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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예언자 오스카 로메로
스콧 라이트 지음, 옥타비오 듀란 사진, 김근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12월
평점 :
품절
"백성들이 학살당할 때 함께 피 흘리는 교회는
존경받습니다" 사회
구석구석에 퍼진 극심한 가난은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이들의 얼굴에서 우리는 고통받는 예수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질문하시며 도전하십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가난에 찌든 아이들의 얼굴에서, 사회에 속할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젊은
청년들의 얼굴에서, 인디오와 흑인의 얼굴에서, 땅을 빼앗긴 농민의 얼굴에서, 조직도 없고 권리도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얼굴에서, 실업자들의
얼굴에서, 하찮은 취급을 받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노인들의 얼굴에서 나는 예수의
모습을 봅니다.
로메로 대주교의 삶과
정신
엘살바도르 가톨릭교회의 대주교
오스카 아르눌포 로메로(1917~1980년)는 엘살바도르 군사독재정권이 민주화 운동을 살인으로써 탄압하자
군사독재정권에 대해서는 “불의한 명령이 아닌, 양심에 따르시오”라고,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역사가 요구하는 생명을 건 모험을 피하지 말자”라고
호소하는 비폭력투쟁으로 저항했다. 1980년 3월 24일 프로비덴시아 병원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다 엘살바도르 군사독재정권에게
암살당했다.
오스카 로메로의 삶은 여러 면에서
나자렛 예수의 삶과 닮았다. 보잘것없는 나라의 작은 시골,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 두 사람 모두 목수가 되는 훈련을 받았으며,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 편에 섰다는 점. 그리고 불평등과 부패를 강하게 비판하다 사회 지배층으로부터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인물로 고발당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실제로 엘살바도르의 가난한 사람들은
로메로 대주교를 나자렛 예수에 비교한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행동하는 그의 활동이 알려지면서 1979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강력히 거론되기도
했다. 1989년, 로메로 대주교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로메로>가 제작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죽음으로써 불의에 항거한 그의 모습은 전 세계를 감동시켰으며, 20세기 순교자 중 한 사람으로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그의 성인 추대는 그가 종교적 이유가
아닌 정치적 이유로 살해당했다는 점에서 지지부진했으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되자마자 시성 절차가 재개되었다. 2015년 2월 3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로메로 대주교의 죽음을 순교로 선포함에 따라 시복시성에 가속도가 붙었고, 마침내 동년 5월 23일 시복식이
거행되었다.

오스카 로메로의
출신
오스카
로메로는 1917년 8월 15일, 시우다드바리오스에서 산토스 로메로와 과달루페 데헤수스 갈다메스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고향은 온두라스 국경에서 겨우 16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이 작은 도시는 엘살바도로 국가와 국민을 이룬 스페인 정복자들과
혈통이 섞여 있었지만 외모상으론 여전히 토착민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오전엔 우체국장과 전신 기사로 일하고, 오후엔 작은 농토에서 카카오와 커피를 경작했으며 독실한 카톨릭 신자가 아니었다. 여섯 형제와 두
누이로 이루어진 여덟 자녀 중 오스카 로메로는 둘째였는데, 1919년 5월 11일 시우다드바리오스 교구에서 세례를
받았다.
마을
노인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로메로를 학구적이고 신앙심 깊은 진지한 아이로 기억한다. 처음 3년은 공립학교에서 공부했지만, 이후 열두세 살
무렵까지 지역 가정교사의 지도를 받으면서 아버지를 도와 처음엔 우편배달부로, 나중엔 전신 기사로 일했다. 아버지는 공부보다는 일을 배우길 원했기
때문에 동네 목수의 도제가 되어 문과 식탁 만드는 법을 배웠다.

변화의
바람
1932년은
엘살바도르 역사에서 매우 의미있는 해이다. 엘살바도르 군인들이 공산주의에 영향을 받은 농민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3만 명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 마탄사'의 해로 불린다. 라 마탄사는 스페인어로 살육을 뜻하는 말이다. 1932년 이후
10980년대까지 엘살바도르에서는 군부독재가 이어졌다.

