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 - 태평양 전쟁에서 배우는 조직경영
노나카 이쿠지로 외 지음, 박철현 옮김, 이승빈 감수 / 주영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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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과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진주만 기습으로 발발하였지만 일본 본토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두 발의 원폭으로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 책은 일본의 패전에 대한 이유를 분석하여 일본군의 실패에 감추어진 교훈을 찾아내려는 의도에서 저술된 것이다. 여섯 명의 저자가 함께 저술한 것으로 1984년 출간되어, 20여 년이 지난 현재 일본에서 100쇄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이다.

 

연구회의 태동

 

1980년 가을 한 연구회가 발족한다. 방위대학교 전쟁史 교수인 스기니오 요시오는 조직론을 전공한 그의 동료 노나카 이쿠지로, 가마타 신이치와 의기투합하여 위기상황에 처한 국가의 의사결정과 정보처리를 분석하는 모임을 결성했다. 또한, 대외 정책 결정론에 관심이 컸던 도베 료이치도 이 모임에 규합하면서 연구 활동을 진행하지만, 그들은 전쟁 자료의 부족으로 연구가 벽에 막히자 연구 과제를 태평양전쟁으로 국한시켜 이를 재조명하고 패배원인을 규명하는 방향으로 연구 주제를 재설정했다. 이들의 주제는 "태평양전쟁의 실패에서 드러난 일본군의 조직 특성의 탐구"였다.(* 책의 원제목이 '실패의 본질 - 일본군의 조직론적 연구') 이후 군사史가 전공인 무라이 도모히데, 군사조직 연구에 몰두 중인 데라모토 요시아가 이들 모임에 새로이 참여했다.

 

실패 사례

 

노몬한 사건(1939년 5월 - 9월)은 일본 육군이 소련군에 패한 최초의 패배인데, 근대식 전투에 일본군이 서투르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으로 바로 태평양전쟁의 실패를 알리는 서곡이었던 셈이다. 작전 목적이 애매했고, 중앙과 현지간의 코뮤니케이션이 원활치 못함으로써 실패한 전투이다.

 

미드웨이 작전(1942년 6/4 - 6/7)에서는 일본 해군이 패배했다. 작전 목적이 불분명했고, 복잡한 부대 편성때문이었다.

 

과달카날 작전(1942년 8월 - 1943년 2월)에서는 미국과의 지상전에서 처음으로 패배했다. 일본군 보급선의 최전방이 바로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 섬이었기에 미군이 전략적으로 침공했던 것이다. 일본군은 정보가 부족했으며, 해군과 육군의 원활한 조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임팔 작전(1944년 3월 - 7월)은 정말 어처구니 없는 전쟁이었다. 임팔은 인도에 위치한 곳인데, 일본군은 버마(현, 미얀마)를 방위할 목적으로 임팔을 공격하지만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참담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일부러 할 필요가 없었던 공격 작전인데도, 부하의 의견을 묵살하고 작전을 감행한 무타구치 사령관의 개인 성격과 인정에 약한 가와베의 리더십때문에 실패를 자초했던 것이다.

 

레이테 해전(1944년 10/22 - 10/26)은 필리핀 레이테섬에 상륙을 시도하는 미군을 격멸시키기 위해 벌인 해전이었지만, 전투에 참가한 함대가 임무를 충분히 숙지못한 채 작전에 돌입하여 실패로 끝난 사례이다.

 

오키나와 전투(1045년 4월 - 6월)도 작전 목적이 애매했고, 대본영과 현지군간의 인식 차이가 있었으며, 작전도 통일되지 못했기에 질 수밖에 없었다.

 

실패 요인 분석

 

목적의 애매함

목적이 불분명하면 그 과정과 결과도 불분명할 것이다. 군대는 대규모 조직이다. 명확한 방향이 없다면 이들은 우왕좌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단기 전략에 의존

일본군은 여러 차례의 자잘한 전투에서 미국에 승리하고 장기전에 돌입하면 그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퇴각할 것이라는 안일한 자세에 젖어 있었다. 일본은 확실한 장기 전망도 없이 전쟁에 돌입했던 것이다. 일본군이 단기 결전으로 저항하는 방식은 보급과 병참지원을 믿지 못하고 경시하는 태도때문이기도 했다.

 

전략수립의 주관성

일본군은 일정한 논리에 의존하기보다는 다분히 감정이나 분위기에 지배되는 경향이 짙었다. 또한, 일본군은 전략대안이 많지 많아 거의 기습 전술을 구사했다.

 

균형 없는 전투기술 체계

노몬한에서 소련군 전차부대에 대패한 일본군 전차는 육군 병기 체계의 가장 큰 결함이었다. 일본은 대전차 전용 전차포 개발이 늦어져 시시각각 변하는 전황에 대응할 수 없었다.

 

인맥 편중의 조직 구조

중앙부의 지휘를 무시하고 참모가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육대 출신의 엘리트 집단은 참모라는 직무를 통해 지위권에 강력히 개입함은 물론 강건한 그들의 인맥을 구축하고 있었다. 조직 내부의 리더십이 지휘관보다 참모들이 더 발휘했던 것이다. 더구나 일본군 조직의 특이점은 관료제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하극상이 허용되는 이상한 시스템이었다.

 

개인 중심의 조직

근대적인 대규모 작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키 위해선 군 전체의 일관성 유지와 통합이 필요하다. 일본군은 육,해,공 삼위일체 작전에 대한 육군과 해군과의 공동 연구가 전혀 이루어 지지 않았다. 조직의 사고와 행동 양식이 서로 다르다는 근본적인 대립이 존재하고 있었기에 통합은 어려운 과제였을 것이다.

 

과정, 동기를 중시한 평가

노몬한 사건이 종료된 후, 책임을 묻는 인사이동이 실시되었다. 과달카날 전투에서도 시종일관 총공격만을 주장했던 쓰지 참모의 중대한 책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묻는 대신 단순 전근으로 끝내고 말았다. 일본군은 결과보다 과정을 높이 평가했다. 이러니, 개인의 책임소재를 명확하게 물을 수 없었고, 평가 자체도 애매모호했기에 하극상같은 돌출 행동도 가능한 조직이었다.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조직으로서의 일본군이 실패하였기 때문에 전쟁에서 졌다는 설명이다. 저자들은 이 실패를 통해 "어떤 조직이 성공할 수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진화하지 않으면 도태한다. 지구상에 살아 남은 종은 강했거나 지적 능력이 뛰어 났기 때문이 아니라 변화에 잘 적응하고 진화한 종이라고 다윈은 주장했다. 청일전쟁과 로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강력한 대동아 정책을 펼친 일본이었지만, 새로운 변화를 부단히 추구하지 않았기에 실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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