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2 - 논어 속 네 글자의 힘 ㅣ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2
신정근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평점 :
물론 우리 시대의 "아직 아니다"는
공자 시대의 "아직 아니다"와 다르다. 하지만 "아직 아니다"가 남아 있는 한 우리는 <논어>만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우리의 삶을
편안하고 공정하게 만드는 모든 '사상자원'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옛날만큼 <논어>의 위상이 절대적이지 않다고 하지만 우리가 여전히
<논어>를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 '프롤로그' 중에서
<논어>, 여전히 유효하다
논어는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에 쓰인 셈이다. 지금 시대는 우주를 여행하고,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다니며, 겨울에 여름 과일을 먹고 반대로 여름에 겨울 과일을 먹는다.
아마도 공자가 살아있는 동안엔 이런 생활상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공자의 말씀을 글로 전하는 <논어>가
마치 고루하고 케케묵은 서류 뭉치로 보일 수고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 신정근
교수는 지금도 <논어>는 여전히 유효하므로 읽어야 하는 고전으로 추천한다. 그것도 강력하게 말이다.
특히, 불혹의 나이인 사십대에 들어섰다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가르침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할 것이라고 그 추천 사유를 설명한다. 시인 김춘수도
올라갈 때 보이지 않았던 꽃이 내려갈 때 비로소 보였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다. 우리 인간도 살면서 경험이 쌓이게 되면 그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비록 2500년이란 시간이 흘렀어도
사람은 사람이다. 시대와 문화가 아무리 많이 변했을지라도 인간의 근본은 변할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사람은 돌도 아니고 사자도 아니고 여전히
사람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현대인이 과거에 비해 자연의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자연의 위력에 관해 덜 위협을 느끼지만 인간적
약점을 극복하고 신적인 존재로는 될 수 없기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공자는 개인적으로 불우한 삶을
살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이 초월할 수 있는 최고 경지에 도달했다. 그래서 후세인들은 그를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렸다. 인간의 한계 범위 안에서는 인간이 실현할 수 있는 최고치에 올라섰다는 점에서 그 위대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책은 모두 6강으로 구성되어 있다. 1강(삶의 주인으로 우뚝 서는 법)에선 우리가
인생에서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을 얘기한다. 즉 자신이 삶의 진정한 주인이라면, 자신의 지성에 의지해서 자신의 욕망을 존중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랴야만 인생의 어떠한 겲ㄹ을 맞이하더라도 후회가 없게 된다.
2강(나에게 없는 것을 있게 하는 사건)에선 삶에서 차지하는 배움의 의미를 살펴본다.
사실 우리는 과잉 학습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도대체 뭘 더 배우라는 거야?"라고 짜증스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런데, 배움은 똑같은 것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것을 포함해 배워본 적이 없는 것을 찾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족한 자신을 채워나가는 창조의 과정을
밟는 것이다.
3강(미래의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시간)에선 인생에서 도전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며,
4강(삶을 변화시키는 말의 힘)에선 삶에서 말이 차지하는 영향력을 삺보고, 5강(나와 너의 경계를 허무는 용기)에선 자신을 울게 또는 웃게
만드는 사람 관계를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6강(마흔,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를 찾아서)에선 삶을 통해 찾을 수 있는 지혜의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삶에 드리운 어둠을 걷어내고 밝은 빛을 찾도록 해준다.
종오소호從吾所好
우리들의 인생사가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는 과정을 거치기에 마치 인생도 춘하추동 순으로
계절이 순환되는 것처럼 반복되는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결코 되풀이되는 게 아니다. 착각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시간이
흘러갈 뿐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인생은 단 한 번 뿐이다.
2500년 전
공자는 끊임없이 실패를 맛보며 곤경에 처했다. 이렇게 거듭 시대와의 불화에 휩싸이면 문학 작품에 나오듯 악마와
손을 잡고 역전을 꿈꾸거나 현실의 요구에 굴복할 수 있다. 하지만 공자는 떠밀린 삶을 살며 때때로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렸음에도, 그때마다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공자는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자신이 좋아하고 의미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공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만약 경제적 성공을 추구할 수
있다면
시장에서 채찍을 잡는 문지기라도 나는
꼭 할 것이다.
