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읽는 중국사 2 - 삼국시대에서 당 왕조까지 만화로 읽는 중국사 2
류징 글.그림, 이선주 옮김 / 레디셋고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한漢 왕조가 400년 넘게 통일을 유지했던 중국은 다시 400년 동안의 분열 시대에 접어든다. 이 기간은 잦은 내란과 외적 침입으로 인해 중국 역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질서를 회복할 강력한 중앙정부가 없었기에 지역의 세력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군사들을 키웠고, 이로 인해 귀족 세력이 강해졌다. - '서문' 중에서

 

 

위, 촉, 오 삼국시대에서 당 왕조까지

 

불안 심리가 극도에 달하면 사람들은 자신을 의지할 뭔가를 찾는다. 대개는 종교에 기대 구원을 얻고자 한다. 국가이념이었던 유가儒家는 한 왕조의 몰락과 함께 쇠하게 되었다. 유가를 추종하던 관리들은 마음의 평화를 찾아 현학玄學 운동을 시작했다. 현학이란 철학 사조를 말한다.

 

중국 북쪽 지방을 정복한 이민족 통치자들은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도에서 유입된 불교를 이용했고, 중국 귀족들은 불교에 맞서 도교道敎를 확립했다. 전쟁이라는 혼란의 시기를 거치면서 인간들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답을 구하려고 했다. 그러면서 사상은 다양해지고 중국 문화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 들었다.

 

오랜 분열이 계속되다가 6세기에 수隋 왕조가 중국을 통일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그 뒤를 당唐 왕조가 이었다. 당의 통치자들은 제국을 재건하고 국경을 튼튼히 했다. 건국한 지 40년 만에 당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이 되었다. 반면 당시의 유럽은 중세 암흑기에 빠져 있었다.

 

당나라의 황금기도 그리 길지 않았다. 제국의 경제와 인구의 규모가 커지면서 황실이 이를 제대로 통치할 능력을 갖추기 못했기 때문이다. 갈수록 늘어난 현안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요구되는 리더십의 부재가 가장큰 원인이었다. 즉 중앙정부는 복잡하게 파벌이 얽혀있어 행정 마비 상태였던 것이다.

 

자연재해가 발생하자 이미 쇠약해진 나라는 백성들을 구호할 힘도, 반란군과 싸울 힘도 없었다. 25년간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났고, 이 와중에 수백만 명의 백성들이 죽어 나갔다. 귀족 사회의 붕괴와 함께 천년 전통도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통일 제국 당 왕조도 결국 '왕조 순환의 이론'을 피하지 못하고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분열의 시대(220~589년)

 

184년, 중국 북쪽에서 번진 전염병, 황허의 범람, 기근과 무거운 세금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반란의 리더 장각은 중국의 민간신앙에서 차용한 요소들로 신흥종교인 '태평도太平道'를 만들었다. 당시의 핍박한 삶을 감안할 때, 세상을 치유하고 더 좋은 곳으로 만든다는 태평도는 충분히 먹혀 들었다.

 

한나라 황실은 온 국력을 동원해 6개월 만에 주요 반란 세력을 진압했지만, 이후에도 소규모 봉기는 21년 동안 계속되었다. 질서 회복이 최대 현안이었던 한나라 영제(156~189년)는 지방 통치자들에게 권력을 위임했다. 즉 세금을 걷어서 반란군에 맞설 군대를 양성해 맡은 지역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영제가 죽자 황후 가족과 환관들이 후계를 놓고 다툼을 벌였다. 국경에 나가 있던 동탁이 군대를 이끌고 수도에 진입해 황실을 장악했다. 그러자 한나라 13개 지역 통치자들은 연합을 형성해 동탁에 맞섰다. 이후 동탁은 수도를 창안長安으로 옮기면서 뤄양洛陽은 완전 전소시키고 말았다. 2년 후, 동탁은 자신의 심복 장수 여포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반동탁 연합도 끝나고 무주공산이 된 국토를 군벌軍閥들이 각각 차지해 나라를 세우기 시작했다. 이후 30년 동안 이들은 서로 갈등을 빚으며 무려 120번이 넘는 전쟁을 치렀다.

 

 

 

삼국 시대에서 남북조시대까지

 

우리들이 익히 삼국지를 통해 알고 있는 위나라, 촉나라, 오나라의 삼국이 대립하는 국면이 진행된다. 이 중 조조가 이끄는 위나라가 가장 넓은 영토와 인구를 거느리며 제일 강성했다. 유비가 이끄는 촉나라의 국력이 제일 약했다. 촉은 손권의 오나라와 동맹을 맺고 위나라 공격을 위해 16차례나 원정을 떠났다. 아래를 참고하면 이해가 쉽다.

