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나뭇잎, 이로도리 - 칠순 할머니들이 나뭇잎 팔아 연 매출 30억!
요코이시 토모지 지음, 강지운 옮김 / 황소걸음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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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너무나 힘든 겨울을 지나 간신히 봄볕이 느껴지는 시절에 이르렀습니다. 올해야말로 좋은 해가 될 거라고 모두 바랐습니다만, 지금 요코이시 님의 심경변화에 우리는 앞선 대한파 이상으로 큰 충격을 받아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합니다. (중략) 요코이시 님이 없으면 가미카츠는 꾸려나갈 수 없습니다. (중략) 지금 한 번만 생각을 돌려 우리에게 살아갈 기쁨과 용기를 주세요" (124쪽)

 

일본 도쿠시마현 가미카츠 마을의 이로도리 생산회 일동이 이 책의 저자 요코이시 토모리에게 전달한 탄원서 내용의 일부이다.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가미카츠 농협에 영농지도원으로 채용된 후 18년이 지난 1997년 2월 요코이시가 농협에 사직서를 제출하자, 이를 만류하려는 이로도리 생산회 회장 시모사카 미키에가 소속 회원 177명 전원의 집을 밤새 일일이 돌며 서명을 받았다.

 

희망이 사라진 마을

 

1979년 봄, 농업대를 졸업하고 가미카츠 농협에 취직한 요코이시 토모리는 산골마을 한 집 한 집 인사를 나누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가미카츠 마을은 이농현상 때문에 경제가 매우 침체되었고, 60 - 70 대 할아버지 몇 명은 아침부터 음주에다 주정을 부리는 작태까지 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할 일이 없어서 모이면 술 마시고 남을 탓하는 일로 소일했다. 요코이시는 인사를 다니며 마을의 개혁을 호소하지만, 그들은 외지인에 대한 텃세가 강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내쫓으려고 했다.

 

가미카츠는 밀감농사가 주업이었다. 1981년 2월 이상 한파가 닥쳐 밀감이 고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피해 면적은 전체 재배 면적의 82%에 달했다. 밀감의 매출이 전년의 반 수준인 2천만 엔으로 떨어지더니 이후 계속 격감했다. 밀감은 전멸했지만 유자 등 초귤류에 초점을 맞추며 희망을 키워나갔다. 또한, 텃밭에 채소를 재배하여 판매하거나 농한기엔 고구마 말랭이 가공 등으로 농가 수입을 키워나갔다.

 

나뭇잎을 팔다

 

"전화위복" 이란 말처럼, 가미카츠 마을은 역사적인 대재해를 오히려 기회로 이용했다. 그들은 생산 작물의 재편성을 시도했다. 고구마, 실파, 표고버섯 등 새로운 작물 재배를 보급하던 요코이시는 우연히 식당에서 단풍잎이 요리에 활용된 것을 보았다.

섬광처럼 그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 "나뭇잎을 팔자!"

 

비록 소량이지만 타 지역의 농협에서 요리 장식용 꽃 상품이 출시된 것을 확인하고 그는 마을의 4 가구의 협력을 얻어 "이로도리" 란 상표를 걸고 1987년 2월부터 나뭇잎을 팔기 시작했다. 그런데, 준비가 부족한 탓에 "이로도리"는 팔리지 않았다. 어느 날, 한 요리사가 이로도리 상품팩을 보고서 잎과 꽃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이런 상품을 사용않는다고 지적했다.

 

현장을 알아야 한다.

 

장식용 나뭇잎, 츠마모노의 주요 수요처가 요정이기에 요코이시는 요정에 손님 자격으로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월급이 적은 그로선 큰 부담이었지만 이것이 가미카츠 마을을 위한 그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요정을 드나들며 배운 츠마모노의 포인트는 계절감, 좋은 상태, 잎의 크기, 빠른 출하 등임을 파악했다.

 

1986년 4 가구의 협력으로 시작한 이로도리 사업은 1988년 4월에 44 가구로 늘었다. 이후 석 달 만에 91 가구로 급증하면서 판로 확보가 더욱 중요해졌다. 요코이시는 이로도리 팜플렛을 만들어 전국의 유명 온천지나 여관 등을 돌았다. 이런 와중에 실수도 있었다. 오사카 나이트클럽에 복숭아꽃을 납품했는데 클레임이 발생했다. 벌레가 나온 것이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사과한 이 일을 계기로 더욱 상품 관리에 만전을 기했다.

