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가 리더에게 - 대한민국 대표 CEO들에게 던지는 무례한 질문
이석우 지음 / Mid(엠아이디)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중학생 시절, 신학기 어느 날이었다. 담임선생님은 반장을 시켜 교실 뒤에 각자 이름을 쓰고, 그 옆에는 미래의 직업, 또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쓰도록 했다. 다음날 담임선생님이 교실 뒤에 서서 제자들의 꿈을 흐뭇하게 읽어 내려가다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어떤 놈이야? 자기 꿈이 회사원이라고 쓴 놈이!" 나이에 비해 조숙한 편이었던 K의 소행이었다. 선생님은 K를 호되게 야단쳤다. 구경하던 같은 반 친구들은 키득거렸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만난 K는 회사원이 됐다. 그리고 미래의 꿈을 국회의원, 의사, 군인, 파일럿이라고 썼던 친구들도 대부분 회사원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꿈이 회사원인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 '서문' 중에서

 

 

 

 

 


힘들게 입사한 후에는 한참 어렸던 시절 꿈의 리스트에 끼지조차 못했던 CEO라는 자리는 너무나도 높았다. 대기업일수록 CEO는 이미 실현 불가능한 꿈이고, 오를 수 없는 나무였다. 평사원에서 과장으로, 과장에서 차장으로, 차장에서 부장으로 제때 승진하는 것조차 얼마나 어려운가 말이다.

 

헤드헌팅 업체인 유니코써어치의 자료(2011년)에 따르면 100대 기업의 임원이 되려면 직장 동료 105명과 경쟁해 이겨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매출액 기준 100대 상장 기업을 분석한 결과 상근 임원 수는 6619명, 직원 수는 69만 6284명으로 임원이 되기 위한 경쟁률이 무려 105.2대 1로 나타났다. 이럴진대 단 한 명의 CEO가 되기 위한 경쟁은 이보다 몇 십배 더 치열하다. 이런 계산에 도달한 회사원은 스스로 사장이 되기로 결심한다. 치킨집, 피자집, 또는 호프집 사장 말이다.

 

책의 저자 이석우는 현직 기자이다. 그는 9명의 CEO들과 인터뷰를 가졌다. 이들은 직장 초년병 때부터 CEO를 꿈꾼 적도 없었고, 어린 시절엔 아예 이런 꿈을 가져본 적도 없다고 말한다. 그저 회사에서 꾸준히 오래 근무하다 보니 강력한 경쟁자들이 미리 퇴사하는 바람에 운 좋게 그 자리에 올랐다고 말한다. 설마 운이 좋아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겠는가. 그들의 이야기는 현재 회사원이거나 직장인이 되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참고서인 셈이다.

 

 

책에 등장하는 9명의 인터뷰이를 소개하면 김종식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전 커민스코리아 사장, 타타대우상용차 대표이사 사장), 김종훈 한미글로벌 회장, 노연상 경동원 사장(전 에쓰오일 사장), 서병문경기컨텐츠진흥원장(전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장, 삼성전자 부사장), 신원기 전 르노삼성자동차 부사장·삼성전자 전무, 이태용 아주그룹 부회장(전 대우인터내셔널 사장), 조봉연 팬아시아캐피탈 사장, 조성식 서울시녹색산업협회장(전 포스코에너지 사장), 조영철 (사)CEO 지식나눔 공동대표(전 삼성화재 부사장, CJ홈쇼핑 사장) 등이다.

 

 

 

백주 대낮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국회 청문회 TV 생방에서 수백만 월급쟁이를 머슴이라 부른 이가 있다. 1997년 수천억 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뇌물을 제공한 사건 때문에 국회로 소환된 옛 한보그룹의 정태수 회장이다. 당시 국민회의 국회의원이었던 이상수 의원이 질문하고 정태수 회장이 답했다.

 

Q: 한보 재정본부 차장 말로는 3000억 원을 대출받았어도 2개월 이상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A: 주인인 내가 알지 머슴이 어떻게 압니까?

