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증언록 1~2 세트 - 전2권 -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김종필 지음, 중앙일보 김종필증언록팀 엮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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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의 증언에는 나의 국가관, 역사관, 사생관이 다 녹아 있다. 박정희 대통령을 지도자로 모시고 일으킨 5?16혁명은 새 역사의 분화噴火였다. 조국근대화의 비전이 결코 헛되지 않은 오늘, 온 국민의 피와 땀이 모여 세계 속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하면 된다'는 지도자의 결기와 4천만 국민의 세찬 각오가 어우러졌던 그 어제가 이런 오늘을 만든 것이다. 어제 없는 오늘은 없다. 뿌리 없는 열매는 결코 없다. 역사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꺾이거나 휘어져도 정의를 향해 연면히 나아간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불의가 잠시 승昇하는 듯해도 종국의 승리는 정의의 편에 있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나의 증언록이 이와 같은 역사의 진리를 증명하는 하나의 시금석이 되기를 소망한다. - '저자 서문'중에서

 

 

5.16혁명과 현대사의 물결을 증언하다

 

역사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꺾이거나 휘어져도 정의를 향해 연면히 나아간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불의가 잠시 승昇하는 듯해도 종국의 승리는 정의의 편에 있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운정 김종필은 "나의 증언록이 이와 같은 역사의 진리를 증명하는 하나의 시금석이 되기를 소망한다"고 책에서 밝힌다.

 

5천 년 가난을 벗어나 '남에게 신세지지 않는 나라 한번 만들어보자'고 궐기한 군사혁명은 마침내 '무항산 무항심'의 명언이 지향하는 바 민주복지 국가 건설로 이어졌다. 오늘의 우리가 누리는 민주와 복지는 경제 건설이라는 '항산恒産'이 있었기에 민주주의라는 '항심恒心'을 일구어낸 것이다.

 

역사는 역사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에다 해석을 입히는 것은 호사가나 역사가의 몫이다. 운정雲庭은 그저 굽이치는 현대사의 물결 속에서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사실'만을 증언하고 싶었고, 그래서 이 책에다 '증언록'이란 이름을 부여했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자서전' 내지는 '고백론'이란 타이틀을 붙이지만 굳이 이렇게 명명한데는 있었던 사실만을 얘기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바탕에 깔려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2014년 10월부터 시작한 <중앙일보>와의 인터뷰는 1년 동안 매주말 서울 청구동 운정의 집에서 진행되었다. 2015년 3월 3일부터 연재된 중앙일보의 '소이부답笑而不答' 기사는 12월까지 114회로 이어지면서 많은 독자들로부터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연재물을 가감없이 그대로 묶어서 책으로 출간했다.

 

 

 

 

 

 

처음 본 박정희

 

 

돌이켜보면 특별할 것도, 강렬한 점도 없는 짧은 만남이었다. 하지만 아흔에 이르러 회상해 보니 그 장면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나, 우리 둘이 처음 만난 장면 말이다. 육사를 8기로 졸업한 1949년 6월, 나는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장교로서 첫발을 디뎠다. 동기생 일곱이 정보국 전투정보과에 배치됐다. 발령식 때 정보국장이던 백선엽白善燁 대령이 우리에게 말했다.


 

"너희가 신고 드릴 분이 한 분 더 있다. 작전실로 가서 인사 드려라" 바로 옆 '작전정보실'이란 팻말이 붙은 작은 방으로 가서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 전투정보과에 배속된 신임 소위들입니다. 신고를 받으십시오." 작전정보실장이란 타이틀을 가진 사내는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검은 옷 탓이었을까. 참 키가 조그맣고 얼굴이 새카만 첫인상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계면쩍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나 박정희요. 근데 난 그런 신고 받을 사람이 못 돼. 거기들 앉게" 악수를 나누고 잠시 의자에 앉았다. 박 실장은 "내가 사고를 당해서 군복을 벗었다"고 간단히 본인을 소개했다. 이어 "육사를 우수하게 졸업한 장교들이라고 들었다. 환영한다"며 짧은 대화를 나눴다. 군복을 벗고 정보국의 문관으로 일하던 그분과의 첫 만남이었다.

 

 

미국, 박정희를 의심하다

 

'황태성 사건' 하면 1961년 KBS TV방송국 개국이 떠오른다. 1961년 여름, 나는 오재경吳在璟 공보부 장관을 만나 TV 방송국 설립 계획을 논의했다. 서로 뜻이 통했고 오 장관도 그런 구상을 갖고 있었다. 정부 예비비에서 1억 환을 마련해 TV 방송국을 연내에 짓기로 했다. 개국 예정일을 두 달 남짓 남겨놓은 10월 남산 기슭에 TV 방송국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그 즈음 내가 일본 도쿄에 가서 마주친 장면이 있다. 건물 위에서 내려다보니 집집마다 TV 안테나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 모습이 사뭇 부러웠고 또 속상했다. 우리나라도 집에 TV가 한 대씩 있는, 그런 나라로 만들어야겠다고 내심 다짐했다. 방송 스튜디오 건물은 착공됐지만 방송용 기자재를 사올 돈이 부족했다.


