 판'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적극적으로 가시화하고 싶었다. - '인트로' 중에서
이 땅의 '홀로'들의 자유를 대변한다
저자 이진송은 국내 최초 비연애 칼럼니스트라는 독특한 직업을 가졌다. '비연애생활자'를 위한 독립잡지 <계간홀로>의 발행인으로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현대소설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 학부 시절 집필한 경장편 소설 <승강이>로 제7회 이화글빛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한국일보>, <한겨레21> 등에 사회문화 전반의 이슈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이진송
연애에 관해 빈곤한 경험의 소유자인 그녀는 '모태솔로=루저'로 낙인찍는 세상에 반기를 들고, 2013년 <계간홀로>를 창간했다. '비연애생활자'의 인권과 그들의 삶에 대한 존중을 주장하는 이 잡지는 이를 지지하는 '홀로(=솔로)'들의 십시일반으로 3년째 근근이 발행되고 있다.
만 스물일곱, 세상의 모든 편견에 강한 의문을 갖고 있는 그녀의 생각과 글은 젊고 거침없으며 통쾌하다. 지성과 유머의 재기발랄한 결합. 사회의 부조리를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하는 날카로운 비판의식. 문학, 역사, 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문학적 분석으로 깊이를 더하면서도, 덕후 세계의 B급 유머 코드를 구사하며 어떤 지루한 주제도 유쾌하게 풀어내는 균형감각은 그녀의 글만이 지닌 매력이다.
'비연애 인구', '홀로' 등의 언어는 그녀가 억지로 만든 말이다. 비연애 상태의 사람을 의미하는 고유어는 사전에 '싱글'로 표기된다. '비연애'라는 말은 국립국어원이 정의한 협소한 의미의 '연애' 정의에 반하는 폭넓은 개념이다. 엄연히 연애하고 있음에도 세상이 연애를 인정치 않는 성소수자의 연애도 포함한다. '홀로'는 어떤 형태로든 연애하지 않는 비연애 인구를 지칭한다.
1920년대의 지식인이 '술 권하는 사회'에 살았다면, 2016년의 2030들은 '연애 권하는 사회'에 산다. 각종 미디어나 일상생활에서 솔로를 불상하고 짠한 존재로 비하하거나 희화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솔로들 스스로도 자신이 진정 '연애하지 않는 상태' 때문에 불행한지 생각하지 않고 일단 자조自嘲부터 한다. 이런 현상에 관해 저자는 문제를 삼고 유감을 표명하고 있다.
연애 과잉 시대에 '비연애'를 선언하다
연애는 그저 그 사람이 그 순간에 누군가와 맺고 있는 관계이자, 선택할 수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삶의 형식 중 하나다. 연애 대상으로서 매력을 발산할 수 있는 것은 멋진 재능이지만, 그게 없다고 해서 자신이 비참하거나 매력 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연애에 최적화될 수는 없고, 세상의 관계는 연애 이외에도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예능 방송 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못친소 페스티벌2'가 열렸다. 못생김 끝판왕 F1으로 선정된 배우 우현의 부인은 "남편이 너무너무 잘 생겼다"고 말했다. 이는 콩깍지나 거짓말이 아니다. 단지 취향의 문제일 뿐이다. 아름다움은 확실히 취향을 탄다. 여기에는 누구나 공감한다. 그러나 못생김도 취향을 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단언컨대, 못생김에도 취향이 있다.
사실상 얼굴을 안 보는 사람은 없다. 취향을 추구하는 탓이다. 어쨌든 서로의 껍데기에서부터 만남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싸우고 나서 화해하려고 다시 봤을 때 얼굴 때문에 화가 나면 안 되는" 마지노선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연애하지 않을지언정 제 기준에 못생긴 사람을 만나기 싫을 수 있다. 그 사람은 '눈을 낮춘 연애'보다 '취향을 고수하는 비연애'를 선택한 셈이니 내버려두어야 한다.
스무 살, 막 대학에 입학한 저자는 장밋빛 꿈에 부풀어 있었다. 적어도 입학만 하면 연애를 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녀가 동아리 언니로부터 "무성애자 라인의 후계자가 돼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동아리의 정의에 따르면 이는 누구와도 연애하지 않는 특징을 지닌 사람인데, 나름 유서 깊게 이어져온 계보였다.
다행히 대학 신입생은 연애 시장의 핫 매물이었다. 미팅과 소개팅 급행열차가 줄줄이 대기중이었다. 당시엔 기승전파스타였다. 마치 공작새가 꼬리를 접었다 폈다 하듯이 매력을 발산할 때를 서로 간보며 아니다 싶으면 언제 도망갈지 눈치를 보는 그런 열차를 타고 있었다. 어느 날 그런 그녀의 모습이 '트루먼쇼'처럼 느껴졌고, '연애'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려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같은 행동을 처음인 양 반복하는 것에 흥미가 떨어졌다. 그때부터 그녀는 소개팅과 미팅 등을 끊었다. '파스타비우스'의 띠 바깥으로 튕겨져나온 것이다. 그렇게 연애를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그만두면서 평화로운 싱글 라이프가 시작됐다.
2008~2009년 무렵, 누군가가 그녀를 '철벽녀'라고 진단했다. 그녀의 비연애 증상에 병명이 하나 더 추가된 셈이었다. 이 말은 외모도 괜찮고 학력과 집안도 웬만하지만 연애를 못하는 여성으로서 철의 장막을 치듯 연애를 차단한다는 뜻이다. 또한 연애는 하고 싶지만 자존심이 높아 자신의 이상형에 미치지도 않는 남자들의 접근을 아예 금하는 '철벽 수비'형의 여자를 가리킨다.
