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화 - 1940, 세 소녀 이야기
권비영 지음 / 북폴리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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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우리들의 우정과 찬란한 미래를 위해! 은화가 먼저 잔을 들었다. 정인이 다가와 잔을 부딪히고 한마디 보탰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꿈을 위해, 짠! 유리잔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했다. 마음속에 꿈을 품고 나니 이상하게도 느긋해졌다. 영실이도 목소리를 다듬어 한마디 했다. 꿈을 이루는 그날까지! 잔을 부딪히고 다정한 눈빛으로 서로의 손을 잡았다. 난생처음 먹어 보는 술은 영실을 금세 취하게 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꿈을 확인하고 친구도 얻으니 무엇이든 해낼 수 있겠다는 마음까지 갖게 되었다. - '프롤로그' 중에서

 

 

1940년대에 살았던 세 소녀의 이야기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심부름 가다 사라진 막걸리집 딸도 그렇고 옆집 과부 딸도 홀연히 사라졌다. 그렇기 때문에 영실의 등을 떠미는 어머니의 손은 인정머리 없다 싶을 만큼 매몰찼다. 영실은 국밥집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눈물을 닦았다. 어머니를 닮은 이모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나는 만주로 가야겠다. 네 아버지를 찾아야겠다. 너는 이모네로 가거라"

 

경성의 어둑어둑한 거리 '이모네 국밥집' 앞에서 어머니는 딸의 등을 떠밀고 사라진다. 이로써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와도 헤어져 홀홀단신으로 이모네로 오게 된 영실. 곰팡이와 술냄새 찌든 이모의 팍팍하고 신산辛酸한 살림을 바라보며 이제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음을 직감한다.

 

부모 생각과 못다 마친 중학교 학업 때문에 우울하던 영실은 개천 건너 으리으리한 기와집들을 구경하다가 그곳에 사는 또래의 여학생 은화와 정인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삶도 마찬가지로 순탄치만은 않다. 은화는 조실부모하고 기생집 주인에게 길러져 자신도 곧 기생이 되는 운명을 맞아야 한다는 두려움에 떨었고, 정인은 아버지가 일본 앞잡이인데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먼 타국으로 보내려 해 우울증을 앓는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막막한 삶 속에서 서로만이 살아가는 힘이 되어 우정은 한층 더 돈독해진다. 하지만 일본의 제국주의 야심은 조선을 말살시켜 흡수해버리려 했기 때문에 조선인에 대한 핍박은 날로 그 강도가 더 심해간다. 아무런 이유 없이 또는 일자리를 준다며 소녀와 장정들이 사냥되듯 끌려가고 부모가 지어 준 자신의 이름조차도 쓸 수가 없어진다.

 

역사와 사회에 소외되고 상처 받은 영혼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온 작가 권비영은 1995년 신라문학상으로 등단하였고 '소설21세기'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명감과 자존심을 걸고 집필한 작품 <덕혜옹주>는 100만 부가 넘게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후 다문화센터를 배경으로 가족해체 문제와 각박한 사회 모습을 돌아본 소설 <은주>를 발표했다. 그리고 다시 일제강점기로 돌아가 꺾이고 짓밟혀

 

 

 

 

 

 

아버지가 주재소 순사를 때리고 만주로 도피한 후, 아버지를 찾겠다고 어머니마저 영실을 이모에게 맡겨둔 채 만주로 떠났다. 국밥집을 운영하며 신산하게 살고 있는 이모의 형편을 미루어 볼 때 영실이 못다 마친 중학교 학업을 계속하기엔 역불급이다. 우울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운명처럼 두 소녀 은화와 정인이 나타났다.

 
은화는 부모를 잃고 화월각이라는 큰 기생집 주인의 손에 자랐다. 빼어난 외모에다 성숙하고 똑똑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길러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기생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괴로워한다. 정인은 아버지가 일본 앞잡이인데다 자신을 먼 타국으로 보내려 하기에 우울증을 앓는다.

 

세 소녀는 독립군의 은신처인 다리 아래 동굴을 아지트로 삼아 우정을 나눈다. 괴로웠던 일들도 별천지 같은 동굴에서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지면서 살아갈 수 있겠다는 기분마저 든다. 매사에 영원이란 없다. 시간이 흘러 날이 갈수록 상황은 녹록치 않다.

