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살에 시작하는 처음 인문학 - 미술과 문학으로 만나는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에세이 14살에 시작하는 처음 시리즈
정수임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관계, 소통, 불안, 소비, 저항, 생태 이야기는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열쇳말이다. 무론 이 열쇳말은 나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했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크기의 세상을 살아간다. 지구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어울려 살고 있지만 사람들이 가진 세상의 크기는 다를 수밖에 없다. 세상은 자신이 경험하고 아는 만큼만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이 책은 나의 경험과 나의 앎을 바탕으로 하는 나의 이야기다. - '글쓴이의 말' 중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

 

저자가 선명하게 기억하는 첫 그림은 마네<풀밭 위의 점심식사>라고 말한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그녀가 그림만 실력 있는 도록에서 발견한 그림은 발가벗은 여인과 옷을 입은 남자의 모습이었으니 야릇하게 보였을 터이다. 이후 어른이 없을 때만 몰래 이 도록 속의 그림들을 펼쳐보곤 했다고 한다. 벌거벗은 여자의 모습이 많았으니 함부로 보면 안 된다고 직감적으로 느꼈던 모양이다. 부끄러운 생각과 함께 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서른이 넘은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저자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그림들을 보았다. 앞서 초등학생 시절의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 하루 종일 엄마를 찾는 아이에게서 피로를 느끼던 그런 때에 왠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서글픔이 밀려오면서 '나는 잘 살고 있는가'라는 뒤늦은 사춘기와 방황이 시작되었고, 이때 할 수 있는 반항이 새벽에 일어나 독서하고 글 쓰는 게 전부였다고 밝힌다.

 

새벽에 일어나 만난 그림들은 의외로 행복한 모습이 아니었다. 도미에의 <삼등열차>속 사람들, 뭉크의 <절규> 속 사람들 모두 그녀처럼 불안하고 힘겨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힘겹게 보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녀에게 힐링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 '왜, 무엇 때문에, 이들은 그려졌을까?', '지금 나는 왜 불안하고 힘들어하는 걸까?'라는 의문을 불러왔다. 이 책은 바로 이런 고민을 찾아간 사유사유의 결과물인 셈이다.

 

저자 정수임은 현재 고등학교 국어교사이다. 그녀는 '관계', '소통', '불안', '소비', '저항', '생태'라는 6가지 주제 아래 문학, 미술 작품, 철학, 인문, 사회과학 등을 넘나들며 우리들이 살아가는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들추어낸다.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그녀는 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에게 '자아 찾기'를 강조한다. 자신을 알고 인정할 줄 알아야 타인과 사랑하고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계關係

 

"언제 나를 낳아 달라고 했어?"

 

아마도 우리 모두 성장하면서 부모에게 대들 때 이런 말을 한번쯤 했을 거다.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는 끔찍한 말이다. 부모가 내 자식은 꼭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고 선택할 수 없듯이 우리 모두 부모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다. 즐기다 보니 자식이 생겼고, 태어나 보니 부모가 있었다. 그런데, 이 부모와 자식을 연결하는 가족이라는 관계는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따라서 저자는 원망 대신에 '나'를 알아 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빈센트 반 고흐는 열정적인 삶을 살다가 세상을 하직한 화가이다. 그의 아이콘은 '가난', '외로움', '우울', '발작', '자살'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낙천적, 따뜻한, 열정적을 상징하는 '노란색의 화가'로 불린다. 때때로 이것이 너무 지나쳐 다른 사람의 눈에는 미치광이로 보일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남긴 수벡 통의 편지, 수십 점의 자화상들은 그런 평가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충분히 설명해준다.

 

 

그는 '노란 집'을 마련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길 소망햇다. 이런 그의 바람에 화답한 이는 큰 빚에 시달리던 폴 고갱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흠모했던 고갱을 기다리며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태양빛 아래에서 해바라기를 그렸다. 그는 열네 송이 해바라기뿐 아니라 많은 해바라기 연작 시리즈를 노란색으로 그려냈다.

