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세직司稅職 5급을乙류 공무원 임용시험
공고"
당시 사세직의 의미도 모르던 약관
20세의 고등학교 졸업생인 그가 그 광고를 주목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시험 과목 때문이였다. 국어, 영어, 수학, 일반상식, 그리고 맨 하단에
'상업부기商業簿記'라는 시험과목의 소개가 그의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상업고등학교 출신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는 인문계학교를 다녔기에 상업부기라는 교과과목이 없었다. 그런데 고교 2학년때 우연히 자신이 다녔던 중학교의 김석규
선생님이 그의 고등학교로 전근 발령이 났는데, 그 선생님의 담당과목이 바로 상업부기였다. 참고로 그가 가려 했던 대학교의 상과대학에서는
입시과목으로 '독일어'와 '상업부기'를 선택과목으로 택하게 되어 있어서 독일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어느 날 김선생님께서
교무실로 그를 호출해 당장 본인이 가르치는 '상업부기'를 수강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아울러 친구들도 많이 데리고 오라는 당부까지 했다.
그때 그는 몹시 난감했지만 선생님과의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생각해서 몇몇 친구들과 함께 상업부기 과목을 수강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고는 마치 자신을 위한 것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500명을 신규로 채용하는 그 시험에
무려 응시자는 5만 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살인적인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합격했다. 성적도 상위권에 속했다. 합격자 발표 후 국세청에서
근무희망지를 선택하라는 연락을 받고 잠시 서울로 가고 싶었지만 그 마음을 접고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 근처의 대구서부세무서를 택했다. 1966년
6월 20일, 그는 발령지로 첫 출근을 했다.
서울로
가다
또래 친구들이 대학생 제복을 입고
다니는 모습과 말단 공무원인 자신의 처지가 대비되어 대학생이 되고픈 열망이 마음 한 쪽에 활활타고 있었던 그는 이듬해에 야간대학으로 꽤나 유명한
청구대학(현, 영남대학교의 전신)에 응시해 야간부 전체 수석으로 합격했다. 4년간의 등록금이 전액면제되는 전면장학생이 된 것이다. 낮엔 초보
세금쟁이, 밤엔 대학생이라는 주경야독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루는 세무서장이 자신의 방으로
조용히 불러 계속 뒤를 봐 줄테니 공부를 계속하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참고로 그 서장님은 이미 작고하셨다. 한편, 착하고 어리숙한 관내의
사업체는 그에게 식사대접과 약간의 금품을 대접하면서 과세자료를 누락시켰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반성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스스로를 단련해갔다.
이후 당시 그를 아꼈던 주위의 선배들이 세금쟁이로 성공하려면 반드시 법인세 업무를 배워야 한다면서 그를 조사과 조사계에서 법인세과로 전근배치해
근무하게 했다.
법인세과에 발령받고 두 번째 실수를
하게 되었다. 술대접을 잘못 받아 재산관리과(관재과)로 전출되고 말았다.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약1년 동안 국유재산 관련법을 열심히 배울
수 있었다. 1968년 1월 중순, 경북 고령군 외딴 산골에 위치한 방앗간의 체납세금 2천 원을 받고자 하루 한 번 운행하는 시골버스를 타고
수금한 후 현지 막걸리 양조장 직원숙소에서 잠을 자고 이틑날 걸어서 면사무소 우체국에 납부했다. 이처럼 몸으로 때우는 일을 정말 열심히
했다.
서울에서 공부하고픈 그의 열망은 결국
성균관대학교 2부 상학과 편입시험으로 이어졌다. 2명 뽑는 시험에 68명이 응시했다. 시험을 마치고 곧바로 야간열차로
내려와 대구에서 근무하는데 합격 축하 전보를 받았다. 별 생각 없이 치른 시험의 결과에 그는 난감했다. 현실적으로 대구에서 서울로 야간대학을
다닐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 세정감독관으로 재직중이던
집안 형님뻘인 분에게 편지를 썼다. 세무공무원이 된 사연과 성균관대 야간대학에 편입시험에 합격했다는 내용을 적어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곧
국세청 본청에서 수도권에 많은 세무공무원을 배치할 계획이므로 그때 발령 받도록 힘을 쓰겠다는 답장을 받았다. 대학교 수강신청 즈음에 서울
동대문세무서로 배치 발령을 받았다. 열심히 일한 보답으로 8급으로 진급했다. 그때 그의 나이
22살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한창 젊음을 불태울
때였다. 일요일만 되면 서울에 올라와 있던 친구들과 흥청망청 어울렸다. 중간고사나 학기말고사, 그리고 리포트 과제들은 그에게 큰 골칫거리였다.
그는 군입대를 계기로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하지 않았다. 다른 재미가 생기니 자연히 공부는 멀어졌던 것이다. 그의 학력은 성균관대학교
중퇴다.