 

일제의 핍박은 독이 오른 듯 그 잔인함을 더해갔다. 정인은 결국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프랑스로 떠나고 은화는 기생을 회피할 목적으로 가출을 감행하다 무서운 곳으로 끌려간다. 그리고 홀로 남은 영실도 일본으로 떠난다. 과연 이 세 소녀들은 예전처럼 다시 웃으며 만날 수 있을까?

 

 

1940년대의 생생한 묘사 

당시는 온통 절망뿐인 세상이었다. 저자는 역사적 고증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고 섬세하게 그려낸다. 가출한 은화가 내몰린 거리의 풍경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잠깐 머문 여인숙의 주인은 집요하게 일자리를 제의하고 길거리의 벽보와 신문엔 위안부 모집 광고가 그녀를 유혹한다.

 

<위안부 모집>

 

연령 17세 이상 23세까지의 여성으로 후방xx부대 근무, 월수입 300엔 이상(선불 3,000원까지 가능) 

 

소설은 위안부뿐만 아니라, 강제 징용 피해 상황도 묘사하고 있다. 강제 징용 당해 온 사람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당한 채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일하는 탄광의 모습은 그야말로 생지옥에 가깝다.

 

 

등장인물의 다양성 

억척스럽고 정 많지만, 남자를 상대하는 데는 능수능란해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위해서라면 색을 파는 것도 대수롭지 않은 영실의 이모 을순, 을순의 정부情夫로 일본인이면서도 나라보다는 자신의 이해득실이 더 중요한 장사꾼 나카무라, 정인 네 머슴으로 주인댁 아들 대신 강제 징용에 끌려가서도 약자만 보면 보호하려 드는 우직한 사내 칠복, 정보력과 눈치 그리고 상황 판단력도 강해 탄광촌에서 박사로 불리며 칠복의 탈출을 돕는 쾌활한 남자 정한우 등 소설 속 등장인물의 다양하고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들이 극의 재미를 더한다.

 
한편 영실을 중심으로 잘생긴 엘리트지만 우유부단하고 허약한 도련님 태일, 비록 머슴 출신이지만 우직하고 영실을 끝까지 보호하려는 칠복과의 삼각관계가 케미를 돋게 한다. 또한 을순과 나카무라의 사랑과 잇속을 넘나드는 장사꾼적인 애정 관계 역시 풍성한 이야기를 만든다.

 

 

흥미로운 놀이 - 가투, 시조

소설에서 흥미로운 놀이 하나가 등장한다. 바로 '가투'다. 가투의 놀이 방법은 이렇다.

 

100장의 카드에 100수의 시조 초장 혹은 중장을 적어 놓고 '꽃쪽'이라 부른다. '엽쪽'이라 부르는 또 다른 100장에는 같은 시조의 종장만 적혀 있다. 꽃쪽 초장 또는 중장을 읽어서 엽쪽을 찾아내는 놀이, 가투 

 

소설에선 조선 총독부나 경시청 관리들의 부인이나 애인들이 모여 친목 도모를 위해 하는 놀이로 그려지고 있다. 이 놀이는 1920년대 선진문물이 가속화되던 시기에 삼일운동에 의해 시조가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문학 장르로 자리매김하며 자리 잡았고, 시조에 나오는 망국의 회고나 나라의 근심이 식민지 현실과 이어져 인기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시조는 가투에서 뿐만 아니라 소설 곳곳에 등장하여 한층 더 짙은 정서를 이끌어낸다.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의 광명이 너만 한 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영실은 뿔뿔이 흩어진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윤선도<오우가>를 읊고, 은화는 위안부를 겪으며 만신창이가 된 상처를 씻고자 자살을 결심하며 고려 숙종 때 정민교<간밤에 부던 바람에>를 읊는 장면이 나온다. 일본인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조선 처녀들을 위안부로 내세워 돈 벌이에 혈안이 된 강 씨 같은 인물은 너무나도 혐오스럽다.

간밤에 부던 바람에 만정도화 다 지거다
아이는 비를 들고 쓸오려 하는고야
낙환들 꽃이 아니랴 쓸어 무슴하리오.


부모도 나라도 없다. 일제의 광풍이 휩쓸고 간 자리엔 깊은 상처만 남았다. 이제는 죽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래도 살아있다면, 희망은 있다. 꽃송이는 떨어졌으나 희망을 꿈꾼다. 그래서 태어난 이름이 바로 몽화夢花다. 이미 지난 과거라고 쉽게 잊혀지는 게 두렵다. 일본은 고령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두 죽고 나면 생생한 증언이 없어진다고 믿지 않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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