만약 그것을 추구할 수
없다면
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좇아가리라.
여기서 핵심 키워드는 좋을
'호好'이다. 이는 왼쪽의 女는 어머니를 상징하고, 오른쪽의 子는 아들을 상징한다. 나 어릴 적, 한문 선생은
'여자가 아들을 얻으니 얼마나 좋은가'로 해석하며 음과 훈을 가르쳤다. 저자는 여는 여성을, 자는 남성을 상징하므로 두 글자 사이의 간격을
특별히 주목한다. 좋을 好자를 써보라고 하면 두 글자가 많이 떨어지거나 조금 포개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두 글자가 나란히 븥어 있을
경우에만 좋을 好자가 되므로 무릇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시라도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발분망식發憤忘食
"밥 먹고 합시다", 이는 우리들이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이다. 생명 유지를 위해 영양을 섭취해야 하므로 식사 시간이 되면 당연히 밥 생각이 난다. 하지만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라 자발적으로 단식斷食을 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얼마전에 작고한 고 김영삼 대통령은 신군부정권 시절인 1983년 5월 정치활동 자유를 주장하며
23일간의 단식 투쟁을 벌였다. 공자도 단식을 할 수 있다고 이렇게 말했다.
섭공이 자로에게 공자의 특성을
물었다.
자로가 어찌할 줄 몰라 미처 대꾸를
못했다.
공자가
일러주었다.
"자네는 왜 이렇게 이야기히지
않았소.
그 사람의 됨됨이
말입니다.
화가 나서 한 가지 주제에 깊이
열중하다 보면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나아가는 길에 즐거워하며 삶의
시름마저 잊어버려서
앞으로 황혼이 찾아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합니다"
춘추시대, 공자는 조국 노나라를 떠나
천하를 주유했다. 요샛말로 하자면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해 정치적으로 실패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워낙 풍부한 학식을 갖추어 국제적으로
명망있는 인물이기에 그를 찾아 뭔가 해법을 얻으려고 찾아오는 인사들이 있었다. 섭공도 그런 사람 중의 힌 명이다. 섭공은 공자를 만나기 전 사전
정보를 얻고자 제자인 자로에게 인물평을 요청했던 셈이다. 스승이란 감히 그 그림자도 밟지 못하던 그런 시절이라 어찌 제자 주제에 함부로 평가를
할 수 있었겠는가? 이에 공자는 한 마디로 자기소개서를 썼다. 이렇게 말이다.
"발분망식發憤忘食, 락이망우樂以忘憂,
부지노지장지운이不知老之將至云爾"
저자는 이를 공자의 행동을 마치
동영상 한 편 보는 것으로 비유했다. 맞다. 공부를 하다가 문제가 뜻대로 풀리지 않자, 공자는 "밥 먹고 합시다"하면서 자리에서 결코 일어서지
않는다. 풀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스스로에게 화를 낸다. 하지만 화에만 그치지 않고 그는 이 문제의 끝을 붙잡고 늘어진다. 답을 찾을
때까지.
밥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럼에도 그는 오히려 허기보다는 즐거움에 취해 자신이 어던 집안 일로 근심 걱정을 하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지각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즐거움의 크기가 근심의 크기를 뛰어넘엇음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바로 몰입의 즐거움에 빠져있는 상태인
것이다.
공자와 노자의
만남
사실 이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논란이 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가치와 방향이 워낙 달랐기 때문이리라. 사마천의 <사기>
중 '노자한비자열전'에 노자는 주나라 왕실 도서관을 관리하던 사관으로 재직했는데, 공자가 주나라 뤄양洛陽으로 가서
노자를 만나 예禮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자의 질문에 노자가 답한 내용은 이러하다.
그대가 말하는 성현이란 이미 몸과 뼈가 썩어버렸고 단지 말만 전해질 뿐이다. .... 그대는 교만과 탐욕, 허세와
팀욕을 버리도록 하시오. 이러한 욕망은 모두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오. 내가 그대에게 해줄 말은 다만
이것뿐이오.
