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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것을 당신이 알게 됐으면
박연미 지음, 정지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책의 저자 박연미는 현재 동국대학교 경찰행정학과에 재학 중이며, 북한 인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1993년 북한 혜산에서 태어나 열세 살 때 탈북에 성공, 현재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세계 각국을 돌며 북한 인권 회복을 위해 애쓰고 있다. 스물두 살이 되던 2014년 2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열린 '세계 젊은 지도자 회의(One Young World Summit)'에 참석해 북한의 참혹한 실상과 인권유린 사태를 전세계에 고발했다. 이 연설은 언론과 인터넷 SNS를 통해 순식간에 퍼졌고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수많은 나라에서 미디어 인터뷰와 연설 요청이 이어졌다. 2014년 영국 BBC '올해의 여성 100인'에 선정되고 국제 사회에 널리 이름이 알려지자 북한 당국이 공식적인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고 지금도 세계 각국을 돌며 강연, 방송, 칼럼 등을 통해 더욱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의 이야기는 책에 담겨 국내는 물론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동시 출간됐으며, <그들이 보고 있는 동안(While They Watched)>이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오직 살기 위해서
박연미가 자란 북한은 그녀의 부모가 어린 시절 살았던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북한 당시의 모습과는 달랐다. 부모님의 어린 시절엔 옷이나 의료, 식량 같은 기본적인 생필품들을 나라에서 전부 해결해주었다. 그러나 냉전 이후 북한은 그동안 지원해준 공산주의 국가들에게 버림받았고 결국 나라의 경제가 붕괴되고 말았다. 북한은 갑자기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어린 그녀는 자신의 집안이 1990년대 북한의 엄청난 변화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동안 어른들의 세계가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녀의 가족은 부모, 본인, 그리고 언니로 구성된 4인 가족이었다. 그녀의 부모들은 어린 두 딸이 잠든 후 어떻게 하면 가족이 굶어 죽지 않을 수 있을까 시름에 잠겨 하루도 밤자리가 편치 않았다. 결국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탈북 뿐이었다.
사실 그녀의 아버지는 밀수 사업을 하면서 돈을 벌었기 때문에 나름 괜찮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이 집권하면서 기근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들에게 소위 '고난의 행군'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이 고통을 고스란히 주민들이 부담하도록 강요했다. 이로 인해 당시 질병과 굶주림으로 사망한 사람이 적어도 10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런 실정으로 북한 주민들은 생활고를 이겨내려고 장사라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감시와 통제에 엄격했지만 수없이 죽어나가는 주민들에게 배급을 할 여력이 전혀 안되었기에 불법 시장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엔 김정일이 국가가 관리하는 '장마당'을 허가하게 되었다. 이런 대변화는 불법적으로 밀수해 유통마진을 챙기던 밀수업자들에겐 대참사였다. 이젠 누구나 장마당에서 물건을 사고팔 수있게 되었으니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 탓이다.
2007년 3월 31일, 어둡고 추운 밤 그녀와 엄마는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덛듬거리며 건너고 있었다. 강둑 위아래엔 국경 수비대가 순찰을 돌고 있었다. 발각될 경우 그들은 총을 난사할 것이다. 이들 모녀는 지금 자유를 찾아 강을 건넌다기 보다는 오직 살기 위해서 중국 땅으로 탈출하려는 것이다.
당시 그녀는 열세 살, 체중 27kg, 혜산시 한 병원에서 장염을 맹장염으로 오진해 1주일 전에 수술을 받아 통증이 심해서 걷기가 힘든 상태였다. 모녀의 탈출을 돕는 이는 북한인 밀수업자로 경비대 소속 군인들을 돈으로 매수해 오늘밤에 반드시 결행해야 한다고 했다. 강둑을 내려가다 돌멩이가 굴러떨어지자 군인들이 소리쳤다. "돌아가! 가라!"