 

  

 

"화설천하대세話說天下大勢, 분구필합分久必合, 합구필분合久必分"

- 소설 <삼국지연의>의 첫 문장

 

이 말은 '세상이 돌아가는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오랫동안  나뉘어 있었다면 반드시 합쳐질 것이고 오랫동안 합쳐져 있었다면 반드시 나뉠 것이다'라는 뜻이다. 위, 촉, 오 삼국의 대결에선 결국 위나라가 촉나라를 정복한다. 그러나 위나라는 내부 문제로 붕괴되는데 265년 사마염 장군이 황위를 찬탈해 진晉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280년, 진이 오나라까지 멸명시킴으로써 삼국시대는 막을 내렸다.

 

사마염, 즉 진나라 무제(236~290년)는 군인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고 집집마다 약간의 땅을 지급해 수확량의 반을 나라에 세금으로 납부하도록 했다. 귀족과 관리들은 평민보다 최소 10배가 넘는 땅을 받았지만 세금은 적게 내거나 아예 내지도 않으면서 사치스런 생활을 즐겼다.

 

무제가 죽자 나라는 파벌 싸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새 황제의 아내와 섭정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8명의 진나라 왕자들은 서로 황실을 차지하려고 다투었다. 황제의 자리는 하나인데, 자식이 많으니 시끄러울 수밖에. 덩달아 지방 귀족들도 편이 나뉘어 각자 원하는 왕자를 지지하면서 싸움을 키웠다. 내전이 15년 동안 이어졌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이민족 유목민이 311년에 뤄양과 316년에 창안을 점령하면서 진나라의 황제를 포로로 붙잡았다. 이에 진나라 황실은 북을 포기하고 남으로 후퇴함으로써 마침내 서진 시대는 막을 내렸다. 317년, 진나라 황족이 황제에 올라 새로운 동진 시대를 선포했다. 북의 귀족들은 잠시 고향을 떠난다고 생각했지만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동진은 북쪽 땅을 찾기 위해 100년 넘게 13차례의 군사작전을 펼쳤지만 유목민들은 강했다. 오히려 그들은 남쪽 중국 왕조를 크게 위협했다. 376년, 저족은 새로운 왕조 전진前秦을 세우며 중국 북쪽을 통일했다. 383년, 전진과 동진은 비수에서 만났다. 군사력이 압도적인 우위였던 전진은 동진의 유언비어 살포에 힘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대패하고 말았다. 이 전쟁이 유명한 비수대전이다. 이후 전진은 작은 나라들로 분열되고 만다. 북위, 후량, 서진, 후진, 서연, 후연 등이 그것이다.

 

비수대전 후, 대승리를 거둔 장군은 420년 스스로 황위에 올라 나라를 송宋(유송)이라 칭했다. 439년, 선비족이 위나라(북위)를 세워 중국 북쪽을 통일했다. 남과 북 모두 자기들이 중국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통치자라고 주장했다. 이 시기를 바로 '남북조南北朝'시대(420~589년)라고 말한다.

 

 

 

불교의 전파

 

중국 대륙의 북쪽에 사는 수백만 백성들은 늘 위협에 시달렸다. 전쟁과 군대 징집, 무거운 세금의 부과, 힘든 노동 때문에 괴로음이 만연되어 있었다. 이처럼 삶이 팍팍해지면 상대적으로 종교가 더 번창하게 되는 법이다. 이때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는 기존의 중국 문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해결책을 제시했다.

 

불교는 중국의 신념체계에는 없었던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었다. 기존의 유교는 아직도 삶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죽음에 대해 알겠느냐는 입장이었고, 이후 등장한 도교는 연금술과 명상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주장했으나 연금술에 필요한 약물이나 광물 등에 소요되는 비용이 커서 부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반면, 불교는 열심히 수련하면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중국 남쪽의 양무제(464~549년)는 유교, 도교, 불교를 정치철학의 단계에 따라 다르게 활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젊을 때는 이민족의 침략을 물리치고,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나라를 세우는데 군사력을 이용했고, 치국을 위해선 유교의 원칙으로써 사회질서를 구축했으며, 이후엔 도교의 철학을 통치 철학으로 수용했었다. 쉰 살이 넘어선 불교에 눈을 떠 이를 국가 종교로 채택했다. 그는 여러 차례 사찰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집무와 명상을 병행했다.