성현은 이미 죽고 말만 남았는데
애지중지 여길 가치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또 공자가 자신의 가치를 믿고 세상을 구하겟다고 덤벼드는 행동도 어리석기 그지 없다고 지적한다.
그렇지만 공자는 노자의 이 말에 기가 꺾이지 않았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서로가 다름을 확인했다는 결과를 담담하게
전한다.
용은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을 오르니 나는 용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오늘 내가 노자를 만나니 그는 마치
용과 같은 사람이구나!
공자는 젊어서부터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람을 찾아가 물었다. 또 그는 "세 사람이 길을 가다 보면 그 속에 나의 스승이 있다"라고 말하듯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배우려고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세상 사람이 모두 공자의 스승인 셈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제자들이 공자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언행일치言行一致의
미덕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면 사람
간의 믿음은 깨지게 마련이다. 예컨대 "내일 5시 명동에서 만나자"라고 하면 그날 그 자리에 나오리라고 당연히 믿게 된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놓고 그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면 다음 번에 그 사람이 약속을 할지라도 이를 지킬 것이라고 믿기가 어렵다. 먼저 의심하고 재차 약속을 확인해야만
할 것이다.
요즘 아침 출근 시 지하철역 입구에서
열심히 인사하는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나는 이를 두고 '메뚜기 한 철'이라고 표현한다. 선거를 앞두고 있으니
평소엔 무관심하던 사람이 자기 홍보에 열을 올린다. 우리에겐 이미 학습 효과가 생겼다. 음식 찌거기 없어지면 똥파리도 사라진다는 것을 말이다.
정치인의 언행불일치는 이젠 진리아닌 진리가 되고 말았다.
공자는 언행일치를 위해 말과 행동의
속도를 점검하라고 제안한다. 말은 원래 빠른 특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속도를 늦추고, 행동은 원래 느린 특성을 지니고 있으므
로 그 속도를 높이자는 것이다.
그러면 말은 실행이 준비된 뒤에야 하게 되고, 행동은 말에 이어서 일어나게 된다. 말과 행동의 시차가 없으니 둘이 어긋날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눌언민행訥言敏行'을 강조했다.
본립도생本立道生
툭하면 '기본으로 돌아가라'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리더들이 자주 사용하는 황당무계한 말이기도 하다. 사실 기본이란 무슨 일을 하기 전에 꼭 구비해야 할 자질을 의미한다.
그래서 뭔가 문제가 생기면 되돌아와서 이를 점검해야 할 바탕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직의 리더라는 사람들은 이 말을 너무 쉽게 한다. 잘못은
자신이 해놓고서 부하들에게 '기본으로 돌아가라'라고 훈시한다.
우리 사회의 이슈인 복지 논쟁을 살펴보자. 복지를 늘리는
걸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래야만 국민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고,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 세대들을 확대재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복지도 예산이 있어야 실천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예산을 확보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해 예산이 없을 경우 복지를
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이에 증세增稅 문제가 논란의 초점이 된다. 하지만 우리들이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한다면 복지 문제를 증세와 연관시키기 보다는 먼저 예산의 집중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기본이다. 국회의원들은 툭하면 국회 일정을 보이콧하거나 정략적으로 야합해서 졸속으로 법안을 통과시키는 추태를 보이면서도 자기 세비는 꼬박꼬박
챙긴다. 일당 근로자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국회의원 수를 늘리는 일보다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라는 대원칙을 세우는 데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무본務本은 힘을 쓴다는 의미이고, 입본立本은 살아서 움직일 수 있도록 세운다는 뜻이다. 무본과 입본이 되지 않으면,
즉 원칙이 서지 않으면 도불생道不生이 되고 만다. 따라서, 본립도생으로 원칙과 융통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
인생의 기본을 다시
세우자
책은 총 6강에 걸쳐 30가지의 주제를 논하고 있다.
하우 만에 이를 독파하겠다고 무리하지 말자. 하루에 한 가지 씩 충분히 음미하면서 읽는 게 좋을 듯하다. 어려서 또는 젊어서 읽었던
<논어>의 맛이 살면서 엎어지기도 하고 예상치도 못했던 뒤통수를 맞아보기도 하면서 생긴 그런 경험의 토대 위에서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십대가 아닐지라도 누구에게나 일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