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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술의 세계사 - 리더가 탐한 붉은 권력, 인간의 욕망을 드러낸 와인 역사
명욱 지음 / 포르체 / 2026년 6월
평점 :
2026년 뉴욕 경매에서는 1945년 빈티지 제품이 약 12억 원(81만 2,500달러)이라는 경이로운 가격에 낙찰되며 역사상 최고가를 경신했다. 와인 한 병이 서울의 아파트 한 채 가격과 맞먹는 시대다. 사람들은 왜 이 붉은 액체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불하는가. 이 책은 그 가격표 뒤에 숨겨진 서사의 힘을 추적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책의 저자 명욱은 대한민국의 대표적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전문가로 술이 인간의 욕망과 권력, 문화적 헤게모니와 어떻게 연결되어 왔는지를 탐구해 왔다. 와인을 비롯한 주류의 역사를 문명과 정치, 경제, 인간 심리가 교차하는 거대한 서사로 풀어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
총 여덟 개 장으로 구성된 책은 문명의 시작과 와인(1장), 와인, 제국의 통치 수단이 되다(2장), 왕과 교황 결탁하다(3장), 피할 수 없는 전쟁(4장), 백년의 전쟁(5장), 와인으로 귀족 길들이기(6장), 와인빛 혁명(7장), 나폴레옹과 근현대(8장) 등을 통해 와인이라는 액체 속에 담긴 인류의 허상과 현실을 고찰한다.
포도에서 짜낸 붉은 생명력
당시 와인은 제한된 생산 기반 속에서 귀중하게 취급되던 자원이었으며, 그 붉은 색채는 생명력과 재생, 그리고 파라오 권위의 시각적 강조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그들은 붉은 와인을 보며 직관적으로 피의 이미지를 읽어냈다.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당시 이집트인들은 와인을 과거 신에게 대항했던 자들의 피가 땅에 스며들어 포도나무로 다시 태어난 것이라 믿었다고 전한다. 술에 취해 이성을 잃는 행위를 두고 그들의 몸이 조상의 피로 가득 차 과거의 광기가 되살아나는 것이라 여겼다는 그의 기록은 고대인들이 와인을 기호품을 넘어 두려운 영적 힘을 가진 매개체로 보았음을 시사한다.
람세스 2세 시대의 나일강 델타 북서부 지역은 왕실과 신전의 축배를 책임지는 풍요로운 포도 재배지였다. 당시 이집트의 와인 관리 체계는 놀라울 정도여서 항아리에 생산 연도와 포도원은 물론 양조 책임자의 이름까지 상세히 기록할 정도로 정교했다.
와인은 또 지하 세계의 처형자와 이어지기도 한다. 바로 와인 압착기를 관장하는 신이자 지하 세계의 처형자로 알려진 셰즈무였다. 그는 포도와 올리브를 압착하는 신이면서 동시에 지하 세계에서 죄인들을 처벌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이집트 종교 문헌에서는 그가 적들을 붙잡아 그들의 머리를 으깨 피를 짜낸다는 잔혹한 이미지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표현은 포도 압착과 피의 이미지를 서로 겹쳐 놓은 상징적 언어였다.
우리는 흔히 람세스 2세를 거대한 석상과 전차 부대로 기억한다. 또는 기독교 세계관에 등장하는 모세의 라이벌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힘은 백성들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상징에서 나왔다. 그는 적들에게는 셰즈무의 잔혹한 심판을 연상시키고, 백성들에게는 오시리스처럼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구원자의 상징을 가졌는데 이는 와인이라는 물질문화가 가진 이중적 속성, 즉 죽음과 부활(생명)의 서사를 설명하는 상징적 틀로 해석될 수 있다. 람세스 2세에게 와인은 신의 축복을 지상에 구현하고, 필멸必滅의 인간인 자신을 신화적 존재로 연출하는 상징적 매개였다.
세 영웅(삼손, 다윗, 솔로몬)의 운명
유대 민족의 역사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그리고 가나안이라는 고대 문명의 핵심축을 관통하는 거대한 이동의 기록이다. 그 서막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곡물 농사와 맥주 문화가 발달했던 메소포타미아를 떠나, 약속의 땅이자 산지와 구릉지인 가나안으로 향했다. 이후 요셉을 따라 이집트로 이동해 정착한 유대인들은 훗날 모세와 함께 이집트를 탈출(출애굽), 40년 간의 광야 생활 끝에 가나안에 입성했다. 이들은 부족국가 시대를 거쳐 이스라엘을 세웠고 사울과 다윗, 뒤를 이은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며 전성기를 누렸다.
