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 - 의열단, 경성의 심장을 쏘다! 삼성언론재단총서
김동진 지음 / 서해문집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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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는 광복절이었다. 올해는 한일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해라 의미있는 행사가 곳곳에서 진행되었다.

죽음을 불사하고 후손들에게 광명 아래의 조국을 물려 주기위해 훌륭한 일을 거행했던 수많은 호국선열 때문에 우리는 지금

배부른 행복에 겨워 지내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광복 역사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대개는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좌진, 유관순 등 교과서에 등장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음지에서 불철주야 노력했던 사람들이 어디 이 뿐이겠나? 다만,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았기에 우리가

적게 그 진실과 역사를 알 뿐이라는 것이다. 세계일보 기자로 근무하던 저자 김동진은 2006년 여름부터 잊혀져 있는 항일독립운동을 준비하여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 김상옥과 황옥의 이야기를 3년만에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의열단을 아시나요?

1919년 11월 9일 만주 지린성에서 독립지사들이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을 조직했다. 창단 당시의 단원은 대체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중심이 되었다. 단장은 김원봉이 맡았다. 초기 의열단의 거사는 밀양 진영 폭탄반입 사건,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의거, 상해 황포탄 의거,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등이 있었다. 의열단은 이후 근거지를 북경으로 옮기고 상해에서 단원들을 포섭하여 1924년 경에는 약 70여 명의 단원이 활동했지만 아쉽게도 우리의 교과서엔 너무도 짧은 소개를 하고 있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시대 서울의 한복판 종로 경찰서에 폭탄이 터지면서 이 책의 이야기는 시작한다. 책의 내용은 두 사람의 활약상을 중심으로 소개되고 있다.

 

김상옥, 그는 철물점을 경영하면서 나름 부유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시국 토론에 참여하면서 민족에 대한 의식에 눈을 뜨면서 항일운동에 뛰어 들었다. 개인돈을 투자하여 '혁신공보'라는 지하 유인물도 발간하면서 조선인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켜 나갔다. 그는 몸이 작지만 민첩했고 힘이 셌다.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조선 민중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이후 일본 경찰과 교전을 벌이면서 도피하다가 동년 1월 22일 효제동 72번지에서 포위망에 갇히자 결국에는 모제르 7연발 방아쇠를 당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서른 넷의 비교적 짧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범인은 최후까지 권총을 두손에 쥐고 바른손에는 사망한 후에도 둘째손가락으로 권총의 방아쇠를 걸고 권총을 힘있게 쥐고 있었다며 여하간 범인은 처음에 발에 총을 맞었으나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것과 최후까지 총을 쥐고 죽은 것을 보면 매우 대담한 사람이라고 말하더라" - 1923년 1월 23일자 동아일보 '세군데 총을 맞고도 죽은 후에도 총을 쥐고 있어' (136 쪽)

 

황옥, 그는 일본 경찰관이었다. 경찰 내에서 조선의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도와 주고 있었다. 그러나, 의열단 내부에서는 일본 경찰의 밀정으로 의심받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김상옥 사건은 경부 황옥에게 뜻밖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종로경찰서 폭탄 범인을 잡기위해  경기도 경찰부의 전 직원이 동원되었지만 자결로 마감했기에 그 배후를 밝힐 수 없었다. 그래서, 1923년 2월 초 황옥의 상관은 그에게 중국 천진에 가서 폭탄투척의 진범과 그 배후세력인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을 캐내라고 하명했다.

 

동행할 조선인 밀정으로는 친일파 판사 백윤화 집 강도사건의 범인으로 붙잡혔다가 자신이 손을 써 빼낸 유석현을 동행했다. 유석현은 이미 약산과 면식이 있었기에 그와 함께 의열단 단장인 약산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황옥에 대한 신뢰감이 생겼던 것이다. 상해에서 경성까지 대규모 폭탄 밀반입 작전을 수행했지만 비밀리에 활동하던 일본 밀정에 발각되어 이 거사도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번 의열단을 검거할 때에 의외에 경기도 경찰부에서 더욱이 직접 그 사건을 담당하여가지고 취급하던 황옥 경부가 그 사건에 참여한 사실이 발각돼 당국은 크게 놀래었는데...중략" - 1923년 4월 17일자 동아일보 '경무국장 인책설' (254 쪽) 

 

저자의 안타까운 지적을 하나 소개하고 글을 마치려 합니다.

 

1920년대 초, 경성 종로경찰서는 지금의 종로 2가 YMCA 건물 바로 왼편에 있던 서양식 2층 건물을 사용했다. 이 건물은 미국인 콜브란이 우리나라 최초의 전력공급업체인 '한성전기회사'를 신설했을 때 사옥으로 신축한 건물이었다.

불과 2년 전만해도 우리 정부와 역사학계는 1920년 초의 종로경찰서가 지금의 종로사거리에 위치한 제일은행 본점 터에 있었던 것으로 잘못 알고 2007년 초까지 '종로서 폭탄투척 사건'을 기념하는 표석을 현 제일은행 본범 빌딩 앞 화단에 세워 놓았었다.

역사에 대한 충분한 고증없이 이리해도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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