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얻은 글재주 - 고대 중국 문인들의 선구자적 삶과 창작혼
류소천 지음, 박성희 옮김 / 북스넛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중국 고대의 문장가 아홉 명의 치열한 삶과 창작 열정을 소개하고 있다. 고대 문인들의 유명 작품을 소개하고, 이 작품의 탄생 배경을 작가의 견해를 곁들여 설명하고 있다. 초나라의 시인 굴원, [사기]의 저자 사마천, 부잣집 딸 탁문군을 꿰어 찬 지식장사꾼 사마상여 등이 소개된다.

 

유명 문장가들은 자신들의 글재주대문에 입신 영달을 누릴 수 있었지만 도덕적 기준에 합당치 않을 경우 그 자리를 거절했다.

그들이 자신의 글을 썼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자랑을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이상을 표현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실현코자 함이었다. 따라서, 정치 문인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당대에 천하를 움켜쥔 듯 무소불위의 권력을 시도 때도 없이 휘두르던 사람들이 역사에 이름자 하나 올리지 못한 것을 보면, 2천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대중의 사라지지 않는 추앙을 받고 있는 고대 문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천하를 얻은' 사람들이었다"

 

한나라 무제(BC156 - 87) 는 북으로 흉노를 정벌하고, 동으로는 고조선, 남으로는 월을 꿇리고 서쪽으론 실크로드를 열어 역사는 그를 "뛰어난 지략으로 중원의 판도를 넓힌 왕" 으로 평가한다. 무제에겐 사마천(BC145 - 86) 이란 신하가 있었다. BC98년 사마천은 흉노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포로로 잡힌 이릉 장군을 두둔하다 무제의 분노를 사 궁형을 받는다. 궁형이란 남자의 성기를 거세하는 치욕적인 형벌이다. 당시 47세인 그는 분노와 치욕 속에서 [사기]라는 걸작품을 집필했다. 2천여 년이 지난 지금 한무제와 사마천의 위상은 역전된 느낌이다. 왜냐하면, 무제의 영광은 빛을 잃었으며, 반면 사마천의 꿈은 [사기]속에 고스란히 남아서 지금도 그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날의 중국은 개혁 개방의 정책으로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경제가 고속 성장하면서 비이성적인 욕망만이 난무하고 있다며 "돈이 생의 목적이 된 지금, 욕망으로 우리의 영성은 피폐해졌다.(중략) 불행하게도 우리는 더 이상 시적 감동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8쪽) 고 저자는 비판하고 있다.

 

초나라의 시인 굴원의 대표적인 작품 [이소]는 유배와 해배를 거듭하며 질곡의 정치 인생을 걸어야 했던 굴원의 울분과 그래도 버릴 수 없는 자신의 신념이 전체에 흐르고 있다.

"바른 말이 해로움이 됨을 알았으나/차마 그냥 버려둘 수 없었네/(중략)/비록 내 몸 찢어져도 변치 않으리니/어찌 내 마음에 경계함이 있으랴" (39 - 40쪽)

 

민중의 입장에서 역사를 기록한 사마천은 진정한 지식인의 초상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죽는다는 사실보다는 의미였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지만/ 때로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때로 어떤 죽음은 깃털보다 가볍다" (65쪽)

가난한 문인 사마상여는 [봉구황]이란 노래로 아름다운 부잣집 과부 탁문군을 사로 잡았다.

"봉아 봉아 고향에 돌아왔구나/황을 찾아 사방을 헤매더니/(중략)/ 어지해야 그대와 한 쌍의 원앙으로 만날까" (114쪽)

 

이백은 어릴 적부터 조정에 출사하고 싶었다. 전국을 유람하며 견문도 넓히고 교우관계도 넓히지만 좀처럼 그에게 기회가 오지 않았다. 오히려 줄을 대다가 재산만 탕진했다. 술 마시며 10년의 세월을 허송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 그는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그의 유명한 시 [행로난]은 바로 그의 고통과 우울의 표출이다.

"황하를 건너자니 얼음물로 막히었고/(중략)/거센바람 물결 가를 그날이 오면/구름 돛 달고 푸른바다 헤쳐가리"(221-222쪽)

 

이 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며 크게 유행하자 그에게 출사의 길이 열렸다. 당 현종은 이백의 시에 빠져 그를 장안으로 불러 들였다. 며느리 양귀비를 자신의 후궁으로 들일 정도로 여색을 탐하는 현종이 이백에게 짓도록 한 시가 바로 [청평조]이다.

"구름 닮은 옷차림 꽃 같은 생김새/(중략)/군옥산 머리에서 만나지 않았다면/요대의 달빛 아래서 만났으리라" (232쪽)

군옥산과 요대는 신화에 나오는 여신 서왕모가 살던 곳으로, 이백은 양귀비를 여신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백은 황궁에서 많은 일화를 남긴다. 현종의 손으로 국을 맛보고, 양귀비에게 먹을 갈게 하고, 세도가 하늘을 찌르던 환관 고력사에게 신발을 벗기게 하는 등 광기와 야성이 빛을 발했던 유랑시인 이백은 별종 중의 별종인 셈이다.

 

야사의 내용도 재미를 더한다. 중국여인의 족쇄였던 전족에 관한 일화이다. 황제 이욱의 궁녀 요낭의 작은 발에서 전족은 시작한다고 말한다. 세치 밖에 안되는 작은 발로 춤추는 요낭의 성적 매력이 황제의 사랑을 이끌어내자 다른 궁녀들도 앞다투어 발을 싸매기 시작했고, 이것이 이후 민간으로 흘러가서 풍습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굴원에서 이욱까지 아홉 명의 고대 중국 문인들의 작품과 그들의 삶을 통해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읽을 수 있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란 서양의 속담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뛰어난 문장이 후대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은 실로 크다고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