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 제21회 전격 소설대상 수상작
기타가와 에미 지음, 추지나 옮김 / 놀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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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리에 방영중인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직장인이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보통 직장인들은 야근과 휴일근무에 시달리느라 여가를 누리기는커녕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아오야마도 그 처지가 마찬가지다. 짧은 휴식이 절실한 직장인들에게 소설은 손바닥만한 오아시스를 선사한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입사 반년 된 신입사원 아오야마는 취업에 성공했다는 안도감도 잠시, 계속되는 야근과 휴일근무, 그리고 일중독 부장의 구박에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회사를 쉬는 날에는 지쳐서 잠만 자느라 친구들을 만날 시간조차 없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 지하철역에서 정신을 잃어 선로에 떨어질 뻔한 그를 누군가 구해 준다.

 

이 사람은 야마모토이다. 자신이 아오야마의 초등학교 동창이라 주장하는 그는 이후로도 계속 찾아와 용기와 위로를 준다. 아오야마의 회사생활은 야마모토의 도움으로 조금 나아지는가 싶더니 다시 최악으로 치닫는다. 그 와중에 아오야마는 야마모토가 정말로 초등학교 동창이 맞는지 의심하게 된다. 게다가 야마모토에 대한 충격적인 뉴스 기사까지 발견한다.

 

도대체 미스터리한 야마모토의 진짜 정체는 무엇일까? 마치 지옥같은 회사생활을 하는 아오야마는 어떤 결말을 맞을까? 직장인이 공감하는 스토리로 웹툰 <미생>이 국내에서 인기를 끌자 곧이어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었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선 이 소설이 직장인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일본 아마존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했다.

 

 

 

 

13시 27분, 오늘만 세 번째인 상사의 호통.
19시 35분, 드디어 상사가 퇴근. 제발 좀 더 빨리 돌아가 줘.
21시 15분, 마침내 퇴근. 이 시간이 되면 전철이 띄엄띄엄 온다.
22시 53분, 귀가.
25시 0분, 취침.

 

인쇄 관련 중견 기업에 다니는 신입사원 아오야마의 하루스케줄, 토요일 출근은 당연한 일이고 일요일에도 죽은 듯이 자고 있다가 요란한 휴대전화 소리에 억지로 눈을 뜬다. 수화기 너머로 부장이 거래처에서 클레임이 들어왔다고 난리 부루스다. 이번 달은 벌써 2주 동안 쉬지 않고 일하고 있다. 이 지경이 되자 잠이 오는지도, 배가 고픈지도 모를 지경이다. 최근 반년 동안 몸 상태는 쭉 최악이다. 녹초가 되어 간신히 집에 도착해도 몇 시간 뒤에 또 회사로 가는 전철에 몸을 싣는다. 사실 신입때는 대부분 이렇다.

 

나의 신입사원 시절로 잠간 돌아가본다. 잔무를 처리하고 귀가한 시간이 새벽 3시경, 오늘은 빨리 퇴근해 집정리를 좀 해야겠다고 맘 먹는다. 간단히 세면하고 잠자리에 든다. 아침 5시, 차임벨 소리에 억지로 눈을 뜬다. 며칠 동안 새벽잠을 설치며 검토했던 영문계약서 드래프트를 어디에 뒀는지 책상 서류더미에서 찾느라고 면도는 뒷전이다. 오늘 회의 안건이기 때문이다. 찾았다. 서둘러 출근모드로 돌입한다. 아침부터 속이 쓰리다. 싱글남의 하루는 또 이렇게 시작된다. 이날 회의 발표자인 나는 엄청나게 까였다. 준비가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일찍 퇴근해야지라고 맘먹었지만 이날도 새벽에 귀가했다. 술냄새를 풍기며.

 

퇴근시간 전철역, 휴대전화의 진동모드가 부르르 떨고 있다. 망할 상사의 전화다. 거래처에 그렇게 엎드려 빌듯이 사과했는데 또 어쩌라구 전화질이야, 아오야마는 계속 떨리는 휴대전화의 전원을 끈다. 내일 출근해서 혼나면 배터리가 나갔다고 둘러대기로 맘먹었다. 만사가 귀찮아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는데 점점 지면이 두둥실 떠오르는 듯하더니 갑자기 오른팔에 충격이 전해졌다.    

