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
홍준표 지음 / 형설라이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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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드라마 [모래시계]의 실제 모델로 알려지고, DJ 저격수를 자처했던 4선 국회의원인 홍준표, 그의 인생은 정말 파란만장 그 자체이다.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 가며 인생과 정치에 대한 그의 회고를 통해 정의를 향한 갈등과 혼돈의 세월을 어떻게 견디어 왔는지 알아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는 국민학교 6년을 다니며 다섯 번이나 전학 다녔다. 1학년은 고향인 남지에서, 2학년은 대구 신천, 3학년은 대구 신암, 4학년은 창녕, 5 - 6학년은 합천 학남국민학교를 다녔다. 정들만 하면 이사를 해서 친구도 없다. 그의 아버지는 1914년 생으로 시골 서당을 하다가 당시 남지 갑부였던 외갓집에 데릴사위 격으로 맏딸인 어머니와 결혼하여 큰 재산을 물려 받았다. 이후 한량의 길로 접어 들어 그 많던 재산을 유흥비로 다 탕진하고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큰 술꾼이었다. 그러나, 남과 한번도 다툰 적이 없을 정도로 자기절제력이 뛰어난 분이었다.

 

"망아지는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한양으로 보낸다"는 말이 있듯이, 그도 중학교는 대구로 유학갔다. 일년 전 국민학교를 졸업하자 대구의 직물공장에 취직한 작은 누나의 내당동 월세방에 거처를 정했다. 표독스런 주인 아줌마의 전기사용 감시탓에 방문에 홑이불을 걸쳐 놓고 공부해야만 했다. 전기세 많이 나온다면 밤 10시 이전에 소등하라는 엄명때문이었다. 그는 점심시간엔 늘 수돗가에서 수돗물로 배를 채웠다. 1학기 중간고사에서 전교 1등을 하자 친구가 늘면서 즐겁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1972년 3월 고려대 법대에 합격하여 빚낸 돈을 들고 야간열차편으로 추풍령을 넘어 서울로 갔다. 그는 변방에서 중심으로 가기 위해 대구로 갔고, 이젠 대한민국 중심으로 가고 있다. 입학후 가정교사로 학비를 벌었다. 워낙 생활고가 심한지라 이게 길이 아니다란 생각이 들어 그는 2학년 등록을 포기하고 사법시험 준비용 책을 구입하여 대구근교 도덕암으로 거처를 옮겨 고시준비에 정진했다. 하루 15시간 책만 보았다. 무척 대고 하는 공부가 만만치 않았다. 그해 여름, 그는 산사에서 철수하고 시골로 귀향했다. 농사일도 돕고, 아버지 뱃사공 일도 보조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작은 누나가 학비를 자신이 부담하겠다며 복학을 권유했다. 1974년 3월 복학했다.

 

한편, 시골집은 뒷 집 큰 아들의 방화로 전소되는 통에 울산으로 이사했다. 울산 복산동 산골짜기 단칸 월세방을 얻어 힘겨운 생활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현대조선소 임시직 야간 경비원으로, 여동생과 작은 누나도 이 공장에 취직했다. 한번은 집에 들렀다가 추운 날씨에 야간 경비를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숨어서 보고는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

 

1974년은 유신반대 데모로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그해 8월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 10월 교내가 또 술렁거렸다. 총단의 지하유인물 작성을 돕게 되었다. 이후 필체가 탄로나면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8시간이나 조사받고 풀려났다. 1975년 봄, 개강하자 데모 열풍이 더 거세졌다. 긴급조치 7호가 발동되던 날, 성북서로 끌려가자 하숙집 아줌마의 재치로 풀려났다. 바로 그는 도덕암으로 몸을 숨겼다. 그해 가을 하숙집에서 밤낮으로 고시공부에 매달렸다. 이듬해 1차에 합격했지만 2차에 낙방하면서 이후 6년간 그는 사법시험의 인질이 되고 말았다.

 

1976년 4월, 국민은행 안암동지점에 돈 찾으러 들렀다가 창구에서 달덩이같은 사람을 발견했다. 훗날 그의 아내이다. 이후 고대 앞 라면가게에서 호기좋게 프로포즈했다. "혹시 내가 좋거든 다음주 수요일까지 중앙도서관 4층 법대 도서관으로 온나"

그런데, 화답이 빨리 왔다. 월요일에 찾아 온 것이다. 둘의 연애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고시생의 연애는 고달프다. 주말마다 극장에 갔다. 그의 애인은 고맙고 착하게도 그를 대신해 울산에 계신 어머니를 매월 월급날 주말에 찾아가 주었다.

