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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 너머
벤자민 마이어스 지음, 최리외 옮김 / 다산북스 / 2026년 5월
평점 :
삶은 어디로 간 걸까? 매일 거울을 보며 똑같은 질문을 건네보지만 답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영국을 배경으로 문학을 통해 진정한 만남을 그려내는 이 소설은, 전쟁의 소식이 끊이지 않는 이 시대와 겹치며,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한다. 전쟁의 포화로 검게 그을린 세계에서 시를 만난다는 것은 정말이지 기적 같은 일이고, <수평선 너머>는 바로 그 기적에 대한 이야기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문학이 인간의 삶을 구할 수 있다는 그 오랜 믿음을 다시 회복했다. - 황인찬(시인)

이 소설에 대한 찬사가 넘친다. 마치 동화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거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우정에 관한 이야기이며, 페이지마다 묘사의 보석이 박혀있어 시적詩的이고, 살아있음의 기쁨을 그려낸 서정적인 소설 등의 글이 무려 4페이지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나 또한 그래서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먼저 영국 작가 벤자민 마이어스에 대해 알아보자. 그는 저널리스트이자 시인이며 소설가이다. 실제로 그의 글은 <가디언>, <뉴 스테이츠먼> 등 다양한 매체에 실렸으며, 그의 작품은 풍경, 도덕성, 인간관계 등의 주제를 아우른다. 월터 스콧상을 수상한 <교수대>가 대표작이며, 영국 왕립 문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소설의 줄거리는 광부가 될 운명이었던 16살 소년이 우연히 만난 노부인과의 우정을 통해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되는 어느 여름날을 담았다. 참고로 책표지에 담긴 그림은 화가 콜린 프레저(Colin Fraser)의 작품 'Beacon Head'(2023년)이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젊은 때다"
이는 나이든 내가 자주 읊조리는 말이다. 한해 한해 세월이 참 빨리 간다고 느껴지는 시절이 오면, 입 밖으로 절로 나오는 듯하다. 소설의 화자 또한 나와 비슷한 듯 이렇게 소설을 시작한다. 아픈 발을 질질 끌며 다니다 보니 마룻바닥의 페인트칠이 다 닳아 벗겨질 정도로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빨리 지나간 세월임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한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나이 든 순간이며, 앞으로 더 늙어갈 일만 남았다. 열린 창가에 앉아 있는 지금, 화자의 생애 마지막이 될 여름의 향기를 실어오는 가볍디가벼운 바람결에 새들의 노래가 글리산도(서로 다른 두 음 사이를 미끄러지듯 빠르게 지나가며 연주하는 음악 주법)를 이루고, 화자話者는 삶을 붙들듯 詩에 매달린다.
삶은 저 바깥에서 내가 게걸스레 먹어치워 주기를, 허겁지겁 집어삼켜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각이 내 안에서 깨어났고 도무지 만족을 몰랐으며, 나로서는 그것을 감당해야 했다.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혹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깔려 익사하듯 죽어간 또래들을 위해서라도 내게는 삶을 탐닉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23쪽)
지금까지 어린 시절 대부분은 교실 창밖의 세계에 관심이 있었다. 수업을 파하는 종소리가 울리면 얼른 뛰쳐나가 들판을 자유로이 쏘다니고 싶었다. 멧비둘기가 지저귀는 소리, 나무를 쪼는 딱따구리 소리, 금방망이풀, 유채꽃의 향기가 풍기는 계절이었다.
조만간 북아프리카에서 이곳 북부 잉글랜드로 돌아오는 제비들과 칼새들도 모습을 보일 것이다. 위어강 강둑을 따라 자라난 야생 마늘의 톡 쏘는 향기가 공기에 가득했다. 여기저기에 생긴 오솔길과 따끈한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걸었다. 문닫은 공장, 전선 타래, 짐수레가 놓인 공터 등을 지나치는 동안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전쟁(1940년 4~6월, 영국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노르웨이를 지원했지만 결국 독일군에게 점령당했음)은 질병과도 같아 시간의 흐름만이 치유할 수 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고통받아야 했다.
화자의 부모님은 화자가 탄광炭鑛에 들어가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하리라곤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분들이다. 화자의 도래 중엔 이미 2,3년째 채찬 막장에서 일한 애들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맑은 공기를 그토록 갈망하는 화자가 지금 영국의 길가를 걷고 있는 이유였다.
오늘도 걸었다. 막다른 길처럼 보였음에도 90미터쯤 더 나아가자 저만치 오두막이 보였다. 석재石材로 지은 집은 마치 문어발처럼 아메리카 담쟁이덩굴이 온통 뒤덮고 있었다. 오솔길은 오두막 옆쪽에서 끝났다. 집 앞으로 정원이 보였다. 화단으로 둘러싸인 채소밭이 자리하고 있었다. 경사진 목초지의 내리막을 따라 조그맣게 조성한 구역이었다. 새 모이통아 여러 개 놓여 있었고 박새, 되새, 개똥지빠귀, 솔새, 검은머리꾀고리 등이 분주하게 식사하고 있었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엔진에 시동을 거는 듯 낮고 거친 소리였다. 어깨 너머로 돌아보니 독일새퍼트 한 마리가 단거리선수처럼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으르렁대는 소리는 간담이 서늘했다.