떨어진다는 느낌이 든 순간, 그의 몸은 엄청난 힘에 이끌려 승강장 위로 휙 되돌아왔다. 아무리 봐도 믿을 수 없었다. 얇디얇은 '그 팔'은 175센티미터나 되는 그의 덩치를 너무나 쉽게 승강장 위로 되돌려 놓았다. 그 연약해 보이는 몸집에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이 뿜어져 나온 것이다. 멍해 있는 그에게 남자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야, 오랜만이다! 나야, 야마모토!"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남자는 초등학교 때 이후로 처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초등학교 4학년 올라가기 전에 오사카로 이사했다는 거다. 한잔하러 가자며 그를 회집으로 안내했다. 가지런한 앞니를 반짝거리는 야마모토는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모습이었다. 어떤 친구인지 몰라 미안한 마음으로 뒤따라 걸었다.

 

맥주를 주문하는 사이 아오야마는 화장실로 들어가 꼬박 2년 넘게 연락하지 않았던 초등학교 동창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가워하는 동창에게 단도직입적으로 혹시 야마모토를 기억하냐고 물어보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야마모토 겐이치를 기억하며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학교 동창이라는데 본인은 별로 추억이 떠오르지 않을 땐 이처럼 난감할 수가 없다. 아무튼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계산은 야마모토가 했다.

 

니트족이라는 야마모토는 영업직의 아오야마에게 말투는 표준어로 바꿔야 하고, 상대방을 치켜세울 기회가 있으면 뭐든 칭찬하며, 그리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먼저 듣고, 설명은 마치 초등학생 상대로 얘기하듯 천천히 친절하게 행하라는 등 인간관계나 대화법 등에 관해 유익한 조언들을 해주었다.

 

"고타니 제과랑 미팅이 있구나. 어때, 될 것 같아?"
"네, 느낌이 괜찮아요. 지금 철저하게 준비하는 중입니다"
"그래. 최근에 좋아 보이더라. 이게 체결되면 큰 건이야. 모르겠는 게 있으면 뭐든 물어봐"
"네! 감사합니다"


이 일이 잘되면 자신감을 얻게 될 거다. 날 응원해 주는 잘나가는 선배도 있다. 이보다 더 듬직할 수 없다. 이번만큼은 잘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무리 괴로운 일이고 체력적으로 힘들지라도 성과가 나타나면 정신적으론 편해진다. 마음이 안정되자 그의 건강도 좋아졌다. 이젠 잔업 따위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 그만큼 그의 현재 사이클은 무척 좋은 편이다. 결국 계약을 따냈다.

 

그런데, 지난번 화장실에서 야마모토의 신상을 문의했던 동창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다른 동창들에게 알아보았더니 야마모토 겐이치는 현재 뉴욕에 살고 있으며 공연관련 일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만나고 있는 야마모토는 초등학교 동창이 아니라는 해석이 된다. 도대체 그는 누구일까? 왜 그는 아오야마를 돕고 있을까? 귀가해서 컴퓨터로 확인했더니 동창인 야마모토는 분명히 뉴욕에 있었다.

 

아오야마는 야마모토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평소 늘 만나는 그 술집에서 둘은 만났다. 테이블로 생맥주가 나오자 그는 야마모토에게 "사실은 내 동창 아니지?"라고 돌직구를 날렸다. 하지만 야마모토는 의외로 "앗, 들켰네?"라는 반응을 태연하게 보임에 따라 오히려 말을 꺼낸 아오야마가 허를 찔린 셈이었다. 정작 야마모토 본인은 첫 날 이미 동창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거다. 면허증을 확인한 결과, 그의 이름은 야마모토 준이며, 나이도 세 살 위였다.

