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리더 쿠빌라이 칸 - 칭기스칸의 손자, 사상 첫 세계제국을 만들다
김종래 지음 / 꿈엔들(꿈&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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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1215 - 1294년)는 징기스칸의 손자로서 몽골제국의 제 5대 칸이자, 대원제국의 창업자이다. 할아버지 사후에 휘몰아친 권력투쟁 속에서 그는 현명하고 강한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훗날을 도모하다, 1260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인물이다. 지금 그를 주목하는 이유는 이민족으로 중국 중원의 황제가 되었으며, 인류사 처음으로 글로벌 경영 시스템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 비친 그는 고려 25대 충렬왕의 장인이기도 한데, 그는 할아버지가 물려준 "초원과 말의 시대"를 "바다와 배의 시대"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연 인물이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비친 대원제국의 문화와 문명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도 이 책을 탐독하고서 대항해의 모험을 시도한 것이었다. 이제 쿠빌라이 칸의 업적과 리더십을 만나 보자.

 

대운하 프로젝트

 

쿠빌라이는 만리장성 이남에 위치한 수도, 大都의 건설을 장장 26년에 걸쳐 1292년에 완성했다. 그는 물류 네트워크에 촛점을 맞춘 신국가를 구상하고 있었다. 도시 중앙에 적수담이란 인공호수를 만들어 하루에 배가 일천 여척 넘게 통행토록 함으로써 전에 없는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적수담에서 밖으로 향하는 네트워크의 핵심은 바다로 나가는 것이었다. 운하를 이용한 수송비용은 육로수송의 10% 정도의 수준이었기에 1292년 적수담과 통주를 연결하는 通惠河를 완성한후, 북경에서 항주를 잇는 "경항대운하" 프로젝트를 착공했다. 중국이 낳은 천재 수학자 곽수경의 설계와 감독하에 갑문식 도크 방식으로 장장 1792 킬로미터의 운하를 건설했다.

 

기존의 물류는 중국 수당시절에 만들었던 운하의 방향이 고도 장안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장안시스템을 개혁하여 구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치를 위한 신국토 디자인 사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쿠빌라이의 마지막 꿈, 바다로 나가는 것은 운하의 종착지를 천진으로 정함으로써 완성이 된다. 기존의 通惠河와 천진을 잇는 새로운 운하, 直古운하가 건설된 것이다. 천진은 처음 강남물자의 수송로로 구상되었다가 국제항구로 발전한 것이다.

 

외국인에게 비친 운하의 모습

 

유대인 상인 야콥 단코나는 아드리드해의 항구도시를 출발해 1270년 중국남부 泉州에 도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약 6개월을 머물면서 많은 경험을 했고, 이를 토대로 여행기를 남겼다. 그의 기록 [빛의 도시]는 유럽에 소개되면서 월계수란 뜻의 "자이툰"이란 이름을 얻었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와 비교할 때 어마 어마한 천주의 모습에 그는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대규모 무역항인 자이툰은 빛의 도시이다. 밤이면 거리마다 대단히 많은 기름 등불을 켜고 횃불을 밝혀서 아주 먼 거리에서도 보일 정도로 도시가 밝게 빛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인구 30만명이 넘는 도시, 1만 5천 척의 배가 정박하는 거대한 항구이자 세계인이 모이는 국제시장, 그의 여행기에 비친 것처럼 운하와 항구를 통하는 물의 고속도로는 그야말로 쿠빌라이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초원에서 바다를 꿈꾸고, 바다를 호령하다

 

쿠빌라이는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로 동서고금의 제국의 사례들을 벤치마킹하여 유목과 농경에 바다를 추가한 대원제국을 구상했다. 대도와 상도를 거점도시로 하고, 초원과 중원이 연결되도록 남북으로 350 킬로미터의 거대한 타원형의 메트로폴리스가 건설되었다. 대원제국의 해상왕 "손수경"은 베트남, 태국, 버마, 자바, 수마트라에 이르는 원정길에 올랐다. 각국을 방문하며 자유무역을 제안하는 통상사절단의 역할이었는데, 동남아 각국은 이에 열렬히 호응했다. 이후 명나라 때 정화가 거대선단을 이끌고 무려 7차에 걸쳐 18만 여 킬로미터를 항해하여 멀리 아프리카 동부연안까지 왕래한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적과의 동침

 

대만 국립박물관에 보관된 [쿠빌라이 사냥도]를 보면, 얼굴색이 검은 사람들이 보인다. 중앙아시아에서 온 흑인이 분명하다. 대원제국은 이민족도 수용한 공동체였던 것이다. 몽골의 군사력에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행정력과 색목인의 상업력이 공존하는 공동체를 목표로 했다. 따라서, 그는 공존의 원칙아래에서 대원제국의 시스템을 운영할 엘리트를 모았다. 한인 참모 유병충을 위시하여, 종교와 통역담당 참모인 시리아인 이사 켈레베치, 경제분야 참모인 위구르인 아흐마드, 신중하며 용맹한 장군 비얀 등이 바로 그들이다. 한마디로 거대 프로젝트 수행을 위해 콘소시엄 방식을 채택한 셈이었다.

 

쿠빌라이노믹스

 

대원제국에서 큰 거래엔 은이 사용되었지만, 적은 금액의 거래엔 "교초"란 종잇돈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후 은과 교초의 단점을 해결한 화폐가 염인이었다. 당시 염인의 사용이 확대되면서 지금에 비유하면 달러와 같은 존재였다. 이는 대원제국 금융시스템의 완결판인 셈이었다. 또한, 대외무역의 활성화를 위해 유럽과 아랍인들이 선호하는 도자기를 적극 생산했다. 수요가 급증하면서 대량생산이 요구되자, 도자기를 굽는 재료로 기존의 장작대신 남송시절 개발된 석탄기술을 널리 보급하여 에너지 혁명을 단행했다.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 이를 "검은 흙"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쿠빌라이는 버림받은 칸의 손자였으며, 벼랑 끝으로 내몰리기도 했지만, 할아버지 징기스칸의 창업정신을 가슴속에 새기며 살았다. 일흔이 넘는 나이에도 전투 현장에 나섰고, 티베트인에겐 허리를 굽혀 타협도 하면서 그는 후손에게 물려줄 자랑스러운 신화를 스스로 당당하게 개척했다. "결단력 있는 자만이, 결단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위대한 통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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