 

이날 한보그룹 직원들은 머슴이란 말에 화가 치밀어 올라 노조에다 전화를 걸어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룹의 회장이 내뱉은 머슴이란 단어는 마치 산업사회를 농경사회로 되돌리는 듯한 시대착오적인 발언이었다. 그럼에도 20여 년 가까이 한국 사회에서 그 어떤 경영학자도 월급쟁이를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정의하지는 못했다. 회사원이 머슴에 불과하다면 회사는 밥벌이하는 곳 이상의 의미를 갖기 힘들다. 직장으로 출근했다는 것 자체가 우울함의 이유가 되고, 내 인생의 비극 또한 직장에서 시작된다.

 

 

 

회사원 10명 중 7명이 직장에 출근하면 우울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들이 취업준비생으로 살던 시절에는 회사원이 되지 못해 우울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20~30대 청년 백수들은 월급쟁이가 되려고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다. 회사원이 되지 못한 백수들은 우울증에 시달리고, 대인기피증에도 시달린다. 이들 취업 준비생이 당장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회사원이 되는 것뿐이다.

 

월급쟁이가 되면 회사에 출근하는 것 때문에 우울증에 걸리고, 구직자 시절에는 월급쟁이가 되지 못해 우울증에 시달린다. 또 월급쟁이 신세를 그렇게 한탄하면서도 많은 사람들 대부분이 월급쟁이로 살아간다. 설문조사에선 출근하는 것 자체가 우울하다고 답했을지는 몰라도,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월급쟁이로 사는 데는다 이유가 있다. 단지 갈 곳이 없어서, 다니고 있는 직장 말고는 받아주는 곳이 없어서 이 회사에서 월급쟁이로 사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월급쟁이는 말단 직원에서 시작해 회사의 CEO까지 올라갈 수 있는 균등한 기회가 있다. 물론 엄청난 경쟁을 뚫고 CEO 자리에 오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리 경쟁률이 치열하더라도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다. 회사를 다니는 또 다른 재미도 있다. 창업에 비하면 매달 나오는 급여로 삶을 안정적으로 꾸려 나갈 수 있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다. CEO의 자리에 그리고 임원의 자리에 도전하는 동안 퇴직금이 늘어나고, 월급을 모아 더 넓은 집으로 옮길 수도 있다. CEO에 도전하다 미치지 못해 임원까지만 올라가도 노후 걱정이 크게 줄어든다.

 

 

 

도전도 어차피 회사 돈으로 하는 게임이다

 

부장, 차장급 직원에게 '회사의 운명'을 결정할 책임과 권한이 생긴다면 어떤 기분일까? 좋다고 덥석 그 일을 떠맡을 회사원이 과연 얼마나 될까. 월급쟁이에게 회사의 운명을 결정하는 업무를 맡으라는 것은 너무 무거운 짐을 떠맡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회사에서 믿고 일을 맡기는데 '못 하겠다'고 발을 빼버리면 그 회사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야말로 바둑판에서 양곤마兩困馬에 놓인 심정과 같을 것이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외통수라면 두 눈 질끈 감고 일을 떠맡는 편이 낫다고 한미글로벌 김종훈 회장이 제안한다.

 

그가 꼽는 월급쟁이의 큰 장점이 바로 이것이다. 아무리 거액의 계약이나 사업이라도, 어차피 '내 돈으로 하는 게임'이 아니다. 사실 책임져야 할 범위는 정해져 있고, 실패해도 책임질 부분이 그리많지 않다. 엄청난 부정부패 사건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회사원들은 수백, 수천억 원짜리 공사나 계약을 실패하더라도 최악의 경우 사표를 쓰면 그것으로 끝이다. 대표 이사가 아닌 이상 회사 대출에 연대보증을 설 일도 없다.

