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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시대를 품다
이은식 지음 / 타오름 / 2010년 8월
평점 :
숨겨진 역사, 잊혀진 역사를 찾아 전국을 답사하며 선조들의 발자취를 찾아 진실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사람이 있다. 이 책의 저자 이은식은 성균관 수석 부관장이며 한국인물사연구원 원장으로서 반평생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분이다. 그의 소중한 노력이 열매를 맺어 이 책이 출간되었고, 앞으로도 자료가 정리되는대로 계속 이런 유형의 도서를 출간할 계획이란다.
저자는 이 책을 예술, 정치, 학문, 그리고 내조라는 네 가지 주제어로 분류하여 각각 해당 분야에서 뛰어난 여성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의 예술성을 시작으로 혜경궁 홍씨의 정치적 시각 그리고 난봉꾼을 정승으로 만든 내조의 여인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박죽서
조선 후기 여류 문학의 꽃같은 인물이다.
원주사람으로서 박종언의 서녀로 태어나 신분의 차를 극복못하고 이를 문학으로 승화시킨 여인이다.
뛰어난 한시 작품을 남겼는데, 이별과 그리움 등이 작품에 자주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또한, 미모가 뛰어나고 침선에도 능했지만 병약하여 나이 서른을 전후로 죽었다.
서녀 출신이라 남편 서기보의 소실로 들어가 한시 짓기를 평생 낙으로 살았다 한다.
사후에 남편의 친구 서돈보가 [죽서시집]을 간행하여 총 166편의 시를 소개했다.
김금원이 주도한 용산 삼호정 시단 모임에도 참여했다.
김금원
용산 삼호정 시단의 리더였다.
규장각 학사인 김덕희의 소실이다.
그녀의 작품세계나 가치관을 이해하고 적극 후원해 준 사람은 바로 남편 김덕희였다.
삼호정 시단에 참여한 이들은 대부분 기생 출신이거나 소실들 이었다.
"내 고향이 아니라 탓할 것 없으니, 부평초처럼 떠돌다 이르는 데가 고향이다"
그녀의 14살 때 시작인 [시유경성,始遊京城] 중 일부인데, 처음 서울에 와 본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대체로 유람한 자취를 글로 남긴 기행시가 많은 편이다.
허난설헌
"돌아가신 나의 누님은 어질고 문장이 있었으나 시어머니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도 두아들을 잃었으므로 마침내
한을 품고 돌아가셨다. 누님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파 마지않는다" (63 쪽) - 허균의 [성소부부고] 중에서
활화산처럼 넘쳐 흐르는 시혼을 분출시킨 허난설헌의 본명은 허초희이다.
조선의 유교사상에 의한 가부장 사회 아래에서 여인의 삶이란 인내와 감수만이 강조되었다.
시집살이하는 며느리들이 소위 '눈먼 봉사 3년,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을 강요받았던 것이 좋은 예이다.
허초희는 김성립의 아내가 되어 뛰어난 재능을 펼치지도 못하고 좌절, 소외, 그리고 고통 속에서 한많은 삶을 살았다.
당시를 좋아했기에 그녀의 시작은 중국시의 표절이라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 그러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이 7살 어린 계집애가 지었다고 하기엔 너무도 뛰어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신사임당
옛날 부인은 대부분 자신의 고유 이름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사임당 역시 따로 지어 불렀던 호이다. 이름이 '인선'이라는 설도 있지만, 분명치 않다. '사師'는 스승, 본받는다는 뜻이고, '임任'은 중국 문왕의 어머니 태임에서 다온 말이다.
"고운 모습 흰 백합에 비기오리까.
맑은 지혜 가을 달에 비기오리까.
사임당 그 이름 귀하신 이름......"
- 이은상[사임당의 노래] 중에서 (98 쪽)
우리 역사상 가장 모범적인 부인으로 율곡 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을 꼽는다. 어버이에게는 극진한 효녀, 남편에게는 어진 아내, 자식에게는 훌륭한 어머니였고 학문이 깊어 뛰어난 문인이었으며 글씨, 그림에도 뛰어났다.
[초충도 화첩]은 자연의 풀과 벌레를 소재로 그린 8폭 병풍으로 그 종류가 20여 가지가 된다. 이후 이는 화조화, 영모화 등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당대의 정치상황, 풍토 외에도 조선 여성의 이면을 알게 해 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풍부하다. [인현왕후전]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궁중문학이다.
혜경궁 홍씨는 홍봉한의 딸이며, 사도세자의 지어미이고, 정조대왕의 어머니이다.
당시의 치열한 당파싸움에 희생양이 되어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굶어 죽은 사도세자의 부인이 바로 혜경궁 홍씨이다. 그래서, 일부에선 친정의 명예와 세손인 정조만을 챙긴 비정한 아내라고 비판을 하기도 한다.
세손 이산은 25세의 나이에 왕이 된 후,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게한 노론을 척결하면서 결국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은 몰락하고 말았다. 나이 27살에 과부가 되어 54년을 살아온 혜경궁 홍씨는 아들 정조가 죽고 15년 뒤 병을 앓다 노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일타홍
잔치를 마친 저녁, 일타홍은 심희수의 집에 찾아 갔다.
자신이 기생임을 밝히고, 심희수가 크게 될 인물이니 허락한다면 화류계를 청산하고 심희수를 위해 올바른 길로 인도하겠다고 그의 어머니에게 제안을 했다.
"저 애를 그냥 두면 안 될 것같아 밤낮으로 걱정을 했는데 그래도 복이 있는 놈인지 이런 귀인이 찾아와 주었구나"(241 쪽)
이날로 일타홍은 심희수의 색시가 되어 한 식구가 되었다.
"소첩은 살다가 도망가는 일은 없을 것이니, 이 책을 1권씩 떼면 잠자리를 하락하겠습니다" (241 쪽)
심희수는 일타홍을 차지하기위해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공부에 싫증을 느끼고 책을 놓았다. 그러자, 일타홍은 심희수가 과거에 급제하면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가출했다. 뒤늦게 심희수는 그녀를 찾았지만 찾을 길이 없자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공부에 정진하여 몇 년이 흐른 후 22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3년 뒤 별시 문과에 합격하여 집안에 경사가 났다.
대과에 급제한 심희수는 드디어 일타홍과 재회한다. 그러나, 그녀는 천한 기생의 신분이라 정실 부인이 될 수 없기에 낭군을 장가보내기로 결심했다. 심희수는 그녀의 말에 따라 양반집 규수를 아내로 맞았다. 일타홍은 새색시를 깍듯이 예우하며 일을 처리해서 말다툼 한 번 없었다.
이런 일이 마침내 선조의 귀에 들어갔다. 임금이 감동하여 친히 심희수와 일타홍을 불러 소원을 묻자, 일타홍은 심희수를 그녀의 고향인 금산 군수로 발령해 줄 것을 청했다. 선조는 기꺼이 이를 윤허했다. 군수로 부임하자 일타홍은 군수의 부실이 되어 금의환향하였다. 크게 잔치를 베풀어 일가친척을 위로하자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조선시대의 여인네들은 유교사상에 입각한 남존여비사상의 희생물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과 자질이 있어도 밖으로 표출하는 것 자체가 예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안으로 안으로 온갖 스트레스를 안고 살 수 밖에 없는 한 많은 삶이었다. 살펴 보았듯이 김금원, 허난설헌, 일타홍 등 엄격한 규율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위해 분투한 여인들의 이야기에서 향기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