나는 오재경 장관을 불렀다. 중앙정보부는 그동안 간첩들로부터 압수한 공작금 20여만 달러를 갖고 있었다(1961년 20만 달러는 2억 6,000만 환). 거기엔 황태성이 가져온 돈도 포함됐다. 내가 "이 돈으로 방송 기자재를 사면 크리스마스이브에 개국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오 장관은 "해보겠다"고 했다. 나는 박 의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그 돈을 오 장관에게 넘겨줬다. 그 돈으로 카메라를 포함해 필요한 기자재를 미국에 주문했다. 결과적으로 김일성이 KBS TV 개국에 큰 역할을 한 셈이다.

 

 

 

 

 

 

 

한국 경제 발전의 주역, 정주영과 이병철


내가 총리로 재임하던 1971년 어느 날이었다. 삼성 이병철 회장이 총리실로 찾아와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장소를 찾아봤더니 경기도 용인 쪽이 제일 좋은데, 거기에 섞여 있는 국유지를 사지 못해 골치가 아픕니다"고 하소연했다. 무슨 일인가 물었더니 유럽의 티볼리나 미국의 디즈니랜드 같은 테마파크를 세우려고 계획한다는 것이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싶었다. 그가 "산림청이 땅을 나한테 좀 팔도록 해주시오"라고 부탁하기에 내가 산림청장을 만났더니 땅을 절대 팔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산림녹화가 국정의 주요 목표였던 시절이다. 하도 강경하게 반대하기에 머리를 짜냈다. 나는 이 회장에게 "정부 땅의 두 배쯤 되는 땅을 사서 주고 용인 땅과 교환하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제안했다. 그는 바로 "그거 좋습니다"며 반겼다. 산림청은 대토代土를 받고 삼성에 땅을 내줬다. 그 자리에 지금은 '에버랜드'로 이름이 바뀐 용인 자연농원이 들어섰다. 테마파크의 원조가 이렇게 탄생됐다.

 

 

육영수 여사의 서거

 

이튿날 아침, 청와대에서 호출이 와서 가니까 박 대통령이 "차지철이를 시키기로 했어"라며 말을 바꿨다. 뜻밖이었다. 내가 본 차지철은 그런 책임 있는 일을 맡길 인물이 못 됐다. 나는 "그래요? 차지철을요?"라고만 대꾸하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차지철을 추천했나. 내 머릿속엔 그 생각 뿐이었다. 세상에 알려지기로는 박 대통령의 사위인 한병기 전 대사가 차지철을 후임으로 추천했다고 한다.

 

그런데 진짜 추천인은 따로 있었다. 바로 돌아가신 육영수 여사였다. 생전에 육 여사는 "차지철 의원 같은 고지식한 사람을 데리고 일해 보시라"고 대통령에게 권유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고 효자로 알려졌고, 술, 담배를 하지 않는 차지철을 착실하고 믿음직한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마도 육 여사는 차지철을 박 대통령 곁에 두면 대통령 주변의 스캔들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나와 얘기를 나눈 그날 밤 육 여사가 없는 방에서 혼자 주무시다 밤새 생각이 달라졌다. 차 실장 임명은 육 여사가 남긴 유작遺作인 셈이다.

 

 

권력의 빈틈과 혼돈의 시절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이 치러지고 유신 시대는 사실상 끝났다. 18년 구질서는 헝클어졌으며 새 질서는 형성되지 않았다. 누가 새로운 시대를 만들고 끌어갈지 예측할 수 없었다. 절대권력이 사라진 거대한 공백 속에서 미래는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헌법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은 최규하 총리가 맡았고, 비상계엄이 실시돼 계엄사령관직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수행하고 있었다. 집권당인 민주공화당 총재 자리는 비어 있었다. 군과 정부, 정치를 관통하는 중심은 없었다. 그때 나는 몸을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당시 5선 국회의원이었지만 공화당에서 별 역할이 없는 총재 상임고문에 불과했다. 주요 당직자 중에서 나를 믿고 따라와 줄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박 대통령과 혁명을 같이한 혈맹으로서 새로 닥칠 시대에서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뒤를 이을 새 대통령을 선출하는 문제가 나라의 현안이었다. 당내 상당수 의견은 내가 후보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유신 대통령을 할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때 정치의 배후에서 실권을 행사하고 있던 군부도 나를 경계했다. 나는 박 대통령이 돌아가신 것으로 유신은 막을 내렸다고 판단했다. 새 시대에서 페어플레이를 하고 싶었다. 처삼촌인 박 대통령의 비참한 죽음을 보고 그 자리에 대한 의욕이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1997년 대선, 최후의 3김 격돌

 

1997년 10월 27일 밤 8시 30분. 김대중 총재가 한광옥 부총재를 데리고 청구동 우리 집을 비밀리에 찾아왔다. 나는 마당으로 마중 나가 그를 기다렸다. 김 총재는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다짜고짜 나를 포옹했다. 감정이 상당히 북받치는 모습이었다. DJ가 이런 방식으로 친밀함을 표시하기는 그날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인사를 한 뒤 갑자기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김 총재님,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간절히 부탁합니다"라고 했다.

