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과 함께한 사람들
강현규 지음 / 메이트북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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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사회에 단종 신드롬이 불고 있다. 단종의 비극을 다룬 영화에 1천만 관객이 몰렸고, 영원을 찾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단종이라는 이름이 600년 만에 다시 뜨거워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은 그 온기의 정체를 추적한다. - '지은이의 말' 중에서



책의 저자 강현규는 국문학 전공자로 대학 졸업 후 30년간 줄곧 출판기획자의 길을 걸어왔다. '고전 다시 읽기'라는 취지로 고전들을 원전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흥미롭게 재구성해왔다. <쇼펜하우어의 인생 수업>, <존 스튜어트 밀의 지유론> 등 다수의 책을 엮었다.

총 11개 장으로 구성된 책은 크게 두 마당으로 나뉜다. 즉 사람 사이의 신의를 끝까지 지킨 사람들(첫째 마당), 부당한 권력에 맞서 목숨을 던진 사람들(둘째 마당)을 통해 엄흥도, 매화, 안신, 정순왕후, 금성대군 등 신의를 지킨 사람들과 유응부,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 목숨을 던진 사육신의 이야기가 펼쳐 진다.

서평을 쓰기에 앞서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떠올랐다. 작품의 줄거리는 이렇다. 천사 미하일은 한 영혼을 데려오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받고 인간계에 내려왔지만, 아이 엄마가 간청하는 바람에 이를 어겨 인간계로 유배당하고 만다. 이때 '사람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겐 자기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가 있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때까지 인간계에 머물라는 형벌을 당한다.

추운 겨울 벌거숭이 몸으로 인간계에 내려온 미하일은 구두를 만드는 시몬을 만난다. 한 농부집에 세들어 살며 구두를 만드는 일로 아내와 자식을 근근히 먹여 살리는 시몬은 그날 수금을 하러 나왔다가 길에서 미하일을 만나 자신이 입은 코트를 벗어 시몬에게 입혀 자신의 집으로 대려온다. 이후 미하일은 시몬의 조수가 되어 일을 배운 뒤 시몬의 훌륭한 조력자가 된다. 아무튼 미하일은 인간계에 머물면서 인간의 마음 속엔 하느님의 사랑이 있고, 인간은 앞 일을 내다볼 수 없으며,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사실을 깨닫고 천사가 되어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그렇다. 인간의 마음 속에 따뜻한 정과 사랑이 있다.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 청령포로 내려온 어린 왕 단종은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엄흥도를 만나 나름 즐거운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또 단종을 향한 충절을 지킨 사육신은 죽음으로 끝까지 의리를 지킨다.


신의信義를 지킨 사람들
         

호장인 엄흥도에게 하달된 명령은 지엄했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내용이었다. 삼족을 멸한다는 것은 집안이 송두리 째 사라진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엄흥도는 죽은 임금에 대한 예를 다하고 싶었다. 장롱 깊숙히 보관했던 어머니를 위한 수의를 꺼냈다. 이 밤에 수의가 필요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집안 사람들은 이를 적극 만류했지만 엄흥도는 왕에 대한 효孝를 다하고 싶었다. 어두운 밤, 강물에서 단종의 시신을 건져 올렸던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이라면, 그것이 정녕 내가 원하는 바다.”

시녀 매화는 먼 훗날 한양으로 돌아가 정순왕후에게 “상감께서 이 길을 걸으실 때 이러한 모습이셨습니다”라고 전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통감하고 행렬이 광나루를 지나 원주를 거쳐 영월로 들어설 때까지, 왕의 곁을 멀리하지 않았다. 주막에서 얻은 찬밥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왕에게 올릴 탕약의 온도가 식지는 않았는지 아전들을 다그치며 살폈다. 또 청령포에 도착해 왕이 기거할 방의 먼지를 걷어낼 때까지, 그녀의 손에서 수발 도구가 떠난 적이 없었다.

안신은 왕이 사약을 들이켜는 순간에도 그 소리를 가슴으로 받아내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는 빈 사발을 수거한 뒤, 준비해둔 깨끗한 수건을 꺼내 왕의 입가에 묻은 검은 흔적을 닦아냈다. 죽음의 문턱을 넘는 순간까지도 왕의 얼굴에 오점이 남지 않게 하려는 마지막 ‘세수洗手’였다.

