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베이터 - 창의적인 삶으로 나아간 천재들의 비밀
월터 아이작슨 지음, 정영목.신지영 옮김 / 오픈하우스 / 201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컴퓨터와 인터넷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발명으로 꼽히지만 그것을 누가 만들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다락방이나 차고에서 발명가 한 명이 홀로 생각해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특정 인물을 잡지 표지에 싣거나 에디슨, 벨, 모르스와 함께 만신전萬神殿에 모시기도 어렵다. 사실 디지털 시대의 혁신은 대부분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 '머리말' 중에서

 

 

인터넷과 컴퓨터의 역사

 

책의 저자 월터 아이작슨2012년 미국 <타임>지가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된 바 있고 현재 애스펀 연구소의 CEO로 재직 중이다. 지난 23년간 <타임> 편집장으로 활동했고 CNN의 CEO를 역임했다. 또 '보이스 오브 아메리카'와 '라디오 프리 유럽' 등 미국의 국영 국제 방송을 관장하는 미 방송위원회의 회장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특히, 스티브 잡스의 전기傳記 작가로 유명세를 얻었다.

 

그는 디지털 혁명의 개화기에 동참한 수많은 혁신가, 해커, 천재, 그리고 괴짜 등의 스토리들을 소개하면서 혁명은 한 사람의 힘이 아닌 여러 사람들의 협업에 힘입었음을 강조한다. 물론 이중엔 창의력이 뛰어나고 천재성이 돋보이는 인물도 분명있다. 그럼에도 그는 팀워크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세계사는 위인들의 전기에 지나지 않는다"

- 토머스 칼라일

 

흔히 역사는 승자들을 위한 기록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TV 방송의 개그 프로그램에서 한 개그맨이 외치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란 말이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자아내기도 했다. 사실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쓰여지는 역사의 주인공이 바뀔 수도 있는 법이다.

 

컴퓨터는 누가 발명했을까?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의 실화를 소개한다. 2차 세계대전 때 그는 영국의 암호해독팀을 운영하며 당시엔 해독 불가능했던 독일의 '에니그마' 해독에 몰두하면서 자동 해독기계를 개발한다. 그의 공로는 종전이 최소 3년은 앞당겨졌다고 평가받는다. 이 영화의 홍보 멘트에는 현대식 컴퓨터의 최초 발명가로 앨런 튜링을 소개하고 있었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한 장면

 

책은 디지털 혁명의 역사를 수십 명의 혁신가들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여기엔 빌 게이츠와 폴 앨런, 스티브 잡스와 워즈니악,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등 널리 알려진 인물들도 있지만 생소한 이름들도 많이 나타난다. 저자는 디지털 혁명이 전개된 모든 과정을 컴퓨터, 프로그래밍, 트랜지스터, 마이크로칩, 인터넷, 개인용 컴퓨터, 소프트웨어 등 혁신 기술 중심으로 구분해 해당 기술이 탄생한 순간에 혁신가들이 어떤 역할을 했고 어떻게 일했는지를 함께 소개한다.

 

배비지의 차분差分기관에서 트랜지스터, 최초의 컴퓨터 ENIAC, 실리콘 밸리에서 월드와이드웹으로 이어져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혁명은 가히 놀랍기만 하다. 이런 디지털 혁명을 이끈 창의적인 천재들은 과연 누구일까? 전기 작가의 특징이기도 한 세밀한 화법이 돋보이는 이 책을 통해 디지털 혁명을 선도한 인물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보자.

 

 

 

 

 

 

 

에이다 러브레이스

 

 

에이다 러브레이스는 1840년대에 컴퓨터 프로그래밍 분야를 개척한 인물이다. 그녀는 위대한 시인 바이런 경의 딸인데, 1833년 5월 열일곱 살에 영국 왕실에 첫선을 보였다. 아버지의 낭만적인 정신을 진정시키려 어머니는 그녀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이런 결합 덕분에 에이다는 스스로 '시적 과학'이라 부르는 것을 사랑하게 됐다.

 

그녀는 궁정 사교파티에서 마흔한 살의 홀아비 찰스 배비지를 만났다. 그는 이미 런던 사교계에서 과학과 수학으로 유명인사였다. 그의 활기찬 살롱에 모이는 손님들은 귀족과 귀부인들을 비롯해 작가, 시인, 기업가, 배우, 탐험가, 식물학자, 과학자 등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혁신적인 기계를 선보였다. 거대한 기계 계산 장치로 다항多項 방정식을 풀 수 있는 차분差分기관이었다.

차분기관은 돌려서 어떤 숫자에도 맞출 수 있는 원반이 달린 수직 축을 사용했다. 이는 개념상 경이로운 장치였다. 배비지는 차분기관으로 1,000만까지의 소수素數를 계산하는 방법을 알아낸 뒤, 이후 '해석기관'을 만들었다. 자카르 방직기와 천공 카드를 사용해 명령을 무제한으로 입력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냈지만 영국 정부는 그 가치를 몰랐다. 이 기계의 아름다움을 알아본 사람은 에이다가 유일했다.

