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Power -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힘의 논리
문재철 지음 / 글로세움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권력은 5년마다 바뀐다. 이 책은 정치 일선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체득한 경험을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권력 주변에서 벌어지는 시행착오를 조금이라도 줄여보자는 저자의 바람에서 이 책이 탄생되었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 단임제이다. 시한부 정권이라는 속성 때문에 부작용이 많이 발생한다. 

 

"권력이란 지나고 보면 한낱 뜬구름 같은 거죠.... 힘 있다면 벌떼, 아니 똥파리처럼 달라붙다다 힘 빠지면 어느새 그 많던 사람들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15 쪽)

 

한때 정권의 실세였던 A씨의 말이다. 힘이 떨어지면 대통령 임기 막판에 장관직을 제의해도 사양하는 것이 권력의 종말에 찾아오는 일반적인 모습이다. 집권 후반기엔 여지없이 배신의 계절이 찾아온다. 권력의 누수, 즉 레임덕이다. 누구를 탓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 바로 권력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YS의 문민정부가 출범했다. 이들은 투쟁에 매우 익숙한 사람들이어서 6공의 퇴임 권력에 대해선 반격을 가했다. 초대 내각의 인선 원칙은 '과거와의 단절'이었다. 조각의 첫 단추를 구경해보자. YS는 군부와 인맥이 없기에 평소 친분을 유지했던 육사 17기 이병태 전 장군을 장관급인 비상기획위원장으로 내정했다. 당시 호놀룰루 총영사로 근무 중이었다. 한편, 보훈처장으로 당초 내정된 인물이 강력하게 고사하는 바람에 귀국 중이던 이병태 총영사를 차관급인 보훈처장으로 급히 돌리면서 각료직에서 비상기획위원장 자리를 아예 빼버렸다.

 

"비상기획위원장이 빠진 채 문민정부 첫 조각 명단을 발표한 것은 한마디로 코미디였지요" (55 쪽)

 

3공(박정희)과 5공(전두환) 때의 인물을 제외하고 사람을 찾으려니 마땅한 인재가 없었다. 그러자, 한완상은 서울대 간판이니 통일부장관으로, 한승주는 영어를 잘하니 외무장관으로... 식으로 조각했다. 내각 인선이 발표되자 언론은 집중포격을 가했다. 서울시장은 그린벨트 내 호화주택 파문, 보사부장관은 부동산 투기 의혹, 법무장관은 자녀의 국적문제 등으로 줄줄이 낙마했다.

 

야권의 총수로 오랜 세월을 보내며 YS는 모든 일을 혼자 결정하는 것이 몸에 배여 있었다. 더욱 나쁜 것은 다른 사람의 얘기를 아예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오로지 개혁과 청산에만 관심을 두었다. 군부의 하나회와 과거 핵심 정치인들의 청산, 이후 중앙청 건물의 철거를 감행하는 가운데 YS에 대한 국민들의 인기가 급격히 시들어졌다.

 

"수십 년간 야당지도자였다는 특징 때문인지 독불장군식이었습니다"

- 한승주 전 외무장관-

 

문민정부 출범 4년 만에 인기도는 10%대로 급락했다. 이후 퇴임까지 결코 회복되지 않았다. 권력은 유리처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혼자 차지하면 독재요, 지나치게 쪼개지면 혼란스럽다. 집권 후반기에 외환위기가 찾아오고 이에 늦장 대응하면서 한국은 백척간두의 끝으로 내몰렸다. 문민정부는 이렇게 끝이 나면서 영원한 라이벌 DJ에게로 권력이 이동되었다.

 

 

DJ도 별반 다를게 없었다. 입으론 엄청난 계획을 발표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없이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DJ 역시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었다. 집권 2년차 '옷 로비 사건'이 터지면서 레임덕이 일찍부터 왔다. 정현준 게이트, 진승현 게이트, 이용호 게이트, 최규선 게이트까지 줄줄이 비엔나처럼 이권 개입의 의혹이 불거져 나왔다.

 

 "YS와 DJ는 자식들의 문제로, 노무현 대통령은 형의 문제로..., 결국 친족이 대통령과 정권을 망친 겁니다" (111 쪽)

 

DJ와 YS는 약속을 번복하면서 우리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두 사람은 각각 14대, 15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약속을 지켰다면 DJ는 대통령에 불출마했을 것이고, YS도 내각제 총리가 되었을지 모른다. 과거부터 정치는 약속위반의 연속이었다. 퇴장 약속을 지킨 정치인은 몇 손가락 꼽을 정도이다.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이 많이 나와야 우리 정치가 발전할 것이다.

