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김수환 추기경 2 - 인간을 향하여 아, 김수환 추기경 2
이충렬 지음, 조광 감수 / 김영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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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님의 선종 7주기인 올해, 전기작가이자 김수환 추기경님의 동성중고등학교 후배인 이충렬 실베스텔 씨가 김수환 추기경님의 87년의 삶을 복원한 전기를 지난 3년 동안 준비한 노력의 흔적이 역력합니다. 저조차 생각하지 못한 사진자료 또한 풍부해서 놀랐습니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두 눈을 이웃에게 내어주는 나눔을 몸소 실천하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참 행복의 길임을 알려주셨습니다. - 추기경 염수정 안드레아

 

 

미움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1980년 1월 1일 아침, 새벽잠에서 깨어난 김수환 추기경은 제의를 입고 3층 소성당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지난 10년 동안 희망으로만 품고 있던 민주화와 정치 발전이 질서 속에서 평온하게 이루어지고, 가난한 사람들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회, 병으로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이 위로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집무실로 온 김수환 추기경은 시계를 봤다.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과 몇 몇 군인 신자들이 새해인사를 오겠다는 시간이 가까워왔다. 전 소장은 2년 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 1978년 강원도 1사단 사단장으로 부인해 사단의 성당 준공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그는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가진 가톨릭 신자였다. 또 강원도를 관할하건 지학순 주교, 1사단 군종신부인 정인준 신부 등과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잠시 후, 전 소장 일행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모두 위풍당당했지만 추기경 앞에선 겸손했다. 새해 덕담이 오고간 후 12.12 사태 이야기로 넘어가며 전 소장은 "추기경님, 그때 정승화 총장이 10.26 박정의 시해 사건과 관련된 혐의가 나타났기 때문에 연행 조사가 불가피했습니다"라면서 당시 상황을 길게 설명했다.

 

한참 이야기를 듣던 김수환 추기경은 "전 소장 말을 들으니까 어떤 점은 좀 이해되는데, 근본적으로 우리나라 전체를 위한 정권이 서부활극 모양으로 돼서는 안 됩니다. 어느 쪽이 총을 먼저 빼들었느냐에 따라 군의 전권이 왔다갔다 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전 소장 쪽이 총을 뽑았기 때문에 군대의 실권을 잡은 것 아니오"라고 말했고, 전두환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 우리 국민은 정말 군이 나라를 위해 국방에 전년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라가 지금처럼 힘의 공백 상태에 있을 때 군인들이 다른 마음을 갖는 일이 생겨서는 절대 안 됩니다. 모두 중요한 위치에 계신 분들이니, 새로운 정부가 성공적으로 출범할 수 있도록 협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김수환

 

 

 

6.10 민주항쟁

 

1987년 6월 10일 오전 10시, 민정당은 잠실체육관에서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개최했다. 같은 시간, 무교동 민추협 사무실에서는 옥외방송을 통해 오후 6시 국민대회 참여를 호소했다. 점심때가 되자 무교동 식당으로 가던 지장인들도 민추협 회원과 민주당원들과 어울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이에 시민들도 동조했다. 시위대는 순식간에 2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경찰은 오후2시부터 최루탄을 발사하며 해산직전을 펼쳤다.

 

이날 명동성당에서는 오후 6시 30분에 '민주화를 위한 특별미사'가 진행되었다. 이 미사에는 고 박종철의 어머니가 참석해 400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드렸다. 2천여 명의 시위대는 민정당 대통령후보 지명 축하 리셉션이 열리는 남산 힐튼호텔로 향했고, 호텔 부근에서 경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이날 서울에서 시위는 밤 11시경까지 도심 60여 곳에서 계속됐다. 퇴계로와 신세계백화점 앞의 시위대 중 1천여 명이 경찰에 쫓기며 9시경부터 명동성당으로 들어왔다. 학생과 시민들이 섞인 시위대는 문화관에서 철야농성을 했다. 이후 김수환 추기경은 경찰로부터 학생들의 안전귀가를 보장받고 시위대를 설득해 자진해산시켰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다음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 김수환 추기경

 

 

 

나도 출마합니다. 지역구는 천국입니다

 

2002년 1월 14일, 김수환 추기경은 동아일보 이광표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지난 연말부터 몇 번이나 혜화동 주교관 비서수녀를 통해 간곡한 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자는 간단하게 근황을 묻고는 "추기경님의 숙소를 구경하고 싶다"고 했다. 이제까지 언론에 공개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숨길 것도 없어 침실까지 보여줬다.

 

다시 집무실로 내려온 후 그는 이 기자에게 "부탁을 들어줬으니 나도 부탁할 게 있다"면서, 자신의 얼굴 사진이 담긴 열쇠고리를 건넸다. "저도 올해 출마합니다. 기호는 1번입니다" 기자가 깜짝 놀라며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지역구는……", '지역구'라는 말에 기자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때 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천국입니다" 그 특유의 유머였다. 그러나 기자는 올해 80세 노老 추기경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말에 웃을 수가 없었다.

 

 

열린우리당을 향한 쓴소리

 

2004년 4월 28일, 김수환 추기경은 동국대 불교경영자 최고위 과정 초청 특강을 했다. 그는 '21세기 지도상'이란 주제를 놓고 새로운 정치의 지도자들은 독선과 배척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에 기반을 두고 국민들에게 봉사해야 하며, 자기와 생각이 다를지라도 그들의 소리에 귈를 기울일 줄 아는 것이야말로 새 시대의 지도자들이 갖춰야 할 덕목이라고 말했다.

 

특강이 끝난 후 한 수상생이 질문을 했다. 인터넷 언론 오마이뉴스가 칼럼에서 김 추기경을 비판한데 이어 후배되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함세웅 신부도 김 추기경을 시대에 뒤쳐진 분이라고 비판했음을 거론하면서 이에 대한 김 추기경의 심정과 입장을 정리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김 추기경은 이렇게 답변했다. 이 말은 오랫동안 언론과 사람들 입에 회자되었다.

 

"그런 비판을 한 분들께 감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분들의 지적은 저에게도 큰 교훈을 줍니다. 지금까지 너무 칭찬 말씀만 듣고 살아서 '나를 우상으로 만들려는가' 하고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죽어서 하느님 앞에 갔을 때 '너는 그동안 칭찬을 다 들었기 때문에 나에게 칭찬 들을 말은 없다'라는 말을 듣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했습니다. 비판과 욕을 먹는 것이 제 삶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강연에서 남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된다고 한 것은 저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2009년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은 전날부터 시작된 폐렴 증세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문병 온 정진석 추기경과 염수정 주교, 조규만 주교 등 서울대교구 주교단과 명동성당 주임 박신언 몬시뇰에게 "나는 너무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여러분들도 사랑하세요"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명동성당 종탑에서는 뎅그렁뎅그렁 열 번의 조종이 울렸다. 그가 늘 바라보던 십자가 아래에서는 추기경 휘장과 검은 리본이 바람을 따라 펄럭였다. 그의 나이 87세였다. 다음 날, 두 명의 시각장애인이 각막이식수술을 받고 눈에서 붕대를 풀었다.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빛이 보였다. 그가 세상에 남기고 간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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