급히 가이드는 중국 쪽 사람과 휴대전화로 통화했다. "뛰어!"라는 소리와 함께 가이드는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이드의 손에 질질 끌려 얼음판을 건넜다. 드디어 국경 수비대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비록 강둑과 북한 땅은 어두웠지만, 북한의 반대편 중국 창바이長白은 불빛으로 반짝였다.
나는 종편방송 채널 A의 <이제 만나러 갑니다>의 애청자이다. 이 프로그램을 '이만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내가 이를 시청하게 된 것은 우연히 신문에서 북한 측이 탈북 단체의 '삐라 살포'와 '이만갑' 때문에 남북교류가 어려워졌다고 불평한다는 기사를 읽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방송에 출연했던 저자는 내 눈에 가냘프고 앳띤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그녀가 이렇게 북한의 인권실태를 세계에 고발할 정도로 강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새삼 놀랐다. 북한의 인권을 논하려하면 현 야당 측 정치인들은 마치 신성불가침 영역인 듯 고개를 돌리는 꼴불견 추태를 보이는데 말이다. 나의 사견으론 야당 측 일부 정치인들 때문에 북한의 문호 개방이 더욱 늦어졌고 그통에 대북지원금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자금으로 전용됨으로써 국민의 혈세만 낭비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만갑'이란 프로그램은 외국의 언론사들에게 더욱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지금도 방송 현장에 외국 방송자의 취재진들이 직접 찾아와 이를 생생하게 보도하고 있다. 아무튼 우연히 '이만갑' 프로그램의 시청을 계기로 지난 프로그램도 전부 다시보기를 통해 봄으로써 북한의 실상과 북한주민의 인권 실태를 소상하게 알게 되었고, 통일에 대한 생각도 재정립되어 펀드에 동참하는 행동으로 연결되었다.
"안 됩니다! 안됩니다!"
다시 박연미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굶주림에서 벗어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죽음의 고비를 넘어 중국 땅으로 탈출한 두 모녀 앞에는 불순한 손아귀가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인간이란 참으로 더러운 동물이다. 자신보다 강한 존재에겐 꼬리를 내려 살랑거리지만 약한 존재에겐 한없이 추악한 몰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양반집에 빌붙어 사는 머슴들의 딸은 주인 양반의 성노리개감이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탈북하는 여성들을 그런 정도로 받아들이는 게 현재 중국의 인신매매범들이라고 한다. 저자의 모녀도 그들의 마각에게 벗어날 수 없었나 보다. 마침내 중국 브로커가 어린 딸에게 성폭행을 가하려하자 그녀의 엄마가 기꺼이 대신 몸을 내놓았던 것이다. 그것도 그녀가 지켜보는 앞에서 말이다.
그녀의 엄마는 북한 업자들에게 중국 돈 500위안, 즉 약 65달러(2007년 환율 기준)에 팔려왔고 인신매매단의 중간 알선책 지팡에게는 650 달러에 팔릴 예정이었다. 그녀가 북한에서 팔려온 가격은 약 260달러였고 지팡에게는 1만 5,000위안, 즉 2,000달러에 못 미치는 가격으로 팔렸다. 이처럼 다음 알선책으로 넘어갈수록 몸값이 올랐다.
자신의 눈 앞에서 사고파는 상품으로 전락해 몸값 흥정이 진행되는 장면을 몇 시간 동안 목격할 때 그녀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 이는 분노감 그 이상의 감정이었다. 그저 공포와 희망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는 것만 알 뿐, 지금 눈 앞의 현실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함박눈이 휘몰아치는 새벽 5시, 중국인 브로커의 아파트 밖 귀퉁이에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브로커는 그녀의 엄마를 밀쳐 쓰러뜨리고는 그녀가 지켜보는 앞에서 마치 짐승처럼 성폭행을 가했다. 그녀의 엄마는 공포에 떨고 있었고, 제발 끝나기만 기다리는 그녀는 처음으로 섹스 장면을 목격했던 것이다. 이후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지린吉林성의 성도省都 창춘長春이었다.
