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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 이일하 교수의 아주 특별한 식물학 에세이 ㅣ 지식벽돌
이일하 지음 / 초봄책방 / 2026년 3월
평점 :
식물에게 시간은 원처럼 순환한다. 낙엽은 썩어 흙이 되고, 그 흙은 다시 새로운 생명의 토양이 된다. 개체는 사라지지만, 종의 리듬은 끊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식물의 시간에는 조급함이 없다. 그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떤 해에는 꽃이 피지 않아도, 다음 계절에 다시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글을 시작하며' 중에서

책의 저자 이일하는 30여 년간 꽃을 연구해 온 과학자로, 식물의 개화 유도 연구 분야를 개척한 선구적 연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서울대에서 식물학 전공으로 학석사를 마치고 미국 위스콘신-메디슨 대학에서 생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외부 강연을 통해 과학 대중화에도 힘쓰고 있다.
총 3개의 챕터로 구성된 책은 식물의 정의(챕터1), 식물의 생장(챕터2), 식물의 진화(챕터3) 등을 통해 서른여덟 개의 에피소드를 다루면서 느린 시간 속에서 식물이 어떻게 세계를 인시하고, 어떻게 스스로의 리듬을 만들어 가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식물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 느린 시간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우리가 그 속도에 맞추기 시작할 때, 비로소 보이지 않던 생명의 표정이 드러난다. 잎의 기공이 열리고 닫히는 리듬, 뿌리가 방향을 바꾸는 미세한 각도, 햇빛을 따라 잎이 하루 동안 이동하는 각도의 변화-그 모든 것이 식물의 언어다. 그 느린 언어 속에서 우리는 ‘생장’이란 것이 단지 빠르게 커지는 일이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를 조율하는 과정임을 배우게 된다.
식물이란 무엇인가
지구 생태계 전체 생물량의 80% 이상이 식물이다. 지구 생명계를 움직이는 '진짜 주인공'은 사실상 식물이 아닐까? 만약 외계인이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방문한다면, 그들 또한 식물을 이 행성의 지배자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생명체가 식물이니까.
우리들은 생긴 모습만으로 식물과 동물을 쉽게 판별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공부를 할수록 꼭 이게 아니란 걸 배우게 된다. 어린 시절, 시험에 자주 출제되던 문제들 중 하나가 '산호초는 식물인가 동물인가?'이다. 산호초의 겉모양을 보고 식물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한다. 이미 우리들의 머릿속에 생태적 원형(이데아)가 자리 잡고 있어서다.
2011년, 중국 윈난성의 고대 지층에서 과학자들은 독특한 화석을 하나 발견했다. 겉모습은 분명 선인장처럼 생겼는데, 절지동물의 조상으로 밝혀졌다. 식물의 본질은 단순한 형태의 반복 구조인 '줄기와 잎'의 규칙적 모듈화에 있다. 이처럼 단순한 반복의 규칙성이란 생태적 원형을 가진 생물체가 바로 식물이다.
"동물은 움직이고 식물은 움직이지 않는다"
식물은 광합성이라는 놀라운 생리적 기작機作을 통해 살아간다. 이산화탄소와 물, 그리고 빛 에너지만으로 스스로 양분을 만들어 내므로 움직이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빛만 있으면 스스로 양분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 굳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먹이를 찾을 필요가 없다.
식물은 동물처럼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생장生長을 통해 세상에 반응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새로 빚어내며, 그 생명력으로 시간을 건너 존재를 이어가는 생명체로, 동물은 죽음의 종착점을 향해 살아가지만, 식물은 ‘죽음을 넘어 생명을 이어가는 방법을 스스로 발명한 생명체’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생불사永生不死'의 모델이 아닐까 싶다. 또 발이 없어서 도망칠 수 없으니까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계속 진화된 듯하다.
꽃은 잎이 변형된 형태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봄이 찾아오면 내 곁에 두고 오래토록 감상하려는 식물을 한두 가지 선택해 꽃시장에서 구입한다. 이때 꽃이 얼마나 탐스럽고 화려하며 또 향기가 좋은가를 따진다. 즉 꽃이 피지 않는 식물은 대체로 기피한다. 그런데, 꽃은 결국 잎이 변형된 것일 뿐이라는 놀라운 통찰을 제안한 에세이스트가 있다.
이 사람은 바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 등의 문학작품으로 우리들에게 익히 알려진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이다. 그는 문학가이자 자연철학자이면서 식물학자였다. 이 짧은 에세이 '식물의 형태학'(1790년 발표)에서 자신의 통찰을 제안했던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괴테의 통찰이 200년 만에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는 것이다. 겉보기엔 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관찰해보면 꽃받침, 꽃잎, 수술, 암술이 사라지고 모두 잎 조직으로 대체된 돌연변이체, 즉 '잎으로 만들어진 꽃'이 증명되었다.(사진, 삼중 돌연변이체)

우리가 보는 꽃은 대부분 완전화完全花이다. 꽃받침, 꽃잎, 수술, 암술을 모두 갖춘 형태이다. 하지만 자연엔 꽃잎이 없거나, 수술이 결여된 불완전화도 많다. 이같은 변이變異는 ABC 모델의 미묘한 변형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마디풀과의 식물은 꽃잎이 없다. 반대로 튤립은 꽃받침이 없다. 꽃잎이 두 겹으로 겹쳐 있고, 그 안쪽엔 수술과 암술이 있다.
식물도 운동을 한다
앞서 움직이는지의 여부로 동물動物과 식물植物을 구별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식물은 전혀 움직이지 못할까? 아니다. 표현만 다를 뿐, 식물도 움직인다. 동물은 몸을 움직여 환경에 반응하고 식물은 생장生長을 통해 환경에 반응한다.
그렇다. 식물은 ‘움직이지 않는 생명체’가 아니라 자신의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반응하고 움직이는 존재임에도 다만 우리가 그 움직임을 느끼기에는, 식물의 시간이 너무나도 천천히 흐를 뿐이다. 물을 한 동안 주지 않아 축 쳐져 있던 잎이 물을 주면 몇 시간 후에 다시 잎이 일어선 모습을 볼 수 있다. 잎을 들어 올리는 힘이 바로 '팽압膨壓' 때문이다.
그런데, 빠른 속도로 잎이 움직이는 식물도 있다. 대표적인 식물이 바로 '미모사'와 '파리지옥'이다. 미모사는 손끝으로 툭 치기만 해도 재빨리 잎을 접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영어론 '센서티브 플랜트', 즉 '감수성이 많은 식물'이라 표기한다. 파리지옥은 파리를 포함한 작은 곤충을 잡아먹는 식충 식물인데, 잎 안쪽에 있는 예민한 털(감각털)을 두 차례 이상 연속 건드리면 잎이 찰칵하고 닫힌다. 이처럼 '식물은 느리다'고 말하는 것은 선입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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