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윈 - 세상에 어려운 비즈니스는 없다
류스잉.펑정 지음, 양성희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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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저우의 철부지 소년이 세계 전자 상거래 시장의 왕좌를 차지하기까지, 이 책은 알리바바 창업주 마윈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담아낸 전기이다. 그동안 마윈에 관한 일화는 책이나 신문기사를 통해 단편적으로 소개되어 왔지만, 그의 성장 과정부터 글로벌 기업 CEO로 올라서기까지 전 과정을 꼼꼼히 담아낸 건 이 책이 아마도 유일할 듯하다.

 

 

마윈馬雲에 관한 모든 것

 

대개 전기傳記란 현역에서 은퇴한 나이 지긋한 성공 인물이나 생전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세상을 타계한 인물들의 발자취를 생생하게 기록한 문건으로 예컨대 정식으로 기록한 역사서의 경우 열전列傳에 해당한다. 이 책의 저자가 마윈에게 전기를 쓰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을 때 그도 "책으로 쓰기엔 내 나이가 너무 젊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많이 남아 있고, 아직 성공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대답했다는 그들의 일화를 공개한다.

 

 

철부지 소년 마윈은 아름다운 강남 도시 항저우의 서호西湖변에 위치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학업 성적이 뒤처져 고등학교 때까지 한 번도 좋은 성적을 받아본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중학교 때 만난 지리 여선생이 유창한 영어로 항저우의 볼거리를 외국 관광객들에게 소개했던 일화와 함께 학생들도 지리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에 그 길로 그는 영어 공부에 매달렸다. 지리를 아무리 잘 알아도 영어를 못하면 아무 소용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70년대 말, 80년대 초의 중국은 개혁 개방의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곳곳에 활기가 넘쳤다. 그리고 중국의 신비로움을 찾아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이 호수 도시 항저우로 향하는 발길도 점점 많아졌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영어 방송을 청취하던 마윈도 서호 변에서 외국인들에게 무료로 가이드하면서 살아있는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영어 실력뿐 아니라 세상과 인생을 보는 시각이 부쩍 커졌다.        

 

마윈을 가장 괴롭혔던 공부는 수학 과목이었다. 첫 번째 대입시험에서 그는 수학 1점을 기록했다. 이후 경극협회 책임자였던 아버지 소개로 잡지사의 잡부로 사회생활을 시작, 주경야독끝에 두 번째 입시에선 수학 19점에 그쳤다. 차라리 기술을 배우라는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치고 일과 공부를 계속 병행했다. 그는 20살에 세 번째 입시에 도전했다. 이번엔 수학 기본공식을 달달 외운 덕분에 수학 점수는 120점 만점에 79점을 기록했다. 과락은 면했지만 총점에서 5점이 부족해 4년제 대학은 지원하지 못하고 항저우 사범대 영어 전과專科에 응시했다. 신설대학이라 영어 본과本科에서 정원 미달이 발생해 성적이 우수한 전과 학생을 본과로 승급시키는 조치를 내렸다. 당시 영어 성적은 마윈이 최고득점자였다.

 

1984년, 자타공인 열등생이었던 마윈은 그토록 원하던 대학생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 마치 물을 만나 고기처럼 미리 갈고닦은 영어 실력 덕분에 전공 점수는 늘 5등 이내에 들었다. 남들이 전공과 시름하는 동안 그는 동아리, 학생회 등 폭넓은 대학생활을 경험했다. 리더로서의 재능을 꽃피워 3학년 때는 항저우 사범대학 총학생회장, 항저우 시대학연합회장이 되었다. 대학 때 그는 가장 소중한 인연을 캠퍼스 커플로 만난다. 바로 장잉張瑛이다.