 

나는 DJ를 소파에 앉도록 권하며 "그러잖아도 도와 드리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총재님(DJ)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수모와 박해를 당한 사람 아닙니까. 내가 그 원寃과 한恨을 다 풀어 드리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나는 1973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박 대통령이 시키지도 않은 '김대중 납치사건'을 저지른 일을 떠올렸다. 그 일은 이후락이 대통령의 신임을 다시 얻기 위해 낸 '자기가 죽을 꾀'였다. 내가 김대중에게 직접 고통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시점에서 나 외에 박 대통령을 대신해 그의 가슴에 맺힌 원寃을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겪은 전쟁과 사랑

 

중공군을 생포한 뒤 한 달쯤 지났을까. 세밑 금성천의 칼바람에 살이 에이는 듯했다. 연대장인 허영순 대령으로부터 사무실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전화를 건네주는데 육본 작전교육국 차장인 박정희 대령이었다. 박 대령은 출장차 인근 7사단장에게 왔다가 나를 찾은 것이다. 대령은 놀라운 사실을 전해주었다.

 

"여기 오는 길에 춘천 시장통에서 우연히 애를 업고 있는 옥이를 만났어. 자네가 중공군과 싸우고 있는데 죽을 거라는 소문이 나서 '같이 죽으러 왔다'면서 남편을 찾아왔다고 해. 빨리 가봐"


'옥'이는 아내 박영옥이었다. 연대장 허 대령은 고맙게도 자기 지프에 쌀 한가마니를 실어주고 아내를 만나고 오라고 했다. 춘천 거리는 폭격으로 집과 건물이 다 무너진 쑥대밭이었다. 급히 가서 보니 아내는 소양강 옆에 가마니로 바람막이를 하고서 애를 데리고 있었다. 아내는 "대구에서 서울까지 군수용 화물 열차를 타고 왔어요. 서울서 춘천까지는 GMC 군용 트럭에 태워 달라고 했고요. 당신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해서 무작정 올라왔어예"라며 엉엉 울었다.

 

돌 지난 딸 예리는 추운 줄도 모르고 이리저리 기어 다녔다. 연락병에게 부대에서 모포 대여섯 장을 가져오게 했다. 부대를 출퇴근하면서 일주일을 함께 지낸 뒤 아내를 대구로 내려 보냈다. 그때 40만~50만 군인 중에서 남편이 죽을지 모른다고 얼굴이 시커멓게 돼 가지고 그 고생을 하며 최전방까지 찾아온 여자가 또 있을까. 아내 박영옥은 그런 여자였다.

 

 

 

 

 

JP는 역사다

 

김종필의 삶은 현대사다. 한국 현대사는 격동과 파란이다. 그는 그 시대를 증언했다. 그가 연출한 시대다. 그가 몸담았던 시절이다. 성취와 고뇌, 좌절과 영광의 이야기다. 그는 군사혁명으로 세상에 등장해 5.16 혁명 공약을 만들었는데, '반공을 국시국시의 제1의義로 삼는다'에 숨은 사연을 밝혔다. 박정희 대통령이 소령 시절 좌익으로 몰려 구속, 예편당한 불행한 때가 있었으므로 주한미군은 그런 박정희를 의심했기 때문에 이를 잠재울 목적으로 일부러 그렇게 했다는 거다.

 

혁명은 야망의 분출이다. 1961년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겨우 100달러 수준이었으니 구습舊習을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던 그런 혁명은 애국심의 발로였다. 미국 CIA가 박정희를 견제할 목적으로 김형욱을 활용해 <김형욱 회고록>을 출간, 온갖 비난으로 박정희를 헐뜯었지만, 조작된 내용이 너무 많다고 그는 증언한다.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는 법정에서마치 자신이 민주화 투사인 양 행세햇지만, 그는 차지철과의 충성 경쟁에서 패한 후 발작을 일으켜 총을 쏜 살인범일 뿐이라고 증언했다. 그는 영원한 이인자였다. 권력은 냉혹하다. 이는 나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제거되지 않은 이인자였으니 그만큼 박정희도 순수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두 번의 국무총리, 9선 국회의원, 집권당의 당대표 등 노욕의 정치인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그는 당당하게 "내 무덤을 파헤치라고 하고 싶어"라고 했다. 한국 정치사에 앞으로 이런 인물이 다시 나올 수 있을까 싶다. 격동기의 한국정치사가 궁금하다면 이 책의 일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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