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를 일등으로 - 野神 김성근
김성근 지음, 박태옥 말꾸밈 / 자음과모음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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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 삼성 라이온즈 대 엘지 트윈스 간의 혈투는 한국 야구사의 명승부로 기록된다. 시리즈 전적 3 대 2로 삼성이 앞서고 있지만 9회말 현재 엘지가 9 대 6으로 3점을 앞서고 있어, 엘지는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릴 좋은 기회를 잡았다. 엘지 김성근 감독은 현재까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경험이 없다. 마무리 투수 좌완 이상훈이 등판했다. 삼성은 선두타자 김재걸이 중견수를 넘겨 펜스를 바로 강타하는 홈런성 2루타를 치고 진루했다. 다음 타자 강동우를 삼진으로 돌려 세운 이상훈은 다음 타자 브리또에게 볼넷을 허용했다. 원아웃, 주자 1, 2루. 다음 타자 이승엽이 힘껏 방망이를 돌렸다. 극적인 동점 3점 홈런, 한순간에 승부는 9 대 9 동점이다. 구원 투수가 등판했다. 최원호와 승부하던 4번 타자 마해영의 스윙이 무겁게 느껴졌다. 우측 담장을 넘기는 끝내기 홈런이다. 홈관중의 환호와는 달리 김성근 감독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다. 

 

2008년 한국시리즈, SK 와이번스 대 두산 베어스 간의 5차전이다. 8회말 무사 1, 2루의 위기를 간신히 넘긴 SK에게 또다시 위기가 찾아 왔다. 스코아 2 대 0으로 SK가 앞서고 있지만, 무사 만루의 역전 위기이다. 국민 2루수란 애칭을 가진 고영민이 투수 옆 땅볼로 원 아웃, 숨돌릴새 없이 다음 타자는 정규 시즌 타격왕 김현수이다. 딱 소리와 함께 타구가 투수 앞 땅볼이다. 병살로 처리하면서 경기 종료. 졌다고 생각한 게임에 마침표를 찍고서 작년에 이어 김성근 감독은 한국시리즈를 2연패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사람들은 야구 경기를 흔히 인생의 축소판에 비유한다. 우리들의 인생에 성공의 기회가 세번 찾아 오듯이, 야구 경기도 경기중 세번의 득점 기회가 찾아 온다고 한다. 목전에 둔 승리가 한순간에 패배로, 또는 절대절명의 위기를 잘 넘기고 승리를 맛보는 이와같은 명암이 늘 드리워지는 것이 야구라는 경기이다. 전문가들에게 약팀으로 평가되던 SK 와이번스의 사령탑을 2006년 10월에 맡아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정상으로 이끈 김성근 감독의 성공스토리를 만나 보자.

 

야구에 대한 열정

 

경남 진양군 깡촌 출신인 그의 부모들은 생계를 찾아 일본 땅 교토의 한인 밀집촌인 나가야에 정착한다. 그는 이곳에서 1942년 태어나 어릴적부터 가난에 매우 익숙했다. 다다미 열 두 장이 깔린 방 두 개의 작은 집이 육남매의 보금자리였다. 당시 재일 동포의 삶이 대개 이러했다. 부모는 물론이고 형, 누나들 모두 돈벌러 나가야만 했다. 홀로 남겨진 그의 놀이터는 가쓰라江이었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물놀이, 고기잡기, 멱감기 등으로 소일하며 성장했다. 일본 학교에 다녔고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야구를 즐겼다. 실력이 부족해서 자신이 가고픈 야구 명문고엔 진학을 못하고, 대신 설립된 지 3년 밖에 안된 가쓰라고교에 입학했다. 이유는 단 하나 야구부가 있다는 것이었다. 누구나 거치는 과정이듯, 그도 심부름, 주전자 당번, 훈련, 또는 기합 등의 신입생을 거쳐 2학년 부터는 본격적인 투수연습을 했다. 그 때부터 그는 연습 벌레였다. 학교가 파하면 가쓰라江에 매일 돌멩이 2백 개를 던졌다. 워낙 가난한 탓에 방망이와 글러브는 그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그래서, 그는 야구 용품을 사기위해 우유배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이것은 그에게 튼튼한 하체와 영양 공급이라는 덤을 주었던 셈이다. 입에서 단내가 나고 쓰러질 때까지 "펑고"라는 수비훈련을 시키면서 그는 2학년때 후배들에게 "악마"란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보통 이런 훈련은 감독이나 코치 또는 3학년 고참이 맡아서 하는 것이었는데, 그에게 맡길만큼 그는 카리스마가 있었던 듯하다. 학교 인근에 높이 924 미터의 아타고 山은 정상까지 약 5 킬로미터 거리이다. 그는 고시엔 대회를 앞두고 여기를 뛰어서 올랐다. 낙오자가 생기면 업고서 올라 가기로 작정하며 훈련했다. 이는 협동심 배양과 팀워크를 강화하는데 매우 유익했다. 이후 그는 지도자 시절에 이런 훈련을 많이 도입했다. 