 

점심시간, 평소처럼 라면집 앞에 줄을 서 있는데, 이가라시 선배의 전화가 걸려왔다. 얼마전에 계약한 고타니 제과에서 클레임이 들어왔다는 거다. 즉시 사무실로 복귀했다. 납품 종이가 계약내용과 다르다는 이유였다. 사과와는 별도로 인쇄 공장에 연락해 납기를 맞추어 달라고 부탁했지만 결과는 야속했다. 결국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한 부장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할까? 말이 나오지 않자 대신 이가라시 선배가 이를 보고했다.

 

"그래서 너는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눈에 핏발을 세운 부장의 모습이 보였다. 분노로 얼굴이 굳어 있었다. 주위에서는 동료들이 숨을 삼킨 채 지켜보고 있다.
"너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고! 이 자식아!" 부장이 아오야마의 책상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어마어마한 소리가 울리고 옆자리 동료가 움찔하며 몸을 움츠렸다. 한심하게도 공포로 다리가 떨렸다. 이가라시 선배의 도움으로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수습은 잘 진행되었고 계약은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그 수혜는 모두 이가라시 선배의 몫이 되었고, 아오야마는 외근을 금지당했으며 전표 정리와 잡일을 도맡게 되었다.

 

심한 자책감으로 인해 자존감까지 추락하며 멘붕에 빠진 아오야마, 한동안 연락을 주고받지 못했던 야마모토로부터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 왔다. 맥주를 마시면서 아오야마의 얘기를 듣던 야마모토는 그게 진짜로 실수가 맞냐는 말과 함께 그런 회사라면 사표를 내는 게 좋겠다고 권한다. 하지만 아오야마는 쉽게 그런 결정을 내릴 자신감이 없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계약 내용대로 종이가 납품되지 않은 것은 그 계약을 중간에 가로챈 이가라시 선배의 농간이었다. 순진하고 만만한 아오야마를 봉으로 만들고 실속은 자신이 차리는 그런 못된 상급자였다. 나아가 부하직원의 세 치 혀에 놀아난 부장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진상을 철저하게 밝혀 시스템에 문제가 있지 않은지 확인해보지도 않은 채 무조건 신입사원의 실수로만 돌렸다.

 

"지금 회사 좀 관두고 올게"

 

회사 근처 2층의 카페로 야마모토를 불러낸 아오야마가 회사에 잠시 다녀올테니 기다리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며칠씩이나 무단결근하고 회사로 나온 아오야마에게 부장은 "뭐하러 왔어!"라고 분노를 터뜨렸다. 이에 아오야마는 카랑카앙한 목소리로 오늘부로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두 번 다시 이 곳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것이다. 후련한 마음으로 야마모토가 기다리는 카페로 헐레벌떡 달려 올라갔다. 그의 모습은 없고 메모만 맡겨져 있었다. 이후 전화 통화는 불가능했다. 없는 전화번호였다.

 

 

 

 

설연휴에 이 소설을 읽으며 내 젊은 시절이 자주 오버랩되었다. '한 우물을 파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가슴에 묻은 채 속이 끓어 오르는 분노를 참고 참으면서 직장생활을 이어나갔다. 직장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이다. 그래서 억울하게 대접받는 경우도 많다. 나는 결혼을 안 했다는 이유로 과장 승진에서 계속 누락되다가 늦게사 승진하는 그런 슬픈 추억도 있다. 물론 노총각 딱지를 떼어냈기에 가능했다.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그런 정글에서 살아남으려면 줏대가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실력을 갖춰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생존법이었다.

 

IMF 위기가 찾아오자 회사는 자구책을 위해 구조조정이라는 칼을 휘둘렀다. 직장인은 직장의 소모품이다. 그 빈 자리는 금방 채워진다. 이런 아픔을 겪으면서 왜 일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화두를 붙잡게 되었다. 나는 이 시기에 깨달음을 얻었다. 직장이 나의 인생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과감히 사직서를 던졌다. 이젠 나를 위해 살아야겠다고 판단했다. 아오야마의 사직 선언이 그 당시를 떠올리는 장면이었다. 지금도 마지 못해 끌려가듯 회사로 출근하는 직장인들에게 이 소설을 권하고 싶다. 참, 야마모토의 메모가 궁금한가? 

 

"인생이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지?"

- 야마모토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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