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이 들려주는 애국 - 불꽃처럼 살다 간 영웅
배정진 지음 / 세상모든책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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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00주년인 올해, 그의 영웅적인 삶을 기리는 기념 행사가 속속 열린다. 이 책도 100주년 기념으로 출간된 도서이다. 또한, 내년 2010년은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지 100 주년이 된다. 이 책은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화자인 안중근이 자신의 삶을 직접 우리에게 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1879년(고종 16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 수양산 아래 광석동에 위치한 안씨 집안에서 한 사내 아기가 태어났다. 신기하게도 아기의 몸에는 가슴에서 배까지 일곱 개의 점이 나 있었다. 나의 부모는 북두칠성의 정기를 품었다며 아기의 이름을 응(가슴) 칠(일곱)이라 불렀다. 안씨 집안은 고려 시대 성리학자인 안향의 후손으로 해주 일대에서 제법 이름 난 가문이었다.

 

고종 21년, 1884년에 갑신정변이 발발했다. 나의 아버지는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혁파에 의해 외국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그런데, 이들 개혁파는 삼일천하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따라서, 유학생 선발이 집안의 화근이 된 셈이었다. 나의 집안은 깊은 산 속에 숨어 사는 편이 나을 듯해서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 산골 마을로 이사를 했다. 1885년, 청계동엔 화전민 두세 가구만 살고 있었는데 칠팔십 명의 대가족이 이사오면서 조용하던 마을이 활기 넘치기 시작했다.

 

1894년,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폭정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동학 세력과 힘을 합쳐 고부 관아를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라에선 이용태를 고부에 파견하여 수습하려 했지만, 이용태도 조병갑 못지 않게 뇌물을 밝히자 녹두 장군 전병준이 봉기하여 관군들과 맞서며 승승장구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놀란 조정은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고 청나라군이 우리 땅에 주둔하게 되었다. 일본도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양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선 군대를 파병했다. 결국 주도권을 놓고 싸움을 펼쳐 일본이 승리했다. 이것이 바로 청일전쟁이다.

 

한편, 황해도 감영에서 즉시 병사를 모아 사이비 동학군을 진압하라는 전갈을 우리 집안에 보내 왔다. 의병을 모은다는 소식이 돌자 동학군들은 우리 집을 선제 공격하려고 청계동 인근 박석골까지 쳐들어 왔다. 우리측은 훈련된 군사가 칠십여 명인 반면 동학군은 무려 이천여 명이었다. 그러나, 기적같은 승리를 거두었다. "호사다마" 란 말처럼, 동학군에게서 빼앗은 양곡을 이미 농민들에게 다 풀어 주었더니 당시 세도가인 어윤중과 민영준은 자기들 소유라며 이를 돌려달라고 했다. 이에 응하지 않자 안태훈 집안은 많은 양곡으로 군대를 양성한다고 임금에게 모함까지 했다.

 

1895년, 명성 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발생했다. 친일파들이 득세하자 1896년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거쳐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감행했다. 어윤중이 죽고 잠잠하던 아버지의 역모 건이 민영준에 의해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할수없이 여러 달 동안 천주교 교당에 숨어 지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 가족 모두 천주교 신도가 되었다. 나의 세례명은 "토마스" 였는데, 후세 사람들이 도마 안중근으로 부른 것은 바로 세례명 때문이다.

 

1904년 2월 한반도 주도권 쟁탈전인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로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을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아 갔다. 나는 후일을 도모키 위해 청나라에 피신해 있다가 어느 신부의 충고에 따라 다시 귀국을 결심하고 진남포항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병세가 악화되었음에도 조국의 독립이 더 중요한 일이라며 이 사실을 나에게 숨기라던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어 나는 조국에 대한 충성의 맹세로 좋아하던 술도 끊었다.

 

나보다 한 살이 더 많은 안창호 선생은 탁월한 웅변력으로 "강산 개조론" 을 펼치며 조국의 독립운동에 나섰다. 1907년 2월 대구에서는 천주교 지도자인 서상돈의 주도로 "국채 보상 운동" 을 펼치기도 했지만, 나라를 되찾기 위해선 무장 투쟁밖에 없음을 뼈저리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가족들과 이별하고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나의 독립 전쟁 근거지를 정했다.

 

1908년 4월, 의병군을 이끌고 함경도 경흥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하여 진지를 점령하는 등 작은 전투에서 승리를 하면서 체포된 일본군 포로를 석방하면서 나의 부대 위치가 알려져서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많은 동료들이 무참히 살육되고 부대는 완전히 해산되고 마는 중대한 실수를 하고 말았다.

 

1909년, 새로운 진로의 모색을 위해 "단지 동맹" 이라는 비밀 결사대를 조직했다. "우리 열두 명은 태극기 앞에 맹세하노니, 3년 안에 이토 히로부미와 매국노 이완용을 죽이지 못한다면 우리는 죽음으로 속죄하겠습니다" 란 맹세와 함께 왼손 약지 한 마디를 댕강 잘라 냈다.

 

"이토 히로부미, 만주에 온다"

단지회 결성 이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중 이토 히로부미에 관한 소문이 자자했다. 소문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면서 암살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두 살 위의 충북 제천 사람 우덕순, 러시아어를 통역할 18살의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으로 갔다.

하얼빈 조선인 회장인 김성백의 집에 거처를 정하고 이발관에 들러 거사를 앞둔 성스러운 의식처럼 단정하게 머리카락을 짤랐다. 또한, 사진관에 들러 세 사람은 기념사진도 찍었다.

 

우동지는 하얼빈에서 만난 조도선 동지와 함께 채가구 역에서 거사를 계획했지만 실패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는 하얼빈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운이 좋았다. 하얼빈 총영사가 러시아 군경에게 일본인 환영객은 검색하지 말라고 특별 요청을 하는 바람에 무사히 권총을 휴대하고 개찰구로 입장했다. 러시아 관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이 긴, 조그만 늙은이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총을 꺼내 늙은이의 오른쪽 가슴을 향해 세 발을 쏘았다. "탕, 탕, 탕" 첫 발은 곧장 폐에 박히고, 두 번째는 가슴을 관통하고, 세 번째는 배에 박혔다. 나머지 네 발도 곁에 있는 일본인들에게 순식간에 쏘았다. "이토가 쓰러졌다! 이토가 쓰러졌다!" 환영 인파가 가득하던 하얼빈 역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러시아 말로 "대한 독립 만세" 를 외쳤다.

"코레아 우라! (대한민국 만세) 코레아 우라!" 러시아 경찰서장과 의장대 두 명에게 포박되어 러시아군 헌병대로 연행되었다. 쇠사슬에 묶여 모진 고문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당시 일본 정부는 전세계로부터 주목받는 것에 큰 부담을 느끼고 속전속결로 재판을 진행하려 햇다. 하지만 러시아인 2명, 영국인 2명, 스페인 사람 1명, 한국인 2명, 그리고 일본인 1명의 국제 변호인단이 구성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결국 국제 변호사 선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본은 단순 살인 사건이나 파렴치범으로 결론을 내려고 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나는 조선 의병대 참모 중장으로서 적의 수괴를 처단한 것임을 천명하면서 국제법에 따라 재판해 달라고 당당히 요구햇다.

1910년 2월 14일 재판장 마나베는 서둘러 판결했다. "피고 안중근을 사형에 처한다"

1910년 3월 26일 온종일 비가 내리고 세찬 바람이 불었다. 어머니가 보내준 명주 수의를 입고 교수대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하느님! 일본이 어리석음에서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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