당시
로메로는 15살로 신학교 학생이었다. 1930년대 교회는 보수적 입장을 취함에 따라 부유한 지주地主와 군부軍部의 편에 서 있었다. 당시의
라틴아메리카 교회가 대부분 그랬다. 하지만 1960년대에 들어서자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엘살바도르의 인구가 네 배 증가하면서 극빈층과
부유층의 격차가 더 심해졌다. 빈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억압을 인식하게 되었고, 좌파 정당들은 사회정의를 실현하려는 해방운동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럴수록 군부는 더욱 강한 억압과 통제로 맞섰다.
이제 교회에도 급진적인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50년대 예수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교육하기 위해 산살바도르에
중앙아메리카대학을 설립했다. 외국인 선교사들과 수많은 수녀들이 평신도 운동에 참여했다.
1962~1965년까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의 혁신을 이끌었다.
1967년
9월, 로메로는 산호세 라몬타냐에 있는 신학대학에 머물게 되었다. 예수회에선 1915년부터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잦은 갈등으로 1972년부터 주교회의에서 신학교를 인수하여 보수적 성향의 사제들을 양성해왔다. 로메로는
엘살바도르 주교회의 사무총장과 중앙아메리카 주교회의 총무직을 맡았다. 당시 신학교 학생의 말에 의하면, 그의 방은 항상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고 한다.
1968년,
10년 만에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가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개최됐다. 메데인 주교회의의 핵심 단어는
해방과 참여였다. 주교들 생각에 정치경제적 구조로 인해 일상화된 폭력에 억압받고
있는 민중들에게 해방은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으로 군중에게 설교했을 때 약속한 복음'의 의미라고 판단했다. 참여는 민중의 처지를 인식하게 하는
'의식화 운동'이었다. 이런 해방과 참여에 긴밀하게 연결된 매개체로 기초공동체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로메로는
메데인에서 시작된 이러한 변화를 걱정했다.
1970년
4월 21일, 로메로는 당시 산살바도르 대주교였던 루이스 차베스 이 곤잘레스의 요청으로 보좌주교에 임명된다. 동년
6월 21일, 로메로 신부의 주교 서품식이 거행되었다. 이 행사엔 엘살바도르 대통령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와
주교들이 참석했다. 모두가 로메로의 임명을 축하하진 않았다. 그의 사고방식은 과거에 얽매인 것으로 보였고, 화려한 행사가 대다수 민중의 가난한
생활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해방신학
해방신학의
기본 이념은 이미 라틴아메리카의 수많은 모임에 퍼져 있었고, 메데인 문헌에도 포함되었다. 그 이념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은 불평등을 용납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편에 서있다. 따라서 민중들은 정의를 바라는 하느님의 도움으로 활동하고 투쟁해야 한다.
해방신학은 당시 지배적 사회질서와 권력자들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져 많은 정치적 갈등을
일으켰다.
1969년
6월 15일, 제9회 멕시코 월드컵 중남미 지역예선 경기에서 촉발되어 7월에 발발한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4일 간의 전쟁 중 수만 명의
엘살바도르 농민들이 온두라스 땅에서 추방당하면서 엘살바도르 전역은 사회적, 정치적 긴장이 더욱 심해졌다. 교사들과 농민들은 정부에
개혁을 요구했지만 더 악랄한 탄압만 만났다.
로메로
주교는 교회는 사회, 정치적 갈등 중 일부에만 책임이 잇으며 이 부분에 대해서만 개혁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집했다. 갈등의 주요 원인은
예수회 내부의 해방신학적 성향 탓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72년, 그는 대교구
신문인 오리엔타시온 편집자로 임명되자 예수회의 잘못된 해방교육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1972년,
군부는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지만 그들이 지지하는 후보자를 대통령에 취임시켰다. 즉 군부가 지지하던 몰리나 대령이
선거에서 그리스도교 민주당, 사회민주당, 사회당 연합 후보에 패했으나 군부가 정권을 넘겨주지 않자 산살바도르에서 군부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이에 군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전국에 야간 통행금지와 계엄령을 실시했다.
친구의
죽음
친구인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는 엘살바도르에서 일어난 운동의 대부분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그는 수도 산살바도르 북쪽에 위치한 농촌 교구 아길라레스에서 일하던 예수회 사제였다. 그는 1971년 라틴아메리카의 신학자들 및 종교 활동가들과
교류하기 위해 에콰도르의 키토에 잇는 라틴아메리카 사목 교육센터 교육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에콰도르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른 레오니다스 프로아뇨 주교의 교구인 리오밤바에서 잠시 머물렀다. 여기서 그는 아길라레스 복음화에 적용할 의식화 운동과 그 기본 방법을
배웠다.
그란데
신부는 교구내 가난한 이들과 소작농들의 편에 섰다는 이유로 우파 단체의 미움을 샀다. 몰리나 대령도 중도적 토지개혁을 제안햇다는 이유로 과두
정부의 공격을 받았고, 결국 그 시도는 실패했다. 아길라레스 농민들과 지주들의 갈등은 위기로 치달았고 지주들은 신문에 엘살바도르
농민그리스도교연합과 예수회를 비난하는 광고를 실었다. 이에 우파 암살단이 등장하고 전단지까지
나돌았다.
"애국자가 되어 신부를
살해하라!"
로마는
차베스 대주교의 후임으로 로메로를 임명했다. 이는 부자들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로메로를 자기들 편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메로는 대주교가 되기 전, 이미 변하고 있었다. 1977년 2월 20일, 대주교 임명 기념해사가 간소하게 거행됐다. 그리고 로메로는 자신의
임명에 대한 우려를 의식해 교구 사제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같은 날,
부정선거의 결과로 움베르토 로메로 장군이 엘살바도르 대통령이 되었다. 일주일 뒤, 부정 선거를 항의하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산살바도르 대성당에서
가가운 엘로사리오 성당 앞 광장에서 군인들에게 살해당했다. 폭력 사태는 몇 주 동안 계속되었다. 3월 12일 토요일 늦은 오후 그란데 신부는
아길라레스 인근 마을에 미사를 하고자 사탕수수밭을 지나고 있었다. 숨어 있던 암살자는 그란데 신부를 총으로 쏘아댔다.
3월 14일, 로메로 대주교는 군집한 군중 앞에서 100여 명의 사제들과 함께 장례미사에
참석해 요한복음의 한 구절을 읽었다.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로메로 대주교의
회개
친구 그란데
신부의 죽음은 로메로 대주교의 회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는 바로
그의 인생 전환점이 되었다. 1977년 3월 26일, 로메로는 교황을 알현코자 로마로 떠나 도착하자마자 성베드로 무덤을 찾았다. 교황은 둘만의
시간을 갖고 로메로 대주교에게 "용기를 내십시오! 당신은 큰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라고
격려했다.
귀국 후
로메로는 부활절 서한 작성에 몰두했다. 그는 이 편지의 제목을 '부활절 교회'라고 붙였다. 그는 교구 안에서 지낼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말기
암환자들을 위한 요양시설인 디비나 프로비덴시어 병원에 자신의 숙소를 마련했다. 이곳에 로메로 대주교가 암살당한 후 기념 성당이
지어졌다.
"우리는 아메리카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완전한 해방의 열정으로 가득 찬 시대이며 모두가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는 시대입니다. 개인은 성장하고 공동체는 통합되는
시대입니다"
5월 11일, 두 번째 암살 사건이 발생했다. 알폰소 나바로 신부가 살해당한 것이다. 200명의 사제들이 장례미사를
집전하려고 모였고, 대교구 방송을 통해 로메로의 강론을 생중계했다. 나바로 신부의 메세지는 폭력에 저항하고 폭력을 거부하라는 것이라면서 로메로는
일치를 강조하며 강론을 마무리했다.
5월
19일, 정부군은 임대료를 내려달락교 항의하며 땅을 점거하고 있던 소작농 가족들을 총으로 위협, 강제 해산을 시도했다. 농민 5백여 명은 좁은
경작지를 임대해 농사를 짓는 데, 옥수수를 심을 비용을 마련할 수 있도록 임대료를 내려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군인 2천여 명이 아길라레스
마을을 포위하고 집집마다 다니며 약탈했다. 군대는 성당을 부수고 군인 막사로 사용했다. 6월 19일 군대가 철수하자 로메로 대주교는 아길라레스로
가서 산살바도르 공동체들과 함께 미사를 올렸다. 점령 한 달 동안 2백명의 사람들이 암살, 고문,
실종당했다.
"여러분은 오늘 아침 제1독서 말슴에 나온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린'
거룩한 희생자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날 고통받는
예수님이십니다"