 

자신을 표현하는 색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학교나 사회가 제시하는 비슷한 삶을 살아가려면 자신을 '응시'하고 돌아볼 기회가 적었을 수도, 조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남들과 달라지는 것이 두려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몽테뉴가 말했듯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경험은 자신이 저 자신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자신이 저 자신임을 이해하기 위한 첫 걸음은 수많은 것 사이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 아닐까. 마치 박성우가 풋풋한 연두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처럼, 고흐가 노란빛에서 자신의 열정을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물론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능성과 열정뿐 아니라 한계와 단점을 응시하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소통疎通

 

국가, 민족, 사회, 개인들 간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가장 좋은 해결책은 바로 '소통'이다. 물론 아무리 소통하려 해도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으면 소통은 성립할 수 없다. 사회에서 소통을 강조한다면 이는 그만큼 서로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의 우리 사회가 그런 것 같다. 오직 '나'만 있고, '너'와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 예전엔 담을 맞댄 이웃집의 숟가락 개수도 알고 지냈다고 한다. 지금은 숟가락은커녕 누가 사는지조차 모른다.

 

나는 다시 '속물' 틈에 끼었다. 무진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은 모두 속물들이라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이 하는 모든 행위는 무위무위와 똑같은 무게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장난이라고. - 김승옥, < 무진기행> 중에서 

 

이 소설의 특징은 안개 속에서 시작했다가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버스와 함께 끝난다는 것이다. 등장인물의 시작과 끝이 도무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가장 두드러진 점이다. 무진의 명산물은 바로 '안개'다. 무진을 빙 둘러싸고 있는 산조차 감춰버릴 정도다.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 매일 찾아오는 여귀廬鬼가 뿜어 놓은 입김과 같다고 표현한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라는 그림이 있다. 이는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라는 화가가 그린 작품이다. 화가는 10남매 중 여섯 째로 태어나 유년 시절 내내 사랑하는 이들과 이별했다. 일곱 살엔 엄마가, 1년 뒤엔 누이가, 열세 살엔 얼음에 빠진 그를 구하려다 동생이, 둘째 누이는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이로 인해 그는 심한 우울증을 앓았고 자살까지 시도했었다. 그럼에도 결국 19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화가로 우뚝 섰다.

 

"화가는 자기 앞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본 것도 그려야 한다. 내면에서 아무 것도 볼 수 없다면 앞에 있는 것도 그리지 말아야 한다" - 프리드리히

 

그림 속의 남자는 안개를 벗어난 자연의 경이로움 앞에 서 있다. 하지만 그가 그곳에 서기까지 안개에 휩싸여 보이지 않는 바위를 무수히 더듬었을 것이다. 자연의 경이로움과 함께 동시에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성도 느꼈을 것이다. 앞서 <무진기행>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현재를 부정하고 새로운 삶을 모색하려 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상대를 믿지 않고 자신의 진심을 보여 주지 않는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안개 속에 깊이 감추고 싶은 자신의 부끄러움도 인정하고 보여줄 용기가 필요하다.

 

솔직한 것이 미덕이 아닌 세상이 되어 버린 것 같지만 솔직한 것만큼 무섭고 강한 것 또한 없다. 자연의 일부인 안개는 인간의 힘으로 걷어 낼 수 없지만 마음속 안개를 걷어 내고 서로를 신뢰하고 의지한다면 프리드리히의 그림 속 안개산쯤이야 거뜬히 오를 수 있다. 그런 날이 온다면 프리드리히의 그림도 수정되어야 한다. '안개 바다 위에 홀로 선 방랑자'가 아니라 '안개 바다 위에 함께 서 있는 방랑자들'로 말이다. 

 

 

"너도 그러니? 나도 그래"

 

요즈음은 낯선 곳을 찾아가는 게 그리 두렵지 않다. 길찾기 앱이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길을 가다 막히면 곁을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몇 번씩이나 물어야 겨우 찾아가지만 지금은 손 안의 스마트폰 하나면 충분하다. 초행길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보무步武도 당당하게 내딛는다.