나일강과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을 낀 제국들은 미생물과 흙탕물을 피하고자 곡물을 끓여서 만든 맥주를 주요 식수로 삼았다. 반면 가나안 산지는 석회암 지대라서 석회질의 물을 마시기 좋게 하려고 와인을 섞어서 마시는 지혜를 발휘했다. 결과적으로 와인은 이스라엘 역사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술과 연관된 리더의 모습을 살펴보자. 삼손은 블레셋에게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사명을 받은 나실인(야훼로부터 선택받은 자)으로 구별되었다. 그는 와인과 포도 열매를 멀리하고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음으로써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초인적인 힘을 지닌 존재였다. 하지만 그는 술이 동반되는 블레셋 딤나의 7일 잔치에 참석해 그간 지켜온 경계를 허물고 사랑한 이방인 여인 데릴라에게 힘의 근원이 머리카락임을 털어놓자, 그날 밤 바로 잠든 사이에 머리카락이 잘리고 힘을 잃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다윗은 와인을 철저히 봉쇄하면서 권력을 다졌다. 그는 관장을 임명해 포도원과 와인 저장고를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그에게 와인은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라 이를 이용해 각 지파와 전사들의 지지를 결집시킨 군주였다.
세 번째 인물은 솔로몬 왕이다. 그는 포도밭 여인 술람미와 뜨거운 사랑을 노래한 '아가서雅歌書'에 등장한다. 왜 그는 수많은 왕비와 후궁들을 뒤로하고, 뙤약볕 아래서 포도원을 가꾸느라 피부가 검게 그을린 시골 처녀에게 푹 빠졌을까? 일부 성서학자들은 정략결혼으로 맞이한 가식적인 미인들에게 권태를 느꼈을 거라고 분석한다. 아무튼 솔로몬에게 그녀는 단순한 연애 대상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순수함 그 자체였다.
찬란한 와인의 역사는 '탐욕'이란 독으로 돌아와 제국을 붕괴시켰다.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는 사태를 맞았다. 먼저 몰락의 길을 걸은 것은 북이스라엘이었다. 메소포타미아를 제패한 잔혹한 아시리아의 철기 군단에 의해 지도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남유다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끈질지게 버텼으나 결국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최후를 맞이했다. 기원전 586년,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솔로몬이 사랑을 노래하던 포도원을 군화발로 무참히 짓밟고 말았다. 왕족과 엘리트 계층을 모두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바로 '바빌론 유수'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그러나 바빌론의 와인 정치도 페르시아 군대의 침공으로 종말을 맞았다. 통치와 정복의 도구였던 와인은 결국 후대 왕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 제국의 종말을 재촉한 독배였던 것이다. 이후 수천 년 동안 해당 지역의 역사적 분열은 지속되었다. 땅의 진정한 주인을 따지는 정통성 논쟁은 지금까지도 전쟁을 불사하고 있다.
소믈리에의 등장
소믈리에는 와인을 관리하고 최상의 서비스를 진행하는 사람이다. 즉 와인 맛과 향香의 변질을 체크하는 특별히 미각이 발달한 사람이자 이들의 직업군이기도 하다. 이 직업은 고대 이집트와 페르시아와도 연결된다. 성경에 등장하는 술 관원은 왕과 매우 밀접한 관계의 인물이 담당할 수 있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요셉과 이집트 술 관원의 이야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요셉은 가나안 땅 출신의 유대인으로 이집트 노예에서 총리까지 오른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 이같은 인생사의 결정적 전환점은 바로 술 관원과의 만남이었던 것이다.
옥살이를 하던 요셉은 감옥에 들어온 파라오의 술 관원이 꾼 꿈을 해몽해 주었다. 세 가지 포도 송이에서 즙을 짜서 파라오의 잔에 드리는 그 꿈을 '3일 안에 복직될 것'이라고 명쾌하게 해석했는데, 해몽처럼 실제로 복직된 관원은 훗날 파라오에게 요셉을 추천함으로써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해석함은 물론 대바책까지 제시하면서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술 관원은 어떤 직책이길래 이리도 왕과 가까울 수 있었을까? 고대와 중세의 왕실에서 왕의 음료를 관리한다는 것은 곧 왕의 생명과 국가의 안위를 책임지는 중대한 직무였다. 독살이 흔한 암살 수법이었던 시대에 이런 일을 맡은 사람은 왕이 가장 신뢰하는 최측근이었으며, 그의 미각과 후각은 곧 왕의 생존을 결정짓는 셈이었다.

붉은 황금, 와인의 역사
이밖에도 책은 와인과 관련된 역사를 로마시대, 교황의 중세시대,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 르네상스와 절대왕정, 나폴레옹 시대,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와인의 역사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결국 와인은 정치, 경제, 종교, 국가의 정체성과 맞물린 역사와 문화의 집합체이다. 이같은 역사와 함께 와인을 즐긴다면 제대로 그 맛을 음미할 것 같아 와인 애호가들에게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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