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기업 - 위대한 기업을 뛰어넘는
최상철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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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에 임원으로 재직하면서 소위 유통 선진국인 일본의 소매업체을 벤치 마킹하러 몇 차례 출장간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것이 이미 유통업계를 떠났지만 나에겐 과거로의 시간 여행인 셈이었고 익숙한 지명과 당해 

회사와 관련한 기억들이 추억에 묻혔을지라도 오히려 정겹게 다가왔었다.

  

버블 경제의 절정이었던 1989년 말 일본 니케이 평균주가는 3만 8,915 엔이었지만 1999년 말에는 1만 8,934 엔으로

반토막이 되었고, 도심부의 맨션 가격은 그 이상으로 폭락했다. 문제는 이러한 1990년대 버블 붕괴에도 불구하고

백화점, 종합양판점 등 당시의 주력 소매업체는 신점포 개발을 이유로 오히려 매장 면적을 확대하는 우를 범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30 쪽)

 

저자는 세 가지 사항에 주목하고 이를 중심으로 사례들을 설명하고 있다.

 

첫째, 일본 유통업의 소매업태인 엔터테인먼트형 전문점, 백화점, 편의점, 종합 양판점 등을 살펴보고 다이소, 세븐 일레븐 재팬 등 혁신적인 소매업을 영위하는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자의 결단을 분석하여 소개한다.

 

둘째, 가격결정권을 둘러싸고 격렬한 대립을 취함과 동시에 상생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이들의 관계를 살펴본다.

 

셋째, 혁신적인 소매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하는데 필요한 투철한 상인정신을 강조한다.

 

 

다이소

 

"스스로 목을 매어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 존재한다" (61 쪽)

 

괴짜 경영인 야노에 의해 창업된 다이소는 경상도 사투리로 온갖 물건이 '다 있소'란 느낌을 갖게 했다. 야노는 본디 처가에 얹혀 어류 양식업을 하다가 망해서 야반도주했다. 이후 길거리에서 싸구려 잡동사니 좌판 행상을 경험으로 현재의 잡화 소매업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국내에도 다이소 점포가 많이 늘었다.

 

부부가 처음 시작한 100엔숍 균일점은 트럭에 상품을 싣고 길바닥이나 슈퍼마켓 입구의 공터에서 단기간 개점하는

이동식 판매였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싼게 비지떡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이동식 가게라는 불안감때문에 매상이 늘지 않았다.

 

기회가 찾아왔다. 1973년의 오일쇼크와 인플레는 인건비, 운임 등 코스트 푸쉬현상을 가져왔지만, 야노는 좋은 상품을

100엔에 파는 전략을 고수했다. 이후 고객들의 호평과 함께 제조업자들도 직거래시 납입가를 낮추어 주었다.

1977년, 야노는 자본금 300만 엔의 주식회사 다이소산업을 설립하여 가족형 기업에서 탈피했다. 자본도 확충되면서

도쿄, 규슈, 오사카 등지로 영업소를 개설하여 전국을 대상으로 이동판매업을 확대해 나갔다. 한창 때 다이소의 트럭이

90대를 넘기도 했다.

 

상설점포체제로 바뀌는 계기가 생겼다. 1987년 종합양판점업체인 유니가 요코하마시에 20평 정도의 상설매장을 제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상설점으로 업태를 변경하지 않고 시범점포로만 운영했다. 1991년 '대규모소매점포법'이 개정되어

종합양판점, 슈퍼마켓 등의 영업시간이 연장되자 상설점포를 늘리고 이동점포의 비중을 줄여 나갔다. 이후 1995년 버블 경제가 붕괴되고 디플레가 도래하자 완전 상설체제로 자리 잡았다. 그 결과 2008년에 일본 소매기업 30위라는 성적표를 거뒀다.

 

승승장구하는 다이소에게도 아킬레스건이 있다. '불량 재고'의 처리를 신설점포에서 해결했지만 성숙기에 접어든 최근에는 출점 속도가 매우 둔화되었기에 재고가 계속 쌓이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디플레의 시대가 거하고 인플레가 도래하면 100엔숍의 경영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대비하여 다이소는 대형 종합양판점, 슈퍼마켓, 백화점에 상품을 공급하는 벤더로 남는 방안이나 200엔, 300엔 등 다양한 가격의 상품군을 개발하는 등 진화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 야노의 청사진이 없다는 것이 불안 요소라고 하겠다.

 

세븐 일레븐 재팬

 

정치에 꿈이 있던 청년 스즈키는 선배의 충고로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사회 초년병은 출판사에서 시작했다. 당시 조사와 홍보업무의 경험으로 이토요카도에 상품관리와 판촉 담당으로 전직했다. 종합양판점 업계의 급성장과 함께 이토요카도도 확대되기 시작했다. 참고로 본인의 출장 경험에 의하면 양판점의 특징은 4층 건물에 옥상은 주차장인 일종의 중형 할인점이었다. 1971년 그는 39세의 나이로 홍보 및 인사 담당 이사로 취임했다. 또한, 신설된 업무 개발실의 리더로서 미국의 신업태를 연구하고 있었다. 일본의 상점이 쇠퇴하는 이유가 생산성의 문제라고 파악하고 있던 그에게 미국의 세븐 일레븐은 구세주같았다. 왜냐하면 오전 7시에 개점하여 저녁 11시까지 영업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내에서의 많은 반대에 봉착했지만 뚝심으로 밀어 부쳤다.