 

1980년 4월, 4급 판정을 받고 방위소집으로 14개월 군복무를 했다. 제대후 그해 연말까지 연합철강에 근무하다가 다시 고시병이 도졌다. 1982년 1월 퇴직하고 고대 앞 하숙집에서 친구와 함께 다시 고시를 준비했다. 시험을 치뤘지만 자신이 없었다. 나이도 있고해서 낙방을 대비해 한라자원에 응시하여 입사통지를 받았다. 파푸아뉴기니에 간다는 조건으로 9월 3일에 입사한다. 그런데, 하루전에 발표한 사시합격자에 그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해 12월 23일 고대 교우회관에서 단출한 결혼식을 가졌다. 76년에 만나 6년만에 맨손으로 결혼하여 봉천 7동 지하 단칸방에서 꿈같은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抑强扶弱"의 정신으로 검사의 길을 걸었다. 첫 부임지인 청주지방검찰청에서 법무부장관의 사돈을 구속하면서 이후 10년간 그는 승진인사에서 늘 소외되었다. 이후 노량진 수산시장 강탈사건 등을 맡아 강단있게 처리하자 검찰내부에서도 통제불가능 인물이라는 낙인을 붙여 공안부, 특수부 근처에는 얼씬 못하게 했다.

 

인사상 불이익을 감수하고 전북 부안이 고향인 아내의 격려로 전라도 광주에서 검사생활을 했다. 이 지역은 조직폭력배의 두목급을 검찰, 경찰, 안기부, 보안대 등이 비호하고 있었고, 그들도 건설업자 또는 다른 사업가로 위장하고 있었다. 심지어 광주 전남지역 건설업체들은 조폭간부를 업무상무로 고용하여 위협조의 담합입찰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를 밝혀 폭력배를 건설업계에서 추방시켜 버렸다. 이후 92년 8월 서울지검 강력부로 발령되었다. 정권이 바뀐 93년 4월 파친코 수사를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그러자, 검찰내부에서 그를 왕따시켰다. 이후 일년 동안 출입기자들과 내기 바둑으로 소일했다. 검사에게 법령 손질이나 하라며 법무부로 발령나자, 그는 95년 9월 검사직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한달 뒤 11월 초, 후배 변호사 사무실 반쪽을 얻어 변호사 개업을 했다. 일선에서 물러나자 그에게 협박 전화가 끊이질 않았다. 내 가족의 보호가 시급함을 인지하고 제도권 복귀를 위해 정치계의 문을 노크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민주당을 뒤로 하고 김영삼 대통령 측근의 제의로 96년 1월 여당에 입당했다. 잠실 서민아파트 지역인 송파갑에 출마하여 그해 5월 15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좋은 일 뒤엔 궂은 일이 생긴다. 그의 어머니는 당선후 14일만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위독했던 어머니는 자식의 선거에 지장을 준다며 아픈 사실을 알리지 말라는 지극한 모성애를 보였던 것이다.

 

김대중 정권의 한나라당 와해공작으로 당시 무혐의였던 선거법 위반사건의 대법원 판결 하루 전날인 99년 3월 2일, 그는 의원직 사퇴 신상발언을 하고 국회를 떠났다. 이는 사법적 책임이 아닌 관리적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였다. 다음날, 중앙일보 김상택 만평에 "DJ 저격수 가다" 라고 이 내용이 실렸다. 99년 5월초 워싱턴 국제전략문제연구소 객원 연구원 자리로 미국에서 잠시 체류했다. 이후 이회창 총재의 요청으로 동대문구 보궐선거에 나섰다. "DJ정권 심판하는 대한민국 특별검사"란 선거구호로 압승을 거두고 2001년 10월 국회로 복귀했다. 당의 요구로 저격수로 재출발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세 아들의 비리사건을 파헤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판세가 유리하게 돌아가자 이회창 총재가 김 대통령의 화해 요구를 거부하면서 병풍악몽이 되살아나게 되었다. 결국 한나라당은 병풍에 갇힌 꼴이 되고 이총재는 대선패배로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탄핵파동을 빚어면서 2004년 총선은 이상하게 돌아갔다. 선거를 한달 앞두고 방송매체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탄핵부당성을 며칠동안 집중적으로 18시간씩 편파 보도했다. 국민 여론은 한나라당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위기의 한나라당을 구원하기 위해 박근혜 대표가 나섰다. 서울 동북부 17개 선거구에서 열린우리당이 16석을 차지하고 한나라당은 유일하게 그만 3선으로 당선했다. 17대 국회의원은 386세력이 대거 등장하면서 국회문화도 바뀌었다. 의원 전용 출입문과 전용 엘리베이터를 없엤다.

 

한나라당 대선 주자 경선에 이명박, 박근혜, 손학규 3인의 후보가 나섰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박 양강체제로 굳어지자 손학규 후보가 2007년 2월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흐르는 물은 앞을 다투지 않고 막히면 돌아가는 법인데 손 후보의 선택은 옳지 않아 보였다. 그도 6월 13일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다. 그는 이, 박 후보자들의 비난에 대해 서로를 감싸주는 피스메이커 역할에 충실했다. 경선에서 승리한 이명박후보가 대선에서 530만 표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새로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나는 이 시대의 시대정신은 선진강국 시대로 보는 것이다. 통일 시대로 가기 위한 전 단계로 선진강국 시대로 가기 위해서는 한국사회 전 분야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235쪽) 고 말하는 그는 정치적으로는 대립과 투쟁을 탈피하고 공존과 협력의 시대를 열며, 경제적으론 경제의 세계화를 추구하고, 사회적으론 법치주의를 확립하고, 복지면에선 일자리 창출과 교육기회의 균등을, 외교면에선 자주외교를 추구하여 이젠 변방에서 벗어나 우리도 세계의 중심국가로 우뚝서자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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