 

1970년대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공사 현장이었다. 도시에서 공사장 인부로 살던 정 씨는 십년 만에 고향인 '삼포'로 가는 길이다. 그의 기억 속 삼포는 비옥한 땅과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물고기로 둘러싸인 섬이었다. 하지만 삼포행 기차를 기다리는 대합실에서 만난 노인은 삼포에 다리가 놓여 이젠 관광 호텔을 짓는다고 트럭이 신작로를 질주하는 그런 곳으로 변했다고 알려준다.

 

공사장의 밥값을 떼어먹고 도망치다 정 씨와 동행하는 영달, 군부대와 선술집을 전전하며 삶을 살던 백화, 이들 세 명은 우연한 동행을 시작한다. 하얀 눈을 밟으며 황량한 벌판을 걸어간다. 힘들어하는 백화를 업어주고, 팥 시루떡을 나누고, 비상금을 쪼개 기차표를 마련하는 그들은 서로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다. 황석영의 소설 <삼포 가는 길>은 이렇게 소통을 얘기한다.

 

마치 포스터를 연상시키는 그림이 있다. 로이 릭턴스타인<행복한 눈물>이 그것이다. 화기 릭턴스타인은 앤디 워홀과 함께 팝아트를 대표하는 화가로 만화를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을 해왔다. 그림 속의 그녀가 왜 눈물을 흘리는지 감상하는 이가 판단할 몫이지만 어쩐지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것 같다. 살다 보면 슬프지 않아도 눈물을 훌려야 할 때가 있다. 분위기 상 그래야만 하기 때문에 '척'하는 것이다. 이렇게 맞추는 일이 소통의 첫걸음이다.

 

릭턴스타인의 <행복한 눈물> 속 여인이나 <삼포 가는 길>에서 만난 세 사람을 지나 체 게바라가 떠오른 이유는 그만큼 타인의 삶을 연민하고 공감하며 생각을 실천한 이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체 게바라처럼 열정적 삶을 살아 낼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만난 사람들을 위해 거짓 눈물이 아닌 진심의 눈물을 흘리며 상처를 보듬고 살아갈 수는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우리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라고 했던 체 게바라의 말을 기억하면서.

 

 

불안不安

 

"나는 날마다 죽음과 함께 살았다. 나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두 가지 적을 안고 태어났는데, 그것은 병약함과 정신병이다. 질병, 광기, 그리고 죽음은 내가 태어난 요람을 둘러싸고 있던 검은 천사들이었다" - 에드바르 뭉크의 일기 중에서

 

화가 뭉크는 다섯 살에 엄마가 폐결핵으로 죽고, 몇 년 뒤 누나도 같은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여동생 중 한 명은 어릴 적에 정신병 진단을 받았고, 다섯 형제 중 유일하게 결혼했던 남동생도 결혼식을 올린 지 몇 달만에 죽었다. 그도 병약해 류머티즘, 열병, 불면증 등으로 늘 고통받았다. 평생 죽음이라는 불안과 맞서야 했던 그는 여든한 살까지 생을 이어갔다.

 

 

어느 날, 뭉크는 두 명의 친구와 함께 산책에 나섰다. 두 친구는 아름다운 광경에 취해 한가로이 걷고 있지만, 뭉크는 공포를 느꼈다. 마치 그림 속에서 "꺄아악!"이란 비명 소리가 흘러 나올 듯하다. 귀를 막고 눈을 크게 뜨고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도 두려움 자체를 인정하고 극복해야 한다.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아무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이다"

- 에밀 졸라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망설임을 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망설임과 마주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뭉크의 <절규>와 같은 태도다. 자신의 이기심과 안일함을 마주할 때 생겨난 놀라움과 두려움이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놀라기만 하고 두려워만 한다면 변할 수 없다. 진실은 전진하고 있으며 아무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이므로.

 

 

"열심히 해도 안되는 게 있다"

 

영화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의 혁명을 보여준다. 프랑스는 1789년, 1830년, 1848년 혁명을 거치면서 완성된 나라이다. 이 기기엔 귀족과 교회의 지지를 받는 왕의 군대와 프랑스 국민의 대립은 심각했다. 남녀노소 모두 손에 총을 들고 왕의 군대와 싸웠다. 자유와 평등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이런 시기에 태어난 화가가 있다. 바로 오노레 도미에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후에 태어낫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이 그랬듯이 그도 역시 가난해서 학교 교육을 받을 수가 없었다. 대신 그는 파리의 거리에서 세상을 배웠다. 그는 길에서 만난 가난한 사람들을 관찰하고 표현하고 그렸지만 미술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서점 직원으로 취직했다.