탈북을 했다고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다. 중국 땅을 벗어나 안전한 나라로 가야만 비로소 북한으로 강제 소환되는 공포에서 벗어난 것이다. 탈북민들은 대체로 몇 가지 코스를 거쳐 안전한 한국 땅으로 입국한다. 즉 중국의 접경지대인 몽골, 라오스, 감보디아, 베트남 등을 거쳐 한국 땅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것도 돈을 받고 브로커들이 주선한다. 최근엔 1인당 1천만 원 이상이 든다고 한다.
그녀는 엄마와 함께 한밤중에 몽골 국경을 넘어갈 계획이었다. 이는 어느 선교단에서 진행하는 일이었다. 기나긴 버스 여행은 얼롄하오터二連浩特에서 끝났다. 이곳은 광활한 고비 사막의 한가운데 위치한 국경도시다. 연중 가장 추운 시기로 고비 사막은 기온이 영하 32도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겨울이 더 안전했다. 중국 공안의 순찰이 느슨해지기 때문이다.
"사막에서 밝은 빛이 나오는 쪽은 몽골입니다. 그쪽으로 가세요. 중국 쪽 불빛은 훨씬 흐립니다. 그쪽은 멀리하시고요. 무리와 떨어지거나 나침반을 사용할 수 없을 때는 저 별을 찾으세요. 저쪽이 북쪽입니다"
사막엔 몸을 가려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마른 풀포기가 듬성듬성 있을 뿐 끝없이 돌과 모래거 펼쳐졌다. 추위는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고 할퀴었다. 가벼운 몸으로 움직이라는 선교단의 충고를 무시하고 울 코트를 입고 나선 게 한없이 후회되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긴 밤이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추워졌고 한 명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사막에서 죽을 것이다. 누군가가 우리 뼈를 발견하거나 무덤을 표시해줄까? 아니면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냥 잊힐까? 세상에서 자신이 완전히 혼자라는 깨달음은 살면서 느낀 가장 무섭고 슬픈 일이었다. 그날 밤부터 그녀는 김정일을 싫어하게 되었다.
다른 탈북자들도 같은 문제를 겪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하나원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수업 시간에 자기소개를 하는 일이었다. 교사들은 먼저 이름과 나이, 고향을 말하면 된다고 했다. 그런 다음 취미나 좋아하는 가수, 영화배우 등을 말하고, 마지막으로 '장래 희망'을 말하라고 가르쳐주었다.
차례가 다가오자 그녀는 얼어붙고 말았다. 그녀는 '취미'가 뭔지 몰랐다.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말한다는데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유일한 목표는 당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나'가 없고 '우리'만 있다. 자기소개 연습은 그녀를 영 불편하고 속상하게만 했다.
모든 탈북자에게는 남한에 도착하고 5년 동안 담당 형사가 배정되어 안전하게 정착하도록 도와준다. 그는 그녀의 안전을 확인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했다. 그녀가 북한 정부에 의해 긴밀하게 주시되고 있다는 말이 떨어졌다면서.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는지는 말하지 않았고 위험할 수 있으니 말조심하고 다니라고만 했다.
북한 당국이 그녀 자신을 위협이 될 정도로 중요한 인물로 생각하리라곤, 또한 그녀의 신변을 위협하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했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그녀를 통제하려 하고 있었다. 계속 그렇게 놔둔다면 그녀 자신은 절대로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2009년 4월 한국 땅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열다섯 살이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 학습 능력은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한국 사회의 보이지 않는 장벽에도 불구하고 각고의 노력 끝에 대학교에 입학했고, 북한에선 그냥 원수의 나라로만 알았던 미국의 언어인 영어도 지금 능숙하게 구사한다.
언니를 찾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고 출연했던 채널 A의 '이만갑' 패널로 활동하면서 그녀는 북한의 현실을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목표가 생겼고 이를 착실하게 실천에 옮기고 있다. 서울에 위치한 한 국제학교의 초청으로 처음 북한 인권에 관해 강연한 게 계기가 되어 '세계 젊은 지도자 회의'에 초청받기에 이르렀다. 그토록 찾고 싶었던 언니와도 재회한 그녀의 앞날에 축복이 있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