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한 수 - 위기의 순간, 나라를 살린
신동준 지음 / 북클래스(아시아경제지식센터)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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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사策士란 꾀를 잘 내어 일을 성사시키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가 잘 아는 역사 속의 인물로는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제갈공명이 이에 해당한다. 최고통치자의 리더십이 국가의 흥망을 좌우한다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2인자의 보필이다. 하물며 기업경영도 국가경영과 다를 바가 하나 없다. 총수가 뛰어난 식견을 가졌다해도 곁에서 이를 보좌할 사람이 전무하다면 그 힘은 분명 반감될 것이다.

 

역사 속 특히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는 수많은 영웅호걸과 책사들이 등장하여 그 실력을 겨루었다. 가히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기였다. 이 책에는 춘추전국시대를 대표하는 2인자 8명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그들을 각각 지신智臣, 양신良臣, 정신貞臣, 현신賢臣, 모신謀臣, 간신諫臣, 능신能臣, 직신直臣으로 나누어 그들만의 독특한 2인자 리더십을 설명하고 있다.

 

관중 - 제나라 지신智臣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유명한 관중은 제나라 사람으로 공자가 매우 존경한 인물이다. 관중과 포숙아는 각각 제나라 양공의 이복동생인 공자 규와 소백을 가르치는 스승이었다. 어느 날 양공이 피살되어 정국이 소용돌이 속에 빠지자 포숙아는 재빨리 소백을 데리고 제나라 인근의 거나라로 피신했다. 반면 관중은 공자 규가 보위 계승 1순위이므로 그와 함께 도성안에 피신해 있었다. 그러나, 정국이 수습되지 않고 오히려 쿠데타 세력이 공자 규를 죽이려하자 관중은 규와 함께 규의 외가인 노나라로 달아났다.

 

이후 제나라의 대부들이 합세하여 쿠데타 세력들을 제거한 뒤 정통성를 가진 공자 규와 소백 중 한 사람을 왕위에 옹립하려했다. 빨리 제나라에 도착하는 사람이 왕이 될 상황이었다. 지리적으로 제나라에서 가까운 나라는 거나라였기에 소백이 매우 유리했다. 불리함을 느낀 관중은 규를 왕위에 옹립하고자 별동대를 데리고 제나라의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소백에게 화살을 날렸다. 소백이 쓰러지자 그는 급히 규에게 입국하라고 연락했다.

 

그러나, 규의 행렬이 제나라 경계에 도착했을 때 이미 소백은 왕위에 오른 후였다. 소백은 자신에게 쏜 화살이 혁대에 맞자 죽은 척했던 것이다. 소백이 바로 후에 춘추시대의 첫 패자覇者가 되는 환공桓公이다. 이리되자 공자 규의 외가인 노나라는 소백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제나라에 전쟁을 선포했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승전한 소백은 공자 규를 죽이고 관중은 제나라로 압송하라고 노나라에 요구했다. 결국 노나라의 장왕은 공자 규를 죽이고 관중을 제나라로 압송했다. 관중을 압송하게 된 이면에는 포숙아의 강력한 건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보필하는 나라는 반드시 패권을 차지할 것이니 그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20 쪽) 

 

관중은 예禮, 의義, 염廉, 치恥를 국가의 근본으로 삼고 재정경제를 튼튼히 하면 나라가 부강해진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를 토대로 제나라가 부강한 나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것은 또한 인재경영 탓이었다. 자신보다 나은 인재를 천거한 포숙아, 자신에게 활을 쏘았던 관중을 발탁한 환공 등의 뛰어난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기,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쓸 줄 알던 사람 잠들다"

- 철강왕 카네기의 묘비명 중에서

 