 

 

그의 걸작 <삼등열차>를 살펴보자. 희미한 빛이 스며든 열차 안에 한 여인은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파곤한 기색의 할머니는 기도를 하고 있다. 한 아이는 잠에 빠져 있다. 이들 모두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다. 하루하루를 연명키 위해 고달픈 삶을 살고 있음을 직감하게 한다.    

 

최저 시급이 6,030원인 대한민국은 어떨까.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받고 평등한 삶을 이어가고 있을까. 대답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고개를 저을 것이다. 오히려 오래도록 이어진 팍팍한 현실로 서로에 대한 이해와 연대를 부수고 나만 잘살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고민하고 있을지 모른다. 서로 부딪치고 밟고 누르며 나만 우뚝 서길 바라는 마음까지 부추기며 말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스펙을 쌓아도 미래를 내다보기 점점 힘들어지는 세상은 불안하다. 그리고 그 불안을 떨쳐 내기 위해 우리는 또 다시 경쟁하고 경쟁하기를 반복한다. 영화 <설국열차>가 서로 다른 칸을 만들어 내다 결국 탈선하고 전복된 것처럼 불안과 경쟁만이 계속된다면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기차도 안전하지 않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어느 칸에 타고 있을까. 

 

 

소비消費

 

서울의 한 백화점 명품관 옥상 정원에 가면 볼거리가 있다. 볼 수만 있고 만져서는 안 된다.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 이들이 많다. 남자 어른의 키를 훌쩍 넘는 크기이다. 이는 보랏빛을 하고 있는 제프 쿤스<세이크리드 하트>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가격이 300억이다. 그러니 만질 수가 없다. 만약에 손으로 만지면 바로 경보음이 울릴 것이다. 옥상 정원에는 다른 작품들도 있다. 마치 '비싼 것은 아름답다'고 과시하는 듯하다. 명품 소비를 부추긴다.

 

 

경찰은 그들을 적으로 생각하였다. 2009년 1월 20일 오전 5시 30분, 한강로 일대 5차선 도로의 교통이 전면 통제되었다. 경찰병력 20개 중대 1600명과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대 테러 담당 경찰특공대 49명, 그리고 살수차 4대가 배치되었다. 경찰은 처음부터 철거민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 이시영,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중에서   

 

부자든 빈자든, 우리들은 이런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얼마만큼의 자본을 소유하고 소비할 수 있는가에 따라 사람의 됨됨이와 안목까지 결정되는 시대이다. 전혀 다른 입장에 선 화가와 시인이지만 이들의 시선이 머문 곳이 '자본에 따라 결정되는 가치'라는 점에서 그들은 같은 곳에 서 있다.

 

두 작품의 표현 방식과 시각은 다르지만 끊임없이 자본의 소유소비를 권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이제 두 작가의 눈을 통해 본 세상의 모습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자. 혹시 비싼 물건을 사고 치장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지는 않은지, 소비하지 않고 살 수는 없지만 소비하는 것만으로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쯤 되돌아봐야 할 때다.

 

 

저항抵抗

 

"시끄러워! 말하지 마!"

 

알고 싶고, 궁금한 게 많아서, 그리고 금지하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때 우리들은 "왜요? 왜 말하면 안 되는 거죠?"라고 묻게 된다. 하지만 이런 질문에 친절한 사회는 없다. 돌어오눈 대답은 겨우 "말하지 말라니까!", "알 거 없어, 다쳐!" 정도다. 정말 우리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몰라도 괜찮을까? 왜 이렇게 침묵을 강요할까?