 

"백문 불여일견"이란 말이 있다. 1989년 12월 요코이시는 버스를 대절하여 농가 사람들을 오사카에 있는 일류 요정으로 데려갔다. 이후에도 요정 시찰은 1년에 한두 번씩 이어졌다. 백 마디의 가르침보다 현장에서의 한 번의 경험이 교육의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비싼 요리에 벌레 먹은 나뭇잎이 없어야함을 실감하는 등 시찰 횟수가 늘면서 마을의 할머니들은 점점 세련되어 갔다.

또한, 이로도리의 품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강습회, 연구회 등도 자주 개최했다. 유명 요정의 주인과 고급 레스토랑의 주방장을 초청해 할머니들에게 츠마모노의 사용법을 강습하고, 여성 문제 평론가를 초빙해 문화 강연을 통해 여성의 자부심을 길러 주었다.

 

나뭇잎이 변화를 불러오다

 

이로도리가 전국 각지에서 팔리고 새로운 수요처가 증가하면서 생산량을 늘려야 하는 행복한 고민이 생겼다. 밤에 잔업을 처리하거나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 등 마을엔 이미 변화의 큰 물결이 일고 있었다. 경제적인 이익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인정도 뒤다랐다. 1990년 2월, 가미카츠 농협이 농업인들에게 최고의 영예인 "아사히 농업상"을 수상했다. 이후 가미카츠에서 생산되는 모든 농산물은 신뢰도가 높아졌다. 가미카츠의 모든 농가는 자신감과 의욕이 충만했다. 더 이상 마을에서 술에 취한 할아버지를 볼 수가 없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요코이시는 결혼 후 생활비 한 번 제대로 아내에게 준 적이 없었다. 부모님 집에 얹혀 살던 그에게 고민이 생겼다. 아버지의 퇴직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란 말이 있듯이, 현재의 적은 월급으론 세 아이의 교육비, 양육비 등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는 사직을 결심한 것이다.

 

요코이시의 고민을 알게된 마을에서는 그를 마을 사무소에 "생산과장 보좌"라는 보직을 부여했다. 그래서, 1997년 4월 그는 농협에서 마을 사무소로 전직했다. 이듬해 농협의 매출이 급락하자 가미카츠 마을도 위기를 느꼈다. 그동안 사비를 들여가며 외부의 담당자들과 인맥을 유지하던 사람이 빠지고 나니 그 영향이 바로 나타난 것이었다. 궁리 끝에 그는 제 3 섹터 방식으로 주식회사 이로도리를 설립하고 가미카츠 마을이 70%의 지분을 가졌다.

 

1999년 4월 정식으로 설립된 주식회사 이로도리에 요코이시는 이사로 재직하면서 컴퓨터 시스템의 도입으로 2000 년부터 다시 매출이 오름세를 탔다. 신문, TV 등 각종 언론 매체에서 앞다투어 이를 소개하면서 마을을 찾는 국내외 시찰자들도 급증했다. 2006년엔 마을 인구의 약 2배인 3957 명이 찾아왔다. 이로도리는 전국 츠마모노 시장 점유율 80%를 유지하고 있다. 계약 농가 190호, 평균연령 70세의 이로도리 농가 할머니들의 수입도 넉넉해졌다. 살림살이에 여유가 생겨 화장실을 최신식 비데로 교체하거나, 자식과 손자에게 용돈도 주고, 저축도 한다. 나이 72 세에 태어나서 처음 호주로 해외여행을 다녀온 할머니도 있다. 이젠 가미카츠 마을에서 살고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외지로 떠난 사람들도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매사에 솔선수범하는 실천 정신, 현장을 중시하는 현장 경영, 할머니를 극진하게 섬기고, 교육을 통해 능력을 강화시키며, 잘할 수 있다는 긍정의 기를 불어넣는 등 요코이시의 리더십을 통해 리더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많은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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