관중은 치국의 길은 반드시 백성을 잘살게 하는 데서 시작한다며 '필선부민必先富民'을 주장했다. 창고 안이 충실해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넉넉해야 영욕을 아는 법임을 깨닫고 있었다. 그의 부민富民철학은 '중본억말重本抑末'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여기서 '본本'이란 농, 축, 수산업을 뜻하며, '말末'이란 사치소비재의 생산과 유통, 고리대금업을 의미한다. 즉 1, 2차 산업이 제대로 육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금융서비스업이 기형적으로 커지면 경제가 파탄에 이른다는 것이다. 농업과 염철 등 1, 2차 산업의 활성화로 제나라의 수도인 임치성엔 장사꾼들이 구름처럼 몰렸다고 한다. 후대의 학자들은 임치성의 상주인구가 대략 10만여 명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아무튼 금융자산의 버블을 우려하여 이를 억제한 그의 정책은 온고이지신으로 삼아야 할 것 같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사치하면 국고를 낭비하게 되어 인민들이 가난하게 된다. 인민들이 가난해지면 간사한 꾀를 내어 나라를 어지럽히게 된다" (38 쪽)

 

 

오자서 - 오나라 모신謀臣

 

'오월시대'의 개막은 오랫동안 남방을 호령하던 초나라가 중원으로의 진출에만 신경을 쓰고 내정에는 소홀히 함에 따라 빚어진 현실이었다. 장강 하류 동남쪽에서 신흥세력인 오와 월나라가 급부상했다. 오는 오늘의 강소성 남부와 절강성 북부의 비옥한 평원을 차지하고 있었고, 월은 절강성 중남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다. 지리적으로 두 나라는 붙어 있었기에 양립이 불가능했다.

 

초나라 평왕에게는 정식 혼례를 치르지 않은 지방 장관의 딸 사이에 태어난 아들 건이 있었다. 나이 15살이 되자 비무기의 추천으로 진秦나라에서 며느리를 들였다. 그런데, 웃기는 촌극이 발생했다. 며느리가 될 여인이 워낙 미색인지라 비무기는 초평왕에게 이 여인을 취하고 왕비로 삼게 했다. 비무기는 후환이 두려워 평왕을 설득하여 태자 건을 변방에서 근무하도록 만들었다.

 

비무기의 생각대로 이 여인이 아들 웅진을 낳았다. 그러자, 비무기는 태자 건과 이를 비호하는 오사를 싸잡아 모함했다. 비무기의 모함으로 죽음에 내몰린 태자 건은 잽싸게 송나라로 도망쳤다. 그러자 비무기는 오자의 자식들을 모함하기 시작했다. 오자에게는 자식이 둘있었다. 형인 오상은 동생 오자서에게 원수를 갚아 달라고 부탁하고 순순히 소환에 응했다. 오자서가 도망치자 평왕은 격분하여 오사와 오상을 저자에서 처형하고 말았다. 오자서의 복수심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오자서는 태자 건이 있는 송나라로 피신했지만, 송의 사정이 매우 혼란스러워 오나라로 향했다. 오자서는 오왕 요의 사촌 형인 공자 광이 딴 뜻을 품고 있음을 알아 채고 자객을 광에게 추천했다. 자객의 이름은 전설제인데 후일 광을 위해 오왕 요를 죽인다. 초평왕이 죽자 왕자 웅진이 초소왕으로 즉위했다. 초나라의 국상을 틈타 오나라는 초를 침공했다. 이는 오자서의 계책이었다.

 

공자 광은 지하실에 무장한 갑사들을 숨기고 오왕 요를 집으로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공자 광이 자리를 비키자 자객 전설제가 '전어'요리 속에 칼을 감추고 들어가 요리를 올리는 척하며 순식간에 요의 급소를 찔러 죽였다. 공자 광은 매복시켜준 군사를 동원하여 요의 일당을 모두 제압하고 왕 위에 올랐다. 이 사람이 바로 오왕 '합려'이다. '합려'란 '누추한 오두막 집'을 뜻한다. 이는 후대의 사관이 공자 광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의도가 담긴 듯하다.

 

오왕 요의 동생인 공자 두 사람이 초나라로 도주해 오자 초소왕은 오나라와 가까운 땅을 영지로 하사하고 그곳에 머물게 했다. 오왕 합려를 자극했다. 합려는 초나라로 도주토록 만든 서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서나라의 군주도 초나라로 망명했다. 이에 오는 초를 쳐 대승을 거둔다. 그런데, 합려는 급습을 노린 월나라와의 접전에서 사망한다. 뒤를 이어 아들 부차가 왕이 되었다.