 

그런데, 양나라에 투항했던 북쪽 출신의 무장 후경이 변심해 548년 양나라의 수도를 공격함으로써 양무제는 궁궐에서 포위되고 말았다. 그 기간이 6개월 이상 이어지자 수도에 살던 주민 12만 명 중 불과 2천 명만 살아남았다. 후경은 궁궐로 침입해 최후의 공격을 했지만, 양무제의 "전투가 정말 오래 계속됐군. 피곤하지 않나?"라는 말에 퇴각하고 만다. 몇 달 후 양무제는 86세의 나이로 굶어 죽었다.

 

이후 내란이 뒤따랐고 남북간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북쪽 나라들은 남쪽을 침략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양나라는 분열 시대 중 가장 긴 40년 동안 번영한 나라였다. 그런데, 후경이란 인물이 불과 4년이란 짧은 기간에 이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557년, 양나라의 옛 장군이 양나라의 남은 지역을 장악해 새로운 진陳왕조를 건국했다.

 

 

수나라의 탄생(589~618년)

 

     

 

선비족과 다른 유목민족들은 몇 대에 걸쳐 중국 북쪽의 한족들과 결혼함으로써 결국 한족으로 동화되었다. 오늘날의 한족은 중국 인구의 92%, 세계 총 인구의 20%를 차지한다. 이는 지구촌에서 가장 큰 규모의 민족 집단인 셈이다. 581년, 새로운 혈통의 한족인 문제(541~604년)가 중국 북쪽에서 수나라를 세웠다.

 

588년, 수나라는 51만 8천 명의 군대를 소집해 남쪽의 마지막 남은 나라 진陳을 굥격했다. 진은 저항하기에 너무나도 벅찼다. 589년, 마침내 수나라는 약 400년 간 지속되어 온 분열의 시대를 종식시키며 중국 대륙을 통일했다. 수 왕조는 강력힌 중앙집권을 위해 이전 왕조들의 통치제도를 개선했다. 만리장성의 축조와 인공 수로인 대운하 건설이라는 대규모 개발사업으로 나라의 지형을 바꿔놓았다.

 

수나라의 외부환경

 

북~ 트르트족

북서~ 비단길을 지배하는 토욕혼(선비족의 분파)

서~ 티베트족

북동~ 고구려, 거란족

남~ 참파족(현재의 베트남)

 

국경을 확보한 수나라는 이웃 국가들의 항복을 모두 받아냈지만 유일하게 고구려만 항복하지 않았다. 수나라 황제는 고구려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영토나 군사력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구려가 다른 민족들과 동맹을 맺고 수나라의 국경을 급습하자 수나라는 598년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그러나, 악천후와 전염병이 불리하게 작용했고 고구려의 매복 작전에 유린당하며 완패하고 말았다. 사상자는 90%에 달했다.

 

두 번째 황제 양제(569~618년)는 복수를 위해 612년 100만 대군을 이끌고 전쟁에 나섰다. 30만 5천 명의 별동대가 고구려 영토에 진입, 수도 평양으로 진군했다. 이들은 넓고 평평한 계곡에 위치한 살수에 도달했다. 정찰병은 강의 유속도 느리고, 깊이 또한 얕음을 확인햇기에 도강을 감행했다. 이 날이 바로 그들의 제삿날이었다. 미리 강 상류에 제방을 쌓고 물을 가두고 있었는데 수나라군이 도강을 하자 이를 무너뜨렸던 것이다. 갑자기 빨라지고 높아지는 강물에 허둥댈 때 고구려 기병대가 맹렬히 공격했다. 겨우 2천7백 명만 중국으로 되돌아갔다. 이후에도 양제는 고구려 공격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자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황실경비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당나라의 재통일

 

수 양제의 사촌인 이연(566~635년)이 어지러운 수나라의 수도를 점령하고 당나라를 세웠다. 반란 세력들과의 전쟁이 이어지다가 결국 10년 만에 모두 격퇴하고 중국을 재통일했다. 수나라 시절 펼쳣던 군사작전 덕분에 주변의 유목민 세력은 이전보다 훨씬 약해져 있었기에 당나라는 순조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는 데 40년이나 걸렸다.