1973년 11월 30일, 이토요카도와 미국 사우스랜드 간에 일본 프랜차이저 방식으로 편의점 사업에 대한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15명의 초보자를 데리고 7평짜리 사무실을 얻어 신설회사 요크 세븐(이후 세븐 일레븐 재팬으로 개칭)을 신설했다. 더구나 설립 자본금 1억 엔중 반만 이토요카도가 출자했기에 그는 심복인 시미즈와 함께 자신들의 적금을 해약하고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개인 출자를 감행했다. 대단한 결단력이다.

 

1호점 개설에 몰두하고 있을 때 그는 주류 판매점에서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1974년 1월 1일, 그는 시미즈와 함께 눈길을 걸어 이 가게를 찾아갔다. 조선소의 자재 창고와 공장이 드문드문 있을 뿐 거의 공터인 구석에 '야마모토 시게루 상점'이 있었다. 야마모토는 당시 23세로 막 결혼한 부인은 임신 중이었고 홀로 된 어머니와 두 명의 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었다. 야마모토는 전근대적인 육체노동이 요구되는 주류 판매점을 계속할지 고민하던 중 우연히 신문에 난 세븐일레븐 기사를 보고 업종 변경을 결심했던 것이다.

 

야마모토 상점은 겨우 24평으로 미국 세븐 일레븐 표준 매장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주차장도 없어 고민이 필요했다. 그러나, 스즈키는 야마모토를 선택했다.

"저희들과 함께 도전해봅시다. 만약 3년 후의 결과가 실패라면 제가 책임을 지고 점포를 원 상태로 돌려드리겠습니다" (96 쪽)

 

1974년 5월 15일, 일본 최초의 편의점 도요슈점이 문을 열었다. 물론 지금도 그 자리에서 야마모토는 성업 중이다.

집념으로 완성한 단품 관리 시스템의 개발과 소량 배송 등이 정착되면서 세븐 일레븐의 체인점은 날로 늘어갔다. 겨우 2년이 지난 1976년 5월 당초 목표였던 60개를 훨씬 넘어 100호점이 개설되었다. 미국에선 25년이 걸려 100호점이 생겼으니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1990년 세븐 일레븐 재팬의 점포 수가 4,000 개에 이르렀다. 미국의 사우스랜드가 경영 위기에 처하자 1991년 3월, 이토요카도는 사우스랜드의 지분 70%를 확보했다. '일미역전', 일본 언론들은 대대적인 보도를 했다. 파산직전의 사우스랜드는 3 년만에 흑자전환했고, 1999년 사명을 '7 - Eleven Inc.'로 바꾸고, 2007년 7월 뉴욕증권거래소에 재상장되었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교재인 [Creating Modern Capitalism]에 세븐일레븐재팬의 유통혁명이 일본 기업의 경영방식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세계 최초의 터미널 백화점을 만들어 낸 한큐백화점의 천재적인 경영과 고바야시의 경영비전과 시장 창조전략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종합양판점 기업인 다이에도 설명되고 있다.

1974년 6월 다이에가 서울에 대형 소매점 출점을 발표했다. 그러나, 롯데의 신격호 회장은 다이에의 나카우치 사장에게 이왕이면 백화점 사업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을 다니며 서울 시민의 쇼핑 습관과 구매력을 분석한 결과, 다이에는 대형 백화점의 출점은 시기상조이며 종합양판점이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1976년 4월 롯데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말았다.

 

건실한 기업 경영보다 유통혁명론을 전면에 내세웠던 나카우치는 천문학적인 부채와 경영악화의 책임을 지고 2001년 1월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독재자가 되었던 카리스마 경영자의 말로였다. 출장기간 중 후쿠오카 돔에 들러 일본프로야구를 관람했었다. 다이에의 상징인 호크스 동상이 위용을 자랑했던 기억이 새롭다. 

 

일본은 중국과 한반도에 영향을 받아 유교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사농공상의 위계질서가 심각하지 않았다. 상인이 수행하는 상업기능의 중요성과 이윤취득의 정당성을 가르치는 석문심학(石門心學)이라는 종교에 가까운 교의가 탄생하여 상인의 지위를 부동의 것으로 인식하였다. 근대 이전의 일본국부의 축적도 상인들에 의한 것이었다. 전후 일본 제조업의 성공도 근면한 일본 상인의 시장개척정신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판매의 질곡에서 벗어나 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일본 유통연구자의 공통된 견해이다.

 

과거와 같은 프론티어정신의 회복없이는 상인국가 일본의 실질적인 부흥은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소매업태야 말로 일본판 모험상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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