 

부차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초나라에서 망명했던 백비를 발탁 인사하고 오자서를 고문 정도의 위치로 밀어냈다. 부차는 회계산 전투에서 월왕 구천을 대파했다. 구천은 부차의 노복이 되어 충성을 하겠다고 다짐하고 목숨을 구걸했다. 오자서는 차제에 월나라를 완전히 멸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건의는 묵살되고 오히려 백비의 강화론이 채택되었다. 이후 구천의 석방문제를 놓고 또 다시 오자서와 백비는 격돌했다. 이 때에도 오자서의 강경론 대신 백비의 석방론을 부차는 수용했다.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제나라 토벌 문제였다. 백비는 하루 속히 제나라를 치고 부차가 패자의 자리에 오를 것을 부추겼다. 그러나, 오자서는 이것이 월나라 구천의 간교한 속셈임을 알기에 이를 말렸다. 당시 오자서는 제나라의 사신을 자청해 은밀히 자식을 제나라 대부 포씨에게 맡겼다. 부차는 오자서의 이러한 행동을 매국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보검을 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강요했다. 오자서가 죽은 후 오나라는 결국 월나라에 패망당하고 만다. 백비는 월나라의 태재가 되었다.

 

"나의 무덤가에 가래나무를 심어두시오. 나무가 관을 짤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할 때면 오나라는 대략 망하고 말 것이오. 자만하며 교만해지는 자는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는 게 하늘의 이치요" (167 쪽)

 

'부차'란 '덜 떨어진 일개 사내'란 뜻이다. 충신 오자서를 죽음으로 내 몬 어리석은 군주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구천의 간교한 술책을 읽어내고 충언을 서슴치 않았던 오자서를 믿지 않고 그를 죽게 만든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주군을 설득하는 방법이 다소 거칠었다는 오자서와 신하의 충성스런 간언을 무시했던 부차, 이 두사람 때문에 오나라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고리대금을 하는 자들을 '저축은행'으로 둔갑시켜 주고 뇌물을 받아 먹고, 이를 감독해야 할 위치에 있는 금융감독원과 감사원에 이르기까지 한통속이 되어 부정을 저지른 '부산저축은행'의 사태를 생각해보면, 왜 오자서 같은 당당한 관리가 이 시대에는 없는지 아쉬움이 든다. 오자서의 흠이라면 미리 사직을 하지 않은 것이리라. 무릇 사람은 박수칠 때 떠날 줄 알아야 한다.

 

 

인상여 - 조나라 직신直臣

 

조나라는 무령왕 시절 강력한 군사정책을 펼쳐 진나라와 대등한 위세를 떨쳤다. 무령왕이 죽고 혜문왕이 즉위하면서 다시 어려운 국면에 처했다. 그러나, 인상여란 인물 때문에 나름 선방하고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 중 '염파인상여열전'에 의하면, 인상여는 조나라 사람으로 환자령(환관의 우두머리) 무현의 집사 출신이다. 쉽게 말해 미천한 출신임을 시사하고 있다.

 

'화씨벽'은 조나라에서 생산되는 옥덩어리이다. 진나라에서 15개 성읍과 화씨벽을 교환하자고 제의해 왔다. 혜문왕은 진나라가 화씨벽만 취하고 땅을 주지 않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 때 인상여가 나서서 진의 요청을 거절하면 이는 조의 허물이 됨을 지적하면서 자신이 직접 사자로 가서 완벽하게 일처리를 하겠다고 혜문왕을 안심시켰다.

 

인상여가 화씨벽을 들고 진나라로 입국하자 진나라의 소양왕은 크게 기뻐했다. 화씨벽을 전달받아 감탄을 연발하며 중신들과 돌려보며 구경하면서도 땅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에 인상여는 진나라의 속셈을 눈치채고 화씨벽에 미세한 흠이 있다며 돌려주면 그것을 알려주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다시 돌려 받았다.