 

  

위 그림은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마르시아스의 형벌>이다. 이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다. 반인반수인 마르시아스가 음악의 신 아폴론과 내기를 했다. 누가 연주를 잘하는지를 경쟁하는 것이다. 내기에 걸린 것은 뮤즈의 심판에 따라 진 쪽이 이긴 쪽의 처분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르시아스는 피리를, 아폴론은 리라를 연주햇다. 하지만 너무나도 연주가 훌륭해서 심판인 뮤즈도 판별할 수가 없었다. 이에 아폴론은 억지를 부린다. 음악의 신인 자신의 자존심이 걸렸기 때문이다. 악기를 거꾸로 들고 연주해서 승부를 내자는 것이다. 그런데, 거꾸로 들고 연주할 경우 리라는 소리가 나지만 피리는 소리가 날 수 없다. 당연히 마르시아스가 질 수밖에 없다.

 

신에게 감히 도전장을 내민 마르시아스는 괘씸죄에 걸려들어 살가죽이 벗겨지는 잔인한 형벌을 감수해야만 했다. 아폴론의 리라가 오른편 나무에 기대어 있음이 보인다. 아폴론은 마르시아스의 살가죽을 벗기는 중이다. 반인반수 사티로스 다섯과 요정 둘이 그림 속에 있는데, 요정 둘은 도통 이 일에 관심이 없고 사티로스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 그림은 17세기에 그려진 것이다. 당시는 절대왕권의 시대였다. 왕권에 도전하지 말라는 경고로 해석된다.           

 

이제 마르시아스의 고통을 담고 있는 그림 앞에 다시 선다. 그림을 보며 긴장하거나 인상을 찌푸리지 말고 그가 왜 무모하게 아폴론에게 도전했는지 궁금해하며 남은 사티로스들의 행동을 상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이미지가 준 최초의 자극에 대항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생태生態

 

인간은 철근과 콘크리트로 요새 같은 건물을 만들고, 거미줄을 닮은 도로를 닦고, 새를 닮은 비행기를 만들고, 물고기를 닮은 배를 만들었다. 하지만 거센 바람과 땅의 진동은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붕괴시킬 수 있다. 그럼에도 고작 백 년을 살지도 못하는 인간들은 자연을 늘 이용할 생각만 한다. 왜 함께 사는 방법은 생각하지 않을까?

 

레이첼 카슨<침묵의 봄>을 읽은 적이 있는가? 이는 '생태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도서이다. 작가는 인간이 자연에 가한 위협이 마치 부메랑처럼 생태계를 돌아 인간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보여준다. 눈 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대규모로 살포한 DDT가 암을 유발하는 원인임을 밝히며, 생태계의 순환고리마저 위협한다고 강조했다.

 

 

이 그림은 장욱진<나무와 새>란 작품이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그림 속에 자연을 담아냈다. 1957년, 한국전쟁의 포화가 휩쓸고 간 뒤라 결코 아름다울 리 없는 그런 때다. 전쟁으로 집은 무너졌고 사랑하는 이들과도 생이별을 했다. 먹을 게 없어 굶주림은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변하지 않는 게 있었다. 바로 이 땅의 자연이었다. 아름답고 소박한 자연을 그는 그려냈다. 

 

한 마리의 새와 한 그루의 나무, 그 안을 채우는 아이, 그리고 나무 위의 집들은 동화 속의 장면 같다. 전쟁의 포화가 사라진 지 얼마되지 않은 각박한 시절을 견디는 사람들에게 그는 어던 위로를 보내고 싶었을까?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라, 그러면 그래도 변치 않고 머물러 있는 것이 보일 것이라고 얘기하는 듯하다.

 

장욱진의 그림은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말해 준다. 나무와 새가 어우러져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었듯, 새의 똥이 나무에게 영양분이 되어 주고 나무가 새에게 열매를 내주듯 우리의 삶도 한쪽으로 치닫는 것이 아니라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 함께 살자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 <섬>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섬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시가 발표된 당시는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사람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해졌다. 또 화가 오병욱은 인파로 붐비는 서울의 거리를 표현하고 있는데, 그림 속의 사람들은 주위에는 무관심한 채 오로지 제 갈 길만 가고 있다. 이젠 우리들이 다시 인간성을 회복해야 될 때가 아닐까 싶다. 주위를 둘러보며 도움이 필요한 곳엔 보시布施를 하자. 반드시 재물이 있어야 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소통하는 것도 보시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