 

 

10년 만에 보수진영으로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MB는 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에게 역대 최대표차인 537만여 표차로 압승을 거두었다. 득표율 48.7%로 기업인 출신에게 표심이 몰린 것은 경제회복을 갈망하는 국민들의 바램이었다. MB는 취임사를 통해 '국민을 섬겨 나라를 편안하게'하고 '경제를 발전시키고 사회를 통합하겠다'하며 자신의 통치 방향을 천명했다.

 

MB정부 또한 출발이 순탄하지 못했다. 2008년 2월 초대 각료 예정자가 발표되었다. 후보자들의 부동산 과다보유, 투기의혹, 논문표절, 재산신고 누락 등의 문제가 노출되면서 각계에서 여론이 들끓자 청와대는 일부 인사의 교체 카드로 수습에 나섰다.  하지만 '강부자'(강남-부자-자산가),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출신) 등의 정치 유행어가 확산되며 출범부터 상처를 받고 말았다.

 

MB의 의견수렴 과정은 독특하다. 그는 한 사람에게만 특정 업무를 맡기지 않는다. 예를 들어, 홍보 담당이 홍보에만 매달리는 걸 견제한다. 홍보 담당이 있음에도 정무 담당에게 홍보 관련 아이디어를 구하는 스타일이다. MB는 자신을 중심으로 '방사형'리더십을 구사한다. 그래서, 업무 구분이 모호하고 상충되므로 뒤죽박죽인 문제점이 노출된다.

 

'피라미드'형 의사결정은 협의 과정에서 위로 갈수록 불필요한 의견들이 걸러진다. 의사결정이 느려지는 단점이 있긴해도 일단 결정된 후에는 잡음이 적다는 장점이 있다. 잡음이 적다는 것은 구성원 간의 갈등요인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방사형' 의사결정방식은 어느 쪽이 채택될지 모르는 무한경쟁을 촉발하게 되므로 잡음이 증폭될 우려가 매우 크다.

 

MB측 인수위원회의 원칙은 ABR이었다. 'Anything But Roh, moo-hyun', 노무현과의 단절과 청산에만 집착하는 분위기였다. 다른 정권에서 이미 시행착오를 겪었던 일이 또 반복되었다. 이는 '내가 하면 연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논리와 동일한 것이다. 노무현 정부 막판에 기자실에 대목을 박아 물의를 빚었던 국정홍보처를 폐지했다. 정작 MB는 정부 정책을 홍보할 창구가 없어진 셈이 된 것이다.

 

취임 첫 해에 부실조각, 쇠고기 촛불시위, 종교계 갈등, 글로벌 금융위기, 10년 만의 마이너스 성장 등 악재로 넘쳐났다. 통상 1년차의 난제들이 2년차의 국정운영에 부담을 더하는 법이다. 특히,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과제를 안고 2년차를 맞이 했지만 북한의 대남 위협이 극성이었다. 여기에다 경찰 특공대에 의한 용산참사, 전직 대통령의 자살 등 굵직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정치적으로 여야 간의 대화 부재, 사회적으론 공권력의 운영미숙, 남북관계에선 북의 도발과 위협 등으로 총체적 난국 상황이 재현되었다. 2년차 징크스가 여지없이 찾아왔다. 원망과 성토로 인해 벌써부터 통치권은 힘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88년부터 시작된 대통령 직선제에 의한 '5년 단임제' 권력구조는 노태우-YS-DJ-노무현-MB에 이르기까지 어느덧 5번이나 이어지고 있다. 5년제 단임 정권에서 야기되는 공통된 패턴의 반복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를 단순한 학습효과로 여겨서는 안되겠다. 화려한 출발과 초라한 퇴장을 반복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민심은 언제나 선거를 통해 권력의 적절한 배분이라는 큰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견제와 균형이라는 대명제에 충실한 것이다.

 

5년 단임제 때문에 정치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정부의 엘리트 공직자와 산업계의 두뇌들도 '권력의 사이클'에 영향을 받고 있다. 이래서야 어찌 글로벌 시대에 국가 경쟁을 이끌어 갈 수 있겠는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