 

화씨벽은 천하에 둘도 없는 보물이므로 닷새 동안 목욕재계하고 '구빈지례九賓之禮'를 행해야만 화씨벽을 바치겠으며 이에 응하지 않으면 바로 부숴버리겠다고 인상여는 소양왕을 윽박질렀다. 워낙 탐나는 보물인지라 인상여의 전략이 먹혀 들었다. 소양왕이 이를 승락하자 숙소로 돌아온 인상여는 수행원을 변복시켜 화씨벽을 조나라로 가져 가도록 했다.

 

닷새가 지나자 인상여는 소양왕에 나아가 진나라는 이십여대 동안 약속을 지키는 군주가 없었음을 상기시키며 화씨벽을 다시 조나라로 돌려보냈으니 자신을 처벌하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자, 소양왕은 화씨벽을 얻지 못할 바에야 공연히 나쁜 소문을 퍼뜨릴 이유가 없다면서 그를 빈객의 예로 대우하고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혜문왕은 그가 귀국하자 그를 상대부로 삼았다.

 

진나라의 소양왕은 화씨벽을 갖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인상여가 '완벽'의공을 세운지 4년이 흐른 후에 소양왕이 하남 땅 민지현에서 회합을 갖자며 조나라로 사신을 보내왔다. 조나라의 혜문왕은 진나라가 과거에도 회합을 미끼로 다른 나라의 왕들을 인질을 삼았던 사례를 거론하며 민지에서의 회합에 대하여 무척 겁을 냈다.

 

그러자 인상여가 왕을 직접 수행하겠다고 나섰다. 한편, 염파 장군은 인질의 경우에 대비하여 30일이 지나도 귀국하지 못하면 태자를 왕으로 옹립하겠다고 약조까지 받았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이 회합에서도 인상여의 기지와 강경한 태도 때문에 동등한 위치에서 조와 진 두 나라는 우호조약을 체결했다.

 

진나라 신하들; "오늘 군왕이 각별한 대접을 받았으니 이 자리를 축하하는 뜻에서 15개 성읍을 우리 진나라에 바치시요"

인상여; "조나라가 즉시 15개 성읍을 바칠 터이니 진나라도 조왕의 장수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함양성을 우리에게 내주시요"

 

민지에서의 회동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국하자 혜문왕은 인상여의 덕분으로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며 그의 공적을 치하하며 상경 벼슬을 내렸다. 조나라에서 제일 높은 벼슬이었다. 염파 장군은 일개 미천한 집사 출신인 인상여 밑에서 벼슬을 하려니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인상여를 만나면 욕을 보이겠다고 말했다.

 

인상여는 염 장군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리고 행동에 늘 신중했다. 외출했다가 염 장군의 수레가 보이면 재빨리 하인에게 골목으로 자신의 수레를 숨기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한번은 인상여의 하인들이 염 장군의 눈치를 너무 본다면서 창피해서 대감을 못 모시겠다고 항의를 했다. 그러자, 그는 두 마리의 호랑이가 다투면 진나라만 좋아할 일이라며 사사로운 원한보다는 나라가 더 소중하다고 말하자 하인들 모두 이에 탄복했다. 염파가  이말을 전해 듣고 웃통을 벗고서 가시덤불을 짊어진 채 인상여의 문 앞에서 사죄를 청했다. 두 사람은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고 진나라의 위협으로부터 조나라의 안녕을 보호했다 .

 

 

이 밖에도 백성을 먼저 생각한 초나라 양신良臣 손숙오, 공자를 감동시킨 정나라 현신賢臣 자산, 2인자의 모범이 된 제나라 정신貞臣 안영, 토사구팽을 피한 월나라 간신諫臣 범리, 통일의 기반을 닦은 진나라 능신能臣 상앙 등의 이야기도 실려 있다. 금세기 현재 글로벌 기업들의 총수는 현량과 모책을 앞세우고 있다. 갈수록 치열한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리가 있는 선택이다. 고사성어의 탄생 비화는 덤이다. 8인의 2인자 리더십은 현재에도 유용하다 하겠다. 나는 누구를 닮을까 곰곰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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