 

1842년 에이다는 해석기관을 설명해낸 이탈리아 공병 장교 루이지 메나브레아의 프랑스어 논문을 번역했다. '번역자 주석'이라 불린 이 글은 원문의 2배가 넘었고 원문보다 너무 유명해져 그녀를 컴퓨팅 역사의 우상 같은 존재로 만들었다. 그녀는 주석에서 100년 뒤 마침내 탄생할 컴퓨터의 네 가지 개념을 분석했다.

 

첫째, 무한하고 변화 가능한 일련의 작업을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

 

둘째, 해석기관의 연산이 수학과 수로만 제한할 필요가 없다

셋째, 오늘날의 컴퓨터 알고리즘 작동 방식을 단계별로 파악했다

넷째, 기계는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할 수 없다

 

 

 

 

책은 디지털 혁신을 이끈 천재 수백 명에 대한 '전기'다. 첫머리는 이렇게 에이다 러브레이스로 시작해 구글 이야기로 끝난다. 배비지의 차분기관이 트랜지스터, 최초 컴퓨터 에니악, 월드와이드웹으로 전개되어 마침내 구글과 페이스북을 만들어내기까지 혁신을 선도한 천재들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앨런 튜링

 

1638년 그의 가문은 준남작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서열상 후손인 사람들은 땅도 재산도 없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성직자로, 아버지는 인도에서 하급 행정관으로 일했다. 그는 인도에서 잉태되어 부모가 휴가로 고국에 돌아와 있을 때 런던에서 출생했다. 그와 그의 형은 퇴역 육군 대령 부부에게 맡겨졌다. 이후 귀국한 어머니와 몇 년 함께 살다가 열세 살에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고등학교 마지막 해에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 장학생이 되어 1931년에 입학해서 수학을 공부했다. 존 폰 노이만<양자 역학의 수학적 기초>는 그의 인생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존 폰 노이만은 헝거리 태생의 수학자로 컴퓨터 설계의 선구자였다. 1936년 9월, 스물네 살인 튜링은 바다를 건너 미국 프린스턴의 수학자 알론초 처치 밑에서 공부했다. 

 

전쟁은 과학을 동원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투석기를 제작했듯이 20세기에 들어 테크놀로지의 최고 공적의 대부분은 군부에 의해 탄생했다. 컴퓨터, 원자력, 레이더, 인터넷 등이 그것이다. 영국은 런던에서 87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도시에 독일의 암호를 풀기위한 테스크포스 팀을 가동하고 있었다.

 

튜링은 <계산 가능한 수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쓴 후 프린스턴에서 암호와 암호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독일과의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암호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존 폰 노이만은 프린스턴에서 튜링의 멘토였다. 1938년 봄 튜링이 박사 논문을 마무리할 무렵 폰 노이만은 튜링에게 조교 자리를 제안했지만, 비애국적인 일로 느껴져서 케임브리지 연구원 자리로 돌아갔다. 이후 독일 군사 암호를 해독하는 영국의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튜링 팀은 독일의 에니그마 암호를 해독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후 정보장교들이 노획한 독일 암호기를 기초로 애니그마 암호를 몇 가지 해독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고, '봄브'라는 별명의 더 진화된 해독 기계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1940년 8월, 투링 팀은 작동 가능한 봄브를 두 개 갖추게 되었고, 암호 메세지 178개를 풀 수 있었다. 종전 무렵엔 거의 200개로 늘었다. 당시 이들은 이진법을 사용했다.

 

튜링은 동성애자였다. 그는 기숙학교 시절 이를 스스로 느꼈던 것이다. 암호 해독팀에서 함께 일했던 연구원 여성과 교제를 하기도 했지만 스스로 이 사실을 고백함으로써 결별하기도 했다. 그는 맨체스터의 옥스퍼드 스트리트에서 열아홉 살의 부랑자를 만나 사귀었는데, '지독한 음란 행위'라는 죄목으로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의 생은 불행한 결말을 맞았다. 1954년 6월 7일, 청산가리를 주입한 사과를 깨물고 자살했던 것이다. 애플사의 로고가 바로 먹다 남은 사과이다.

 

 

 

 

 

벨 연구소, 그리고 트랜지스터

 

맨해튼 본사에 공간이 부족해지자 벨 연구소의 대부분이 뉴저지 주 머리힐의 80만 제곱미터 규모의 신사옥으로 이전했다. 머빈 켈리를 비롯한 운영진은 신사옥을 연구 분야에 따른 개별 건물로 구분하지 않으면서 대학 캠퍼스의 분위기를 내려고 했다. 이들은 우연한 만남을 통해 창의성이 배가된다고 믿었다.

