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향기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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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향기가 나는 물고기가 있다. 바로 은어銀魚다. 조선시대 임금의 진상품으로 올려지기도 했던 이 물고기는 민물에서 부화하여 바다로 나갔다가 산란을 위해 다시 민물로 찾아오는 회귀성 어류이다. 몸길이가 약 15cm로 강바닥에 자갈이 많은 맑은 하천에서 서식한다.

 

경북 안동은 예로부터 산과 물이 좋아 은어 서식지로 유명한 고장이다. 이 지방의 은어는 진한 수박향과 담백한 맛 때문에 조선시대에 임금에게 진상되었다. 보물로 지정된 안동 석빙고 바로 왕실 진상용 은어를 보관하기 위해 축조된 건축물이다. 안동의 전통 음식으로 은어구이와 은어를 삶아 육수를 낸 건진국수가 유명하다.

 

도서 제목 때문에 진한 수박향이 나는 안동은어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여름철의 별미음식인 건진국수를 많이 먹고 자랐기 때문이다. 또한, 수박 때문에 원두막도 생각났다. 먹거리가 많지 않았던 어린 시절, 여름 밤엔 동네 아이들과 함께 수박서리를 다녔다. 달빛이 환한 어느 날, 원두막 보초에게 들켜 도망치다 넘어져 얼굴을 다쳤다. 외할머니가 왠 상처냐고 물었지만, 수박서리는 절대 말하지 않았다. 

 

 

 

 

 

이 책은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이다. 수박향기, 후키코 씨, 물의 고리, 바닷가 마을, 남동생, 호랑나비, 소각로, 재미빵, 장미 아치, 하루카, 그림자 등 11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1편의 이야기 모두 어린 시절의 기억을 얘기하고 있다. 그것도 여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먼저 에쿠니 가오리의 단편 '수박향기'를 만나보자. 아홉살 소녀의 여름은 끔찍했다. 그녀는 엄마가 출산을 앞두자 숙모 집에서 방학을 보냈다. 숙모 부부는 젊고 친절했지만 슬하에 아이가 없어 집안 분위기가 차분하고 무미건조했다. 그녀는 이불 속에서 매일 울었다.

 

서랍장에서 지갑을 훔쳐 집을 뛰쳐나갔다. 첫 도둑질이라 정신없이 달렸다. 강 건너 자그마한 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오라는 듯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두 무릎으로 마루를 기어서 방문 안을 들여다 보았다. 세 평 정도 되는 방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이 보인다. 등 뒤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의 엄마였다.

 

아줌마의 고함 소리와 함께 남자아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이 둘은 윗몸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도 그녀를 보자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소름 끼쳤다. 일단 방으로 들어오라는 아줌마의 목소리는 불길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온 집안의 덧문을 꼭꼭 닫았다. 앉은뱅이 밥상에 양파가 든 된장국, 계란 후라이, 그리고 두부와 밥이 차려져 있었다. 그녀는 먹을 수가 없었다. 아줌마는 징그러울 정도로 상냥하게 웃으며 이것 저것 물어왔다. 내일 숙모집에 안전하게 데려다 준다며 안심을 시켰지만 그녀는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식사후 아줌마는 수박을 내왔다. 쟁반에 수북하게 잘린 수박이 쌓여있다. 한 아이가 수박을 집으려고 손을 뻗는데 새까만 개미가 꼬여 있었다. 쟁반에 고인 수박 물에도 개미들이 꼬물거렸다. 그래도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수박을 베어 물었다. 개미가 툭 터지면 시큼한 맛이란다.

 

세 평짜리 방에 이부자리 두 채를 깔고 넷이서 잤다. 겁이 날 정도로 조용하고 후덥지근했지만, 신기하게도 푹 잤다. 덧문 두드리는 소리와 이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줌마도 아이 둘도 없었다. 덧문을 여니 경찰관과 숙모 부부가 서 있었다. 숙모는 울음을 터뜨렸다.

 

아침 일찍 한 여자가 이 집에서 여자아이 소리가 난다며 경찰서에 신고했단다. 이 집은 오래 전부터 비어 있던 집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동생을 낳았다. 그날 밤의 일은 숙모에게도 부모에게도 비밀로 했다.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은 언제나 에쿠니의 비밀로 가득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에쿠니의 비밀'을 읽고난 후에 독자들은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질 것 같다.

비밀을 들은 후에는 역시 자신의 비밀도 털어놓고 싶어진다.

친밀한 비밀의 주고받음.

에쿠니의 비밀은 어쩌면 그렇게 긴밀하고 예쁘고 애처로울 수 있을까

 

 - 가와카미 히로미(작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하숙생 후키코 씨의 이야기를 하는 소녀, 달팽이를 밟아 죽이고 죄책감을 느끼는 소녀, 한여름에 치르는 남동생 장례식 얘기를 하는 소녀, 신칸센에서 만난 낯선 여자와 도망치려는 소녀, 이혼한 엄마와 옆집 삼촌을 이상하게 여기는 소녀 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주인공이 소녀이지만 내용은 오히려 괴이하고 섬뜩하다.

 

여름의 과일은 수박이다. 무더운 여름의 친구는 더위를 잠재워 줄 괴기, 공포, 스릴 등일 것이다. 그래서, 수박향기는 여름에 잘 어울리는 단편소설이다. 아울러, 에쿠니의 화려한 글솜씨는 11명의 소녀들이 갖고 있는 기괴한 비밀이나  끔찍한 기억들을 오히려 예쁘게 표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마치 나의 비밀을 공개하라고 압박하는 듯 하다.

 

 

무더운 한 여름 밤, 마당 한가운데 놓인 평상에 누워 반짝이는 별과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는게 심심할 즈음 외할머니는 팔뚝에 닭살이 돋는 얘기 보따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캄캄한 공동묘지, 살쾡이 소리, 음산한 바람, 하얀 소복, 길다란 머리카락 등을 하나씩 끄집어 낼 때마다 나는 비명을 질러댔다. 더위가 싹 가셨다. 에쿠니의 이야기 보따리는 외할머니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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