 

실패로 부터의 교훈

 

일본의 고교 야구 선수들의 꿈은 고시엔 대회의 본설 진출이다. 김성근도 자신과 학교의 명예를 위해 지역 예선에 출전했다. 1회전 부전승으로 통과하고, 2회전에서 만나 팀과 9회말 투아웃까지 7 대 6으로 이기다가 외야수의 실책으로 역전패하고 말았다. 이는 그에게 평생 교훈을 남겨 주었다. "야구는 9회말 투아웃부터!" 그의 끈끈한 야구는 이를 잘 대변하고 있다.

 

한국으로의 진출

 

1959년 8월, 4회재를 맞은 재일동포 학생 야구단으로 그는 한국땅을 밟았다. 전쟁으로 침체된 한국 야구의 발전을 위해 기획된 친선 경기였다. 8월 한 달 동안 서울, 인천, 대전, 대구, 부산을 순회하며 지역의 야구 명문고들과 시합을 했다. 그는 8월 9일 중앙고와의 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5회까지 무려 삼진 11개를 잡아내며, 8 대 0으로 승리했다. 언론은 좌완 투수인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한편, 부산 경남고와의 경기 도중 투수가 던진 공이 4번 타자 박영길의 머리를 맞췄다. 관중들은 "쪽발이"란 소리와 함께 야유가 심했다. 이로 인해 그는 삐딱선을 탄 조국의 감추어진 발톱에 의해 평생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처럼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부산 동아대 야구선수로 스카우트되었다. 1960년엔 교통부에 스카우트되어 실업 야구선수로 등록하고, 제 4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영광을 누렸다. 교통부의 김일배 감독은 초고교급 타자 백인천을 길러낸 명장이며 스타르타식 훈련으로 유명했다. 한달 훈련이 마치 10년 치 훈련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한편, 아시아 선수권대회에선 자유중국(대만)과 함께 공동 2위를 기록했지만, 알본과의 격차가 많이 줄었음을 자축하면서, 만 스무 살의 좌완투수 김성근의 화려한 전성기가 도래했다고 야구인들은 축하해 주었다. 1962년 그는 실업팀 기업은행으로 이적한후 실업야구에 시즌제를 도입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자, 그는 영구귀국을 결심했다. 어머니를 비롯, 가족의 반대가 심했지만 그는 평생 야구를 하고 싶어서 한국을 선택한 것이었기에 야구만 할 수 있다면 그 무엇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야구는 그의 삶의 목적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1964년 그의 기록은 20승 5패이다. 당시 투수들은 많은 투구로 게임당 150개 투구는 기본이었다. 참고로 WBC 대회의 투구제한은 80개이다. 그의 어깨는 아프다는 신호를 계속 보냈다. 타자로 전향하여 한 경기에서 홈런도 두 개치는 등 활약도 해보았지만, 1965년엔 통증이 더 심했다. 결국 이듬해 그는 나이 스무 다섯 살에 투수 생활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선배의 소개로 이화여대에 재학 중인 배필을 만나 1967년 3월 결혼하여 평범한 은행원 신분으로 돌아 갔다.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며

 

1969년 여름, 기업은행 간부의 요청으로 경남 마산상고의 감독직을 수락했다. 승수보다 패수가 많았던 팀으로 패배의식에 젖어 있었다. 훈련에 또 훈련, 견디지 못한 일부 선수들은 도망을 쳤다. 이때 그는 배우는 것보다 가르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절감했다. 비로소 독서를 시작했다. 현재 그의 서재엔 야구서적만 5 백권이 넘는다. 이후, 만 29세에 기업은행 감독으로 취임, 1973년 구가대표팀 코치, 1976년 충암고 감독, 1979년 신일고 감독 등을 거치면서 OB 베어스 코치와 감독, 태평양 돌핀스 감독, 삼성 라이온스 감독,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엘지 트윈스 감독, 일본 롯데 마린스 코치, 그리고 SK 와이번스 감독 등 프로 야구의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야구계에선 김성근 감독을 야인으로 분류한다. 직설적인 표현을 거침없이 함으로써 구단주와의 불화로 임기를 못채우고 사령탑에서 두 차례나 쫓겨난 그였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의 후회없는 행동에 떳떳하기만 하다. 약팀으로 분류된다던 SK 와이번스의 감독을 맡아 자신의 전매특허인 스파르타식 훈련을 실시하여 강팀으로 팀칼러를 바꾸고 지난 2년간 무적으로 군림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는 자신의 야구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에 다소 섭섭함을 표현하면서 자신은 "지지않는 야구"를 추구한다고 역설한다. 수많은 좌절과 실패속에서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난 야구의 신이라 불리는 김성근, 그의 野生野死는 언제 끝이 날지 주목된다. 그의 도전은 지금도 진행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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