 

          

 

그러나 당나라 초기에 일반 백성들의 삶은 녹록하지 않앗다. 도시와 농촌 간의 격차는 컸다. 나라는 농부들에게 경작할 땅을 주었으나 이들은 곡물, 옷감, 노동력 등의 세금을 납부해야만 했다. 그리고 땅을 받은 이상 다른 곳으로 쉽게 이동할 수도 없었다. 반먼 도시에선 상류층이 관직의 95%를 차지하면서 옷감, 도자기, 술, 설탕, 소금 등 수익성 좋은 사업들을 운영했다. 법에 의한 불평등은 점점 커졌다. 그래서 색깔로 계층을 구분했다.

 

 

 

 

무측천(624~705년)의 등장

 

중국 역사에서 무측천, 즉 무조의 이야기는 빼놓을 수가 없다. 그녀는 태종 이세민의 후궁이었는데, 태종이 죽자 황위를 이은 고종(628~683년)의 마음을 얻어 나랏일을 돌보게 되었다. 고종은 건강 때문에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을 무측천으로 선택한 셈이다. 이후 고종이 죽자 나라의 모든 실권은 그녀가 장악하고 있었다.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당의 많은 충신들은 무측천의 도덕적 결함을 이유로 그녀의 통치를 반대했다. 이에 그녀는 비밀경찰을 조직해 반대 세력들을 조직적으로 고문하고 처형하면서 혹독하게 다루었다. 이후 그녀는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해 불교를 이용했다. 대부분의 황족들은 도교를, 나라의 관리들은 유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유기의 주인공 현장(602~664년)은 중국으로 귀국한 후 오랫동안 무측천의 후원을 받았다.

 

65세에 그녀는 아들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위에 올라 주周 왕조(690~705년)를 선포했다. 자신은 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온 부처의 환생이라고 주장했다. 불교 국가의 이미지를 높이려고 그녀는 불교 사찰에 의료, 교육, 숙박, 대출, 자선 등 엄청난 특권을 부여했다. 또 불교 경전의 표준화를 위해 대규모 간행 사업도 후원했다. 현존하는 중국 최초의 목판 인쇄 책은 이때에 탄생했다.

 

 

 

705년, 팔십 세의 무측천이 병에 걸리자 관리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그녀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복구된 당의 왕조는 계속 성장했다. 현종의 통치하에 경제, 문화, 둔사, 인구 등에서 최고의 번영기를 누렸다. 705년 3,700만 명이던 인구가 754년 5,200만 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특히, 그는 문화를 사랑했는데 악기를 연주하며, 작곡까지 했다. 궁궐에는 약 1만 명의 예능인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가 아끼던 양귀비(719~756년)는 가수, 무용수, 음악가, 작곡가, 시인이었다.

 

군사령관들이 나랏돈으로 사병을 얻어 세력을 키움에 따라 황실과 군사령관들 간에 갈등이 점점 커졌다. 커진 갈등은 폭발할 수밖에 없다. 755년, 투르크족 장군 안녹산(703~757년)이 반란을 일으켜 16만 4천 명의 정예병이 당나라 수도로 진격했다. 후퇴를 하던 현종에게 황실 경비대가 반기를 들었다. 이후 황태자 이형(711~762년)이 스스로 숙종이라 칭하며 황제에 즉위했다. 숙종은 외세인 위구르족의 도움을 받아 창안을 되찾았다. 8년 만에 안녹산의 난은 평정됐다.

 

황실은 반란군 진압에 조력한 40여 명의 군사령관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다스리는 땅에서 왕처럼 행동했다. 황실이 지방의 정치와 경제에서 손을 떼자 지방은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당나라 말, 나라는 분열된 채 쇠약해졌다. 859년부터 수십 년간 계속 폭동이 발생했다. 최악의 폭동은 '황소의 난'이었다. 귀족이 무너지면서 당나라도 종말을 맞이했다.

 

 

 

 

또다시 분열의 시대로

 

당나라의 멸망 후 중국은 또다시 분열의 시대로 들어섰다. 북으로는 침략해오는 유목민을 막기 위해 전쟁을 해야 했고, 남으로는 예전의 당나라 군사령관들과 지방 군벌들이 12개의 왕국을 세웠다. 그럼에도 당 이후의 분열 시대는 이전의 369년에 비해 비교적 짧은 53년 동안 이어졌다.

 

960년, 중국 북쪽의 장군 조광윤이 중국 대부분을 통일했다. 새로운 왕조의 탄생이다. 이 왕조는 과학, 기술, 경제, 도시화 등에서 상당한 진보를 이루었다. 얼마나 어떻게 진보했을까? 3권이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또한 생동감 넘치는 그림으로 주요 사건과 인물들을 생생하게 그려냈기에 중국 역사를 처음 배우는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도 제대로 배울 수 있게 도와준다.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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