정원 울타리 너머 덤불 속에서 한 여성이 몸을 일으키며 개를 불렀다. "버터스" 그녀는 화자를 바라보았다. 친근하게 인사하는 말투가 오히려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180센티미터 정도의 큰 키를 가진 이 여성은 당당하고 거만한 자세 때문에 위엄이 있어 보였다. "봐줘라, 버터스"라는 그녀의 말에 개는 몸을 수그려 땅에 엎드려 앞발에 머리를 기댔다.
"그냥 이 길을 따라 내려오던 중이었어요"
"억양을 들어보니 먼 데서 온 모양이군. 갱부 사투리 같은데?"
한 눈에 노숙자로 보이는 화자에게 쇄기풀 차를 권하는 중년 여성의 이름은 '덜시 파이퍼'였다. 통성명을 원하는 그녀에게 화자는 "로버트 애플야드"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쇄기풀 차를 꺼려하던 소년에게 쇄기풀 차를 끓일 때 빛깔과 풍미 때문에 레몬을 첨가한다고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인생에는 약간의 색이 필요한 법이거든. 환상일지라도 말이지. 그리고 풍미 없는 삶은 죽음과 다름없어." (51쪽)
몸에서 나는 땀냄새를 의식하며 떠나려하는 로버트에게 덜시는 바닷가재 요리를 한다며 저녁까지 먹고 가라고 제안한다. 이를 먹어본 적 없었던 로버트는 어머니가 생선을 안 좋아한 탓이라고 얼버부리려 하자 벌써 경제적 사정이었음을 눈치 챈 덜시는 화제를 잠시 전쟁 탓이라고 돌렸다. 이에 로버트는 모두 독일 놈들 때문이라며 적개심을 완전 드러냈다. 그러자 덜시는 진정으로 싸울 가치가 있는 건 자유, 자유가 가져다주는 모든 것, 시詩, 좋은 와인 한 잔, 맛난 식사, 자연, 사랑 등이라고 말한다. 로버트에게 도움되는 대화는 이어졌다.
로버트가 저녁까지 고맙게 먹고 가겠다고 하자 저 아래 초원에서 마늘 한 움큼 뜯어오라고 요구했다. 정원 울타리를 넘어 들판으로 나아갔다. 사방천지에 쑥갓, 마디풀, 메꽃, 과꽃, 쇄기풀, 검은딸기나무, 우엉, 갈퀴나물, 엉겅퀴 등 다양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함께 나서서 길을 터준 버터스 덕분에 야생 마늘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평화로운 들판 풍경에 푹 빠져서 윙윙대는 곤충들과 근처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이를 한껏 즐겼다. 모르는 사이에 로버트의 삶을 다른 방향으로 떠밀어 주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이야기는 듣는 사람 혹은 읽는 사람에게 다른 풍경을 건넨다.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시공간의 그 낯선 풍경 속에 인물이 놓인다. 어딘가로 움직인다. 누군가를 만난다. 우연히, 놀랍게도 우연히 말이다. 예기치 않았던 우연이 엮어내는 이야기가 실로 경이롭다.
생애의 초여름을 지나는 로버트는 오소리 굴을 들여다보다 우연히 발견한 덤불 바깥 길목에 위치한 오두막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덜시를 만났다. 자기 인생의 늦가을쯤 지나고 있는 듯한 덜시는 생판 모르는 소년을 마치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대햇다. 박학다싯(?)한 그녀의 말들이 로버트의 귓가에 맴돌고 나아가 인생 방향까지 비튼다. 이 소년은 처음으로 철학과 예술의 언어를 배우고, 문학의 세계에 몸을 담근다.
좋은 시는 마음속 조개껍데기를 벗겨내 그 안에 깃든 진주를 발견하게 한단다. 말로 도저히 표현해 낼 수 없는 감정에 언어를 부여하는 거야. (중략) 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혼자는 아니라는 점을 일러주는 인류의 표현 방식이야. 캄캄한 밤을 홀로 항해하는 뱃고동에서 애절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처럼, 시는 시대를 초월해 공명하는 위로의 목소리를 들려주지. (138-139쪽)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이런 순간이 찾아올 수도 있을 듯 싶다. 비록 우연일지라도 자연을 곁에 두고, 타인을 만나 시절과 문학을 논하는 그런 삶을 말이다. 또 다른 우리 모두의 풍경 안에서 이미 진행 중일지도 모른다는 번역자의 말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햇살 가득한 여름날 그늘막에 앉아 이 소설에 빠져 보시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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