정순왕후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동쪽을 향해 절을 올렸다. 이것이 죽은 왕에게 건넬 수 있었던 신의였고, 말이 금지된 시대에 오직 몸으로 권력에 대핳해 인간의 존엄을 지켜낸 방식이었다. 금성대군은 조카를 홀로 두자 마라는 선왕先王의 유언을 받들었다. 하지만 단종 복위 거사는 실패했다. 순흥에 도착한 그를 맞이한 것은 집 주위를 에워쌀 탱자나무 가시뭉치들이었다. 위리안치圍籬安置라는 창살이었다.

불의에 맞서 목숨을 던진 사람들

세조가 직접 국문에 나섰다. 유응부는 세조를 임금이 아닌 “나으리”라 불렀다. 분노한 세조는 뜨겁게 달군 쇠꼬챙이로 유응부의 넓적다리를 관통하게 했다. 살 타는 냄새가 진동했으나 유응부는 “불이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며 고통의 형벌을 조롱했다. 유응부는 자신의 살점을 내어주는 대신 입을 열지 않았다. 

성삼문은 고통 속에서도 세조의 눈을 빤히 응시하며, 누가 진정한 역적인지를 묻는 질문을 던졌다. 세조가 관료로서 받은 녹봉인 쌀을 거론하며 비난하자, 성삼문은 “내 집에 가서 기록을 확인하라. 네가 나에게 준 것은 단 한 톨도 먹지 않고 따로 쌓아두었다.”라고 당당하게 맞섰다. 사람을 보내 확인해보니, 성삼문의 집 창고에는 세조 즉위 이후 받은 쌀가마니가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세종과 문종을 거치며 박팽년이 다듬은 문장들은 성균관의 가르침부터 나라의 조세 기준에 이르기까지 조선이라는 국가의 거대한 설계도가 되었다. 그는 “문장이 곧 나라의 정직함”이라고 믿었으며, 그 신념은 훗날 권력이 문장을 왜곡하려 할 때 자신의 목숨을 걸고 맞서는 유일한 무기가 되었다.

고려 말의 대유학자 목은 이색의 증손으로 태어난 이개에게 문장이란 개인의 재주를 뽐내는 수단이 아니라 국가의 기강을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계유정남 이후 이개의 책상엔 정당성을 조작하려는 서류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찬탈'을 '순리'로 '숙청'을 '결단'으로 고쳐 쓰라 명령했지만 그는 붓을 잡는 대신 빈 벼루를 갈며 시간을 보냈다.  

녹봉 반납은 하위지의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행정적 의례였다. 가마니가 창고로 입고될 때마다 하위지는 입고 대장을 직접 확인하고, 그 위에 ‘미수용未受容’이라 적힌 작은 종이를 일일이 붙여두었다. 그의 밥상은 녹봉 대신 선산에서 가져온 거친 곡식들로 채워졌다. 그는 매일 아침 허기진 채 대궐에 들어갔고, 퇴근 후에는 고향에서 올라온 소박한 찬으로 끼니를 때웠다.

유성원은 알고 있었다. 국문장에 서는 순간, 자신의 신체는 자백을 추출하기 위한 도구가 될 것임을, 자신의 목소리는 권력이 원하는 문장을 완성하는 재료가 될 것임을. 이에 
그는 화로에 불을 지피고,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거사 관련 명단과 서류들을 하나씩 태웠다. 그리고 그는 칼을 꺼내 자신의 목을 겨누었다. 차가운 시신으로 침묵함으로써 그 기록의 칸을 영원한 빈칸으로 남겨두었다.

신의는 살아있다

책은 단종과 함께헸던 11인의 삶을 소개한다. 이름 없는 시녀 매화, 마을 호장 엄흥도, 선왕의 유지를 받들다가 생을 마감한 금성대군, 왕위 복위 거사에 실패해 목숨을 잃은 사육신 등이 보여주는 충절과 의리는 역사 속에 유유히 흐른다. 이들의 충절과 의리는 바로 대문호 톨스토이가 말하려던 인간이 지닌 고고한 감성인 '사랑'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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