 

"건물과 건물은 부서 간의 지리적 단절 없이 자유로운 의견 교환과 긴밀한 접촉이 가능하도록 연결되었다" - 당시 어느 중역의 기록에서

 

여러 개의 복도는 축구장 두 개보다도 긴 길이로 설계되어 다양한 재능과 전문성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섞여 우연한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 전략은 그로부터 70년 후 스티브 잡스애플의 새로운 본사를 설계할 때 그대로 적용하게 된다. 연구원들은 연구소의 이곳저곳을 거닐다 맞닥뜨리게 되는 임의의 아이디어를 태양전지처럼 흡수했다. 외바퀴 자전거를 타고 공 세 개를 저글링하면서 기다란 테라초 복도를 오가는 연구원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인사하는 괴짜 정보이론가 클로드 섀넌의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다. 할 일이 너무 많은 것에 대한 익살스러운 메타포였다.

 

트랜지스터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이다.기다란 복도를 오가며 전문가들과 마주치고 양자 역학을 이해하는 연구원들과의 연구 모임을 갖고 카페에 앉아 전화 신호의 장거리 전송 방법에 정통한 엔지나어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그런 환경이 바로 중요한 요인이었다. 벨 연구소는 혁신의 중심지였다. 트랜지스터 외에도 컴퓨터 회로, 레이저 기술, 이동 전화 분야를 개척했다. 하지만 이런 발명품을 활용하는 데 비교적 서툴렀다.

 

 

벨 연구소의 존 바딘, 윌리엄 쇼클리, 월터 브래튼(좌로부터) 

 

 

인텔의 방식

 

실리콘 밸리의 문화로 자리 잡게 된 인텔의 문화는 혁신의 문화이기도 했다. 이는 세 명에서 비롯됐다. 로버트 노이스는 외향적인 사람, 고든 무어는 내향적인 사람, 앤디 그로브는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필코 사의 딱딱한 위계질서를 경험한 노이스는 보다 개방적이고 체계적이지 않은 직장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보다 빨리 도출되고 전파되고 개량되고 적용될 수 있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직원들이 명령 계통을 거칠 필요가 없어여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관리자와 이야기해야 하는 경우에는 거리낄 것 없이 직접 가서 이야기하면 되었다" - 테드 호프, 인텔의 엔지니어

 

"노이스는 무수히 많은 계층과 등급으로 이루어진 데다 최고 경영자와 부사장들이 마치 기업 내 왕족 또는 귀족이나 되는 양 행동하는 동부의 기업 체계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톰 울프

 

노이스는 페어차일드 반도체와 인텔에서 명령 계통 자체를 의식적으로 멀리함으로써 직원들에게 권한을 부여하고 모두 다 기업가 정신을 가지도록 강제할 수 있었다. 회의 중 분쟁이 일어나 해결되지 않는 경우에도 그로브는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노이스는 고위급 간부들이 평직원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대신 직원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가게 두는 것을 좋아했다.

 

책임이 지워진 젊은 직원들은 혁신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톰 울프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간혹 난관에 부딪힌 직원이 "노이스를 찾아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타개책을 의논하려고 하면, 노이스는 고개를 숙이고 눈빛을 반짝이며 경청한 다음, '다음과 같은 지침을 줄 수 있네. A를 고려하고, B를 고려하고, C를 고려하게'라고 말하고는 영화배우 개리 쿠퍼를 닮은 특유의 미소를 띠고 이렇게 결론지었다. '하지만 내가 대신 결정을 내려줄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네. 이건 내 문제가 아니니까'"

 

이처럼 다른 성격을 가진 노이스, 무어, 그리고 그로브엿지만, 이들의 목표는 하나였다. 바로 인탤을 혁신실험 정신, 기업가 정신이 번영하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성공은 안주를 낳고, 안주는 실패를 낳는다. 결국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 노이스와 무어가 편집광까진 아니었을지라고 결코 안주한 적은 없었다.

 

 

 

 

현대는 협업의 시대

 

책은 디지털 혁신을 이끈 각각의 이노베이터들을 조망하면서 이들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무엇이 이들을 창의적인 인재로 만들었는지를 이야기한다. 마치 군웅할거 시대의 무수한 영웅들의 무용담을 연상하게 한다. 하지만 저자가 우리들에게 전하려는 메세지는 단 하나 '협업의 중요성'이다. 

각기 다른 개성을 자랑하는 책속의 인물들은 '협업'을 통해 현재의 성공을 거뒀다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지금의 디지털 혁명은 특정 개개인이 일군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협업 하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임을 강조한다. 이미 우리들은 창조와 혁신은 이미 있어 왔던 것들을 시대의 요구에 맞게 새로 보완한 편집임을 알고있다. 이는 고 스티브 잡스가 여실히 보여주었다.

 

 

실제로 천재성을 갖춘 개인의 능력은 아이디어를 실현해낸 기술자들과 이를 시장에서 유통시키는 탁월한 사업가를 만날 때 더욱 빛난다. 스티브 잡스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면 스티브 워즈니악 같은 엔지니어가 구체적인 장치로 구현하는 것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빌 게이츠는 폴 앨런이 있었기에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고, 현재의 구글도 세르게이 브린과 레리 페이지의 협업 위에 세워진 거대한 성城일 것이다. IT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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