군 전역 후
복직하다
1973년 3월 15일, 그는
35개월 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서울 용산세무서로 복직했다. 군복무 시절 어려운 가정형편에 모친의 죽음을 맞는등 개인적으론 고통의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그 즈음 그의 부친은 남가좌동 모래내시장에서 1평짜리 좌판을 얻어 양말 등 생활용품을 팔고 있었다. 그래서 가족들과 상의해서 시장
부근에 위치한 단독주택에 전세를 얻었다. 그 당시 부친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가난이다. 그러니 너는 악착같이 일해서 부자가 되어
남에게 돈을 꾸는 자가 되지 말고 꾸어주는 사람이 되거라!"
입사한지 꼭 9년 만인 1975년
6월 25일, 그는 7급으로 승진했다. 열달 후엔 마포세무서 법인세과로 발령받았다. 그런데, 그 해에 종합소득세 제도가 처음 실시되었는데,
부득이 개인세과 업무 지원을 위해 차출이 필요했고, 그도 여기에 포함됐다. 당시엔 여의도 일대가 마포세무서 관할이었기에 불가피한 조치였다. 똑
부러지게 업무 처리를 한 그를 눈여겨 본 개인세 과장이 그를 붙잡았다. 이후 갑자기 국세청 본청 소득세과로 발령을 받았다. 1976년 9월
하순이었다.
재산세계 양도소득세 업무를
배정받았다. 그즈음 마포세무서에서 대형 사고가 터졌다. 교과서 제작회사로부터 금품수수와 술접대 등을 받은 것이 드러나 잠시 그가 적을 두었던
법인세과 법인2계 전직원이 검찰에 송치되었던 것이다. 이 비리에서 살아난 사람은 당시 개인세과 업무지원에 차출된 2명뿐이었다. 당시 법인세
업무를 떠나게 돼 매우 섭섭했는데, 전화위복인 셈이었다.
국세청 소득세과 재산세계는 계장 밑에
모두 3명이었다. 차석은 상속세, 증여세, 주식이동조사 업무 등을, 다른 한 분은 양도소득세 법령 업무를, 저자는 관련통계 업무와 일반 서무를
맡았다. 당시 서른 살, 나이가 제일 어렸기에 각종 행사에 둥원되는 일을 전담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선임자 둘 모두 일선 세무서로 전출됨에
따라 혼자서 북치고 장구 쳐야만 했다. 일복이 터졌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제산세제 관련 업무에
능숙해졌다.
1977년경부터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개발지역 등에서 부동산 투기 광풍이 불었다. 당시엔 부동산 투기 전담반이 없었기에 양도소득세를 담당하던 저자가 이 일을 맡아야만 했다. 여의도
목화아파트, 도곡동 개나리아파트, 반포아파트 등 강남 요지에 신규 아파트가 분양되면서 아파트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 틈에 미등기
전매업자와 부동산 중개업자들이 세금 없이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1978년 1월, 서울 강남 4개
아파트 지구와 개발 붐이 이는 전국 158개 동洞을 부동산 투기 지역으로 고지하고 이 지역에서 부동산을 거래할 때는 실지거래금액을 조사하여
양도소득세를 중과했다. 이를 시작으로 그는 한자리에서 이 업무만 계속했다. 당시 매년 연초에 사무관 이상 간부들의 인사이동이 단행되어 상관들은
예외없이 1년만 되면 교체되므로 그는 붙박이가 되고 말았다. 그는 1988년 7월 말 일선 세무서장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양도소득세와 투기
억제 업무만 담당했다.
결혼하다
하루는 일찍 귀가하라는 여동생의
연락을 받고 일찍 집으로 도착을 해 보니 왠 낯선 여성이 함께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순간 평소 그가 그렇게도 꿈꾸던
환상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예쁘기도 했지만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데 당시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더구나 고향도 같은
지역이었다.
이튿날부터 여동생을 부추겨 그녀에
대해 자세히 알아 보라고 재촉했다. 며칠후 동생은 그녀가 1남6녀 중 맏딸이며 경북여고를 거쳐 이화여대 법대를 졸업하고 가정법률상담소(당시
소장은 작고하신 이태영 박사)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귀뜸해 주었다. 여고 3학년때 그녀의 부친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으며 또한 그녀도 자기 집안 식구들을 잘 챙겨 줄 남편감을 찾고 있다고 했다. 그의 평생 짝꿍이 된 그녀는 현재 성석장학회
재단이사장이다.
삼수 끝에 그는 사무관 시험을
통과했다. 나이 마흔, 세금쟁이 30년째였다. 아버지의 사망, 두차례의 사무관 낙방 등 삼재三災라는 고통의 긴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1988년 7월 말, 사무관 인사이동 때 그는 비교적 업무가 단순한 부천세무서 부가세2과장으로 발령받았다. 그러면서 국세공무원교육원에서 재산세제
관련 교관직을 함께 겸했다. 오전은 부천세무서, 오후엔 수원 교육원에서 근무했다.
국세청 공보관이
되다
2001년 초, 그는 국세청 공보관실
업무를 맡게 되었다. 부임 첫날부터 매일 국세청 관련 기사를 살펴보고 틈날 때마다 출입기자들과 친분을 교류했다. 당시 중앙 언론사는 통신사,
중앙 일간지, 방송사 등 총 23개였다. 어느 한 곳이라도 가볍게 대할 수 없었다. 해당 매체에서 파견한 출입기자 모두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출입기자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 항의를 했다. 내용을 파악해보니 "국세청, 전국 23개 중앙 언론사에 대한 특별 세무 조사
실시"라는 기사 송고 때문이었다. 황당한 건
공보관인 자신도 국세청에서 미리 통보받은 바가 없었다. 그는 바로 국세청장에게 항의했다. 돌아오는 답변은 오전에 담당국장한테서 연락 못 받았냐는
것이었다.