 

1988년, 대학 졸업 후 그는 총장의 특별 추천으로 항저우 전자공업대학에 발령받았다. 당시 졸업생들은 대부분 고향 마을 중학교 선생님으로 발령이 났지만 그는 특별 대우를 받은 셈이었다. 마윈은 탁월한 영어 실력과 사회성을 바탕으로 항저우 전자공업대학에서 영어 강의를 시작하자마자 우수 강사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중국 경제는 새로운 도약의 시동을 걸 때엿다. 영어 회화, 무역 상식 등을 두루 갖춘 글로벌 인재가 부족했다. 마윈은 영어 강사로 외국인들과 오랫동안 교류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에 무역 회사의 사장들은 마윈에게 번역을 의뢰하는 일이 많아졌다. 당초 마윈은 대학 강사로 발령시 5년 근무 조건이었기에 번역 일은 부업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1992년, 마윈은 몇몇 친구와 함께 첫 창업에 나섰다. 바로 하이보 번역회사다. 경험이나 기반이 부족한 서른 나이에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이 그리 녹록한 게 아니었다. 번역 회사의 직원은 대부분 퇴직한 영어 선생님들이었다. 한 달 사무실 임대료가 2,400위안, 첫 달 매출은 고작 700위안이었다. 이렇게 몇 달 지나자 동업자 중 몇몇 친구는 빨리 회사를 정리하자고 종용했다.

 

"계속해야 해. 절대 포기하면 안 돼. 반드시 이겨 내야 해. 머지않아 희망의 빛이 비출거야"   

 

어떻게든 회사를 유지시키려는 그의 노력이 계속되면서 수익 다변화 전력 탓에 회사는 점점 잡화점으로 변해 갔다. 꽃, 선물, 양말, 속옷, 의약품, 의료 기기 등 보따리장수는 3년 가까이 이어졌다. 탄생하자마자 인공호흡기를 달고 하루하루 버티던 하이보는 기적처럼 되살아났다. 1994년에 손익 분기점을 넘기고 1995년엔 영업 이익을 기록했다. 그가 계획했던 대로 항저우 최대 전문 번역 단체로 성장했던 것이다. 현재 이 회사의 장홍 사장은 10여 년 전 힘들었던 날을 떠올리면 김정이 북받친다고 말한다.

 

 

  

야후 검색창에 <China>라고 써넣었다. 그러나 컴퓨터 화면에 뜬 문구는 냉정한 현실을 알려 줬다. <no data> 신기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인터넷 세계. 어떻게 이렇게 큰 중국의 존재를 모를 수 있지? 이 충격적이고 실망스러운 상황을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마침내 그의 사업 감각이 꿈뜰거렸다.

 

"나와 업무 제휴를 맺읍시다. VBN은 여기에서 기술적인 부분을 전담하고, 나는 중국으로 돌아가 인터넷을 널리 알리고 거래처를 확보하겠소"

 

1995년 4월, 그는 귀국하자마자 저녁에 자신의 집으로 친구 24명을 초대해 파티를 열었다. 귀국할 때 구입한 386 노트북을 꺼내 이 작은 컴퓨터와 함께 인터넷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가 장장 두 시간이나 떠들었지만 갈수록 듣는 이들은 집중도가 낮아지면서 이해하기에 벅찼다. 아무튼 이 모임을 통해 그는 자본금 10만 위안을 마련해 차이나페이지를 출범시켰다.

 

초기에 마윈이 홈페이지 사업을 시작할 때 인터넷이라는 상품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것이기에 사기꾼이나 미친놈으로 불릴 판이었다. 당시 중국에서 인터넷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설명을 들은 사람은 "좀 전에 내 이름으로 우편함을 3개나 가질 수 있다고 했는데, 하나는 사무실에 놓고, 하나는 집에 놓으면 되는데, 나머지 하나는 둘 데가 없는데?"라는 반응이었다. 어쨌던 왕후 호텔과 항저우 제2텔레비전 공장이 가장 먼저 차이나페이지의 고객이 되었다.