이 "철벽녀"의 등장은 딱히 하자가 없는데도 비연애 상태인 사람에게 어떻게든 이유를 찾아내려는 욕구의 발현이다. 철벽녀/철벽남은 객관적으로 그리 문제가 없음에도 연애를 하지 않기 때문에 연구 대상이 되고, 결국 연애에 대한 애티튜드가 원인으로 지목당한다. 그리고 그들은 주제 파악을 못하고 현실을 잘 모르는 미숙한 존재, 누군가가 공들여서 그 마음의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 구원과 계몽의 대상으로 구성된다. 철벽녀와 철벽남을 향한 조언과 조롱은 대충 이렇다. "누가 사귀재? 밥 한번 먹자는데 왜 먼저 나서서 오버야?" 철벽녀도 입이 있다. 말 좀 하자. "그 한번이 싫다고, 쫌!"
그녀는 언제나 궁금했다. 도대체 왜, 언제나, 어디서나, 누군가에게나 '연애의 가능성이 있는', '누군가에게 매력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여지를 남기도록' 노력해야 하는가? 이것은 뷰티 프로그램이나 패션 사이트에서 툭하면 "남자들이 좋아하는 메이크업", "여친 생기는 옷"만 주구장창 반복하는 것에 대한 불만과도 상통한다.
"너, 그러고 다니면 남자가(여자가) 안 좋아해"
이런 말에 대해 저자는 당연히 항변한다. 자신이 뭐 걔들이 좋아하라고 태어났나? 세상은 온니(only) 연애로만 가득 차 있지 않고, 또한 사람이 늘 연애에 최적화된 상태로만 살순 없어요. 그리고 연애에 적극적이지 않은 태도가 왜 콧대가 높고 주제 파악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며, 이 말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쉬지 않고 연애하는 이들은 능력자가 되고, 쉬지 않고 공감 공동체와의 관계에 몰두하는 이들은 무능하고 눈치 없는 이로 몰아가는 데 동의할 수 없다.
모두가 이렇게 목을 매는 연애는 사실 근대적 개념으로, 발명되고 학습된 것이다. 이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하는 자연적인 감정으로서의 사랑과 연애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근대 이전의 동아시아에는 연애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선교사 메드허스트가 <영화사전>이라는 책을 펴낼 때 사랑(love)을 연애라고 번역했다는 말이 있고, 또 혹자는 1870년경 나카무라 마사나오가 'love'를 연애라고 번역한 것이 첫 용례라고 말하기도 한다. 1890년을 전후로 일본에서 일반화된 이 단어는 1912년 조중환이 <쌍옥루>라는 일본 번역 소설에서 사용하면서 한국에 수입되었다. 식민지 조선은 대부분의 서구 개념이나 근대 문물을 일본을 거쳐 받아들였는데, '연애' 역시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
'연애하지 않을 자유'는 연애의 자격을 다 갖춘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연애의 자격이 확보된 사람이 연애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생각, 즉 '연애=좋은 것', '할 수 있으면 안 할 리가 없는 것', '할 수 있으면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연애를 안 하는 유일한 방법은 못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연애는 발명되고 학습된 것으로서, 한국에서의 역사는 겨우 100년 남짓 되었고, 절대적이거나 운명적인 것이 아니다. 연애는 때로는 자본주의와 공모하고, 때로는 자아 발견 욕구와 만나고, 때로는 국가 통치 정책과 공명하기도 하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개념이다. 저출산 대책이랍시고 남녀 집단 미팅을 제시하는 사례도 있으니 말이다.
"사랑과 우정, 촌스러운 이분법"
연애든 우정이든 결국은 관계의 문제다. 어느 하나를 불변의,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는, 바람직한 이상으로 규정한다면 우리의 삶은 너무 협소하고 빈곤할 것이다. 세상에는 별처럼 많은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한 관계와 우정과 연애가 있다. 누가 무엇을 선택하고, 그 선택으로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려갈지는 그 사람의 자유다.
연애 대신 우정에 올인한다고 해서 불쌍한 것이 아니고, 우정 대신 연애에 올인한다고 멍청한 것이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가장 이상적인 밸런스야 치킨 주문시의 '반반 무 많이'겠지만, 그게 말처럼 쉽겠느냐 말이다. 그저 자신에게 알맞은 온도를 찾아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헤매는 과정의 연속이지 않겠나? 그저 내버려두는 게 중요하다. 이래라저래라하지 말자.
우리는 좀 더 엄격해질 필요가 있다. 어떤 성향으로 차별과 편견을 조장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최소한의 자각이 있다면, 나이에 대한 언급이나 강요를 삼가야 한다. 도대체 적절한 나이와 그에 맞는 행동은 누가 정했으며, 거기에 따르지 않는 것은 왜 문제인가? 그딴 것에 착취당하기에는 열성을 다해 좋아하는 감정은 너무나 귀하고 아깝다.
지금 연애하지 않는 자, 무죄를 선언하노라
연애를 하면 좋은 점이 분명 있다. 해 본 사람들은 이를 안다. 그런데, '좋다'에서 멈추지 않고 '연애하지 않는 너는 불쌍해'로 넘어가는 것이 문제다. 이것이 바로 연애지상중의의 문제점이다. 비연애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저자를 이런 연결고리를 끊고 싶어 한다. 이 책이 탄생한 배경이다. 나아가 그녀는 선언한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를 모두 무죄로 석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