진실은 보안을 지킨답시고 공보관까지
제치고 출입기자 한 명 한 명을 불러 개별적으로 통보했던 것이다. 불과 한두 시간 후면 세상에 다 알려질 일인데 말이다. 그래서 그는
국세청장에게 "수십 년 공직자 생활 중 이렇게 심한 모멸감은 처음 느껴 봅니다"라고 말했다. 지금도 그는 그때의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다
2002년 8월 하순, 그는
서울지방국세청 납세지원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은 세수稅收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징세과와 세금 부과에 불복하는
납세자들의 고충과 심사 업무를 담당하는 법무 1,2과를 비롯해 전산 시스템을 관리하는 전산관리과 등 업무 성격이 전혀 다른 4개 과로 조직되어
있었다. 이곳은 대부분 발령을 기피하는 곳으로 근무자들의 사기는 바닥 수준이었다.
며칠 간 고심 끝에
그는
'다일多一' 정신을 일깨워 주기로 했다. 그는
1998년부터 청량리에 있는 '다일 밥퍼나눔운동본부'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이를 주관하는 최일도
목사에 따르면 다일이란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추구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즉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일들을 하지만 목표는 하나라는 것이다.
그는 어깨가 축 처져 있는 150여
명의 소속 직원들에게 비록 환경이 어렵더라도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즐기면서 일해 보면 나중에 그것들이 우리에게 큰 재산으로 되돌아 올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그러면서 틈틈이 세금쟁이 선배로서 지난 30여 년의 경험들을 진솔하게 들려주기도 햇다. 그러자 많은 직원들이
공감했고, 그를 신뢰하고 따랐다.
그때부터 그도 본격적으로
'다일 밥퍼나눔운동'에 적극 관여했다. 2007년에는 '명예본부장'이라는 귀한 직함을 받아 지금까지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이젠 '다일'이 널리 알려져
'나눔과 섬김'의 대명사로 통한다. 아내의 제안으로 시작한 부부사랑모임인 '마태모임'을 2003년 4월부터 2010년 4월까지 운영하면서 많은 세금쟁이 천사 부부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명예퇴임 그리고 인생
후반전
2004년 12월 30일,
대전지방국세청장을 끝으로 그는 국세청 조직을 떠났다. 2005년, 서울 강남 테헤란로에 위치한
법무법인의 회장직을 제안받고 주주로서 당당하게 일하고 싶어 전체 지분의 3분의 1을 퇴직금 등으로 투자했다. 마침내 2015년 11월 11일
세무법인 석성石成이 출범되었다. '석성'은 그의 부모 이름의 가운데 글자를 따온 것이다.
사실 석성은 1994년에 이미
출범되었다. '석성장학회'가 바로 그것이다. 아버지가 작고하면서 물려준 구의동의 한옥 한 채를 팔아 생긴 5천만
원을 종잣돈으로 10년 간 재테크해서 조성된 2억 여원으로 장학사업을 시작했고, 2001년도에 재단법인화했다. 그의 부인이
이사장이다. 석성장학재단을 모태로 세무법인 석성이 설립되었다.
세무법인 석성에서 발생하는 매출액의
1%를 성석장학재단에 기부하는 조건은 다른 곳에서 좀처럼 찾기 힘든 케이스이다. 마치 교회의 십일조처럼 지금까지 이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준수하고 있다고 한다. 과거의 어려웠던 시절이 이런 약속의 실천을 충분히 감당하도록 만드는 듯하다.
검찰청 앞마당에
세금쟁이 조각상이 세워지다
2011년 11월,
서울고등검찰청으로부터 현직 간부 검사들과 사회 각계 전문가로 구성되는 항고심사위원회에 민간위원으로 추천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부당한 수사로 억울한
국민이 생기지 않도록 한다는 자문 역할이기에 그는 이를 수락했다. 이를 계기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2012년 5월 31일
서울고등검찰청에선 전용 청사 준공식 행사를 가졌다. 그는 법무부장관, 일선 검사장 및 검찰 간부들과 함께 민간인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특별히 동 행사엔선 시민과 함께하는 검찰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청사 앞 잔디광장에 청동으로 만든 조형물을 설치했다. 여기에 그의 얼굴이
포함되었다. 그간의 나눔과 섬김의 활동들이 참작된 것이다.
"다시 태어나도 세금쟁이로 살아갈
거야!"
이는 그가 지금도 가족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그는 후배들에게 지금부터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인생
후반전'을 잘 설계해 보라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지금 서평을 쓰고 있는 나는 부당한 세무조사를 당한 경험과 이로 인해 사업체를 접었던 불운을 겪었기에 세무공무원에 대해서 나쁜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훌륭한 공무원도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