 

"뭘 망설여. 이건 성공만 하면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횐데, 일단 한번 도전해 봐라" 

 

물론 이런 엄청난 결정을 할 때는 누군가로부터 '네 결정이 맞다'는 동의를 구하는 게 마음 편하다. 그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의견이 결정적이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낫다. 최종 결정을 앞두고 뜬눈으로 밤을 새던 당시 삼성물산 현장소장이던 김종훈도 해외 건설 현장의 경험이 많은 대학 선배에게 자문을 구했다. 기대했던 대답이었다. 그는 세계 최고最高의 건물인 쿠알라룸푸르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를 건설하기에 경험은 부족할지라도 혼신을 다해 도전해보겠노라며 현장 소장직을 수락하고 말레이시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최선을 다해야 2, 3등도 가능하다

 

그는 선발대 7명과 함께 쿠알라룸프르 현장에 도착했다. 현장실사에서 얻은 결론은 예상보다 훨씬 가혹했다. 이 공사는 일본이 한 달 먼저 착공을 시작했지만, 완공은 동시에 해야 한다는 계약 조건이 포함돼 있었다. 심지어 공사를 하는 중간중간에 일정 목표치도 설정해 놓고 이를 달성하지 못하면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이런 조건들을 이행하면서 88층짜리 건물을 27개월 만에 완공해야 했다. 당시 현장에선 빌딩 한 층을 올리는 데 한 달 정도 걸리는 것을 정석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 계획으로는 도저히 공기를 맞추기가 불가능했다.

 

시공사가 초고층 빌딩을 지을 때 공사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는 콘크리트를 높은 곳까지 빠르고 안전하게 옮겨야 한다. 공사 경험이 많은 일본 건설사는 공사용 임시 엘리베이터를 가동해 1단계로 중간층까지 콘크리트를 운반하고다시 압력 펌프로 콘크리트를 쏘아 올리는 방식을 도입했다. 하지만 출발이 늦었던 김종훈은 엔지니어들의 의견과 각종 자료를 분석해 지상에서 곧바로 콘크리트를 400미터 이상 쏘아 올리는 '직접 펌핑' 공법을 도입하는 모험을 선택했다. 당시 이 공법은 검증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삼성의 입장에서는 남들이 하는 대로 해서는 공기를 맞추기 힘든 상황이었다. 일본 기업과 공개적으로 경쟁하는 상황에서 공사를 제때 끝내더라도 승부에서 진다면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이는 김종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삼성그룹의 체면이 걸린 일이기도 했다. 완승하거나 완패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했다. 직장 생활에도 언젠가는 결정적인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는 결정적인 순간 대담하게 결정하고 승부를 거는 방식을 택했다. 적어도 그의 결정은 '2등만이라도 하자'는 식의 타협은 아니었다.

 

어느 조직에서나 2등이라도 하면 대단한 것이다. 그런데 직장이란 곳에는 수많은 '2등 주의자'들이 버글거린다. 남성 직장인의 상당수는 군대에서 1등을 해선 득보다 실이 많음을 경험했다. 그래서 1등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이 우리에게는 숨어 있다. 회사를 위해 온 몸을 던져 일하는 것은 아무래도 손해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소위 '머슴' 근성이 수시로 요동을 치는 것이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 보라. 2등을 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달려들어서는 실제로 2등을 한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1등 하려고 죽기 살기로 달려들어야 2등도 겨우 하지 않던가. 김종훈이 말레이시아 건설 현장에서 "대충 공기라도 맞춰 공사를 끝내보자"는 식으로 일했더라면 사실 그 목표조차 달성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직장 선배들의 고언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 거의 대부분은 직장에서 수십 년 동안 생활하며 치열한 경쟁을 거쳐 최고의 자리에 오른 선배들이 직접 경험한 것이다. 이들이 바라본 직장생활의 원칙, 노하우, 마음가짐 등을 소개한다. 이미 장기간의 근속과 함께 경쟁에서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 만으로도 우리들에게 훌륭한 귀감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읽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재 취업을 준비 중인 청년, 이직을 고민하거나 창업을 고려 중인 직장인, 그리고 회사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