로메로 대주교의 암살
1980년 3월 24일, 로메로 대주교는 디비나 프로비덴시아 병원 성당에서 친구의
기일미사를 드리던 중 암살당했다. 이 병원은 산살바도르 암환자들을 위한 호스피스 병동이자 로메로 대주교가 거처했던 곳이다. 순교는 엘살바도르에서
벌어진 혼란 속에서 피할 수 없는 비극적 결말이었다.
"백성들이 학살당할 때 함께 피 흘리는
교회는 존경받습니다"
- 로메로, 1980년 2월
17일

로메로 대주교는 엘살바도르 군사독재정권이 민주화 운동을 살인으로써 탄압하자 비폭력투쟁으로 저항했고, 1980년
3월24일 프로비덴시아 병원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다 엘살바도르 군사독재정권에게 암살당했다. 죽음으로써 불의에 항거한 그의 모습은 전 세계를
감동시켰으며, 20세기 순교자 중 한 사람으로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동상이
건립됐다.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지난 5월 성인聖人으로 추대됐다. 그의 성인 추대는 그가 종교적
이유가 아닌 정치적 이유로 살해당했다는 점에서 그동안 지지부진했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되자마자 시성 절차가 재개됐다. 2015년
2월3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로메로 대주교의 죽음을 순교로 선포함에 따라 마침내 그해 5월23일 시복식이 거행됐다.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열린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시복식엔 25만여 신도들이 함께해 민중의 수호자로 살아온 그의 삶과 죽음을
기렸다.
"로메로 대주교는 나에게 하느님의 종이었으며, 그는 여전히 순교
중입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