 

중국의 야후를 만들겠다는 사업목표를 이루기 위해 마윈은 베이징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열심히 베이징 거리를 뛰어나니며 각부 책임자를 설득하겠다는 도전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업무 제휴, 정보 제공, 홈페이지 제작 수주 둥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됐다. 항저우에선 나름 유명햇지만, 그는 베이징 거리에선 찬바람을 맞는 집 없는 떠돌이 신세와 같았다.

 

1996년 3월, 자본력이 취약했던 차이나페이지는 항저우전신에 합병됐다. 마윈의 판단으로는 베이징 도전이 실패로 끝나자 현실을 더 냉정하게 바라보는 시각이 생기면서 규모가 큰 항저우전신과 계속 맞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97년 12월, 경제무역붕의 정식 요청을 받아 팀을 대동하고 재차 베이징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마윈, 장잉 등 선발대 8명과 펑레이, 한민 등 후발대 5명이 팀에 합류했다. 이들 13명은 성공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로 베이징행을 선택했다. 경제무역부는 대규모 인트라넷 구축 및 공식 사이트 제작 계획을 세우고 이를 마윈에게 의뢰했던 것이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정말로 많은 굴욕과 무력감을 견뎌야 했다. 이에 그는 팀원들에게 세 가지 선택안을 제시했다. 첫째, 지금 사무실에서 계속 일한다. 둘째, 야후 차이나 같은 직장으로 옮긴다. 셋째, 발전가능성이 큰 신생 인터넷 회사로 옮긴다면 추천서를 써 주겠다고 다소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 때는 1998년 겨울,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3일 안에 결정하라고 했다. 동료들은 5분 만에 결정을 내렸다. '다 함께 항저우로 돌아갑시다. 처음부터 다시 사작해요!'였다. 마윈의 리더십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만리장성에 선 마윈 사단 용사들은 저 멀리 겹겹이 이어진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중략)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쌓인 울분을

 

 

 

 

"손님,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 미안해요. 혹시 알리바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알리바바, 당연히 알죠. 열려라, 참깨!"

 

인터넷 열풍과 함께 도메인 이름이 큰 인기를 끌면서 서로 경쟁적으로 도메인 선점에 나서고 있었다. 1998년, 마윈은 미국 출장 중 식당에 들어가서도 오직 이 생각 뿐이었다. 마침 아라비안나이트를 떠올리는데, 주문을 받으러 온 웨이터와 그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웨이터가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대답했고, 이 순간 마윈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이것이 알리바바의 작명 비화이다.

 

1999년 2월 21일, 항저우의 평범한 주택 단지 호반 화원에 위치한 마윈의 가정집. 이 집이 바로 알리바바의 사무실이었다. 마윈은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알리바바 첫 직원 총회였다. 이를 '18나한의 소집'이라고 말한다. 알리바바의 창업 멤버들에게 붙인 멋진 별칭이다.

 

 

 

"이 어둠을 뚫고 나가려면 함께 힘을 모아야 합니다. 다 함께 소리 지르며 앞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내가 선창하면 여러분은 무조건 앞으로 달려 나가야 합니다. 앞으로, 앞으로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18명이 함께 칼을 휘두르고 함성을 질러야 합니다. 우리가 힘을 합하면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전형적인 유학파 인재 차이충신 

 

 

 

 

 

 

 

 

알리바바가 야후를 인수한 지 1년이 지난 2006년 8월 9일, 마윈은 처음으로 알리바바와 야후의 제휴가 실패작임을 시인했다. 이날 2006년 하버드 중미 국제 교류 연합 학생 대표 정상회의에 마윈은 강사로 초청되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특유의 블랙 유머로 자신의 처지를 밝혔던 것이다.

 

"알리바바와 야후의 결합은 성공했다고 볼 수 없게 됐습니다. 지금 저는 결혼식 전날의 신랑이 된 기분입니다. 오랫동안 사랑해 온 그녀와